브릿G에서 『낙원남녀』로 출판 작품을 연재하고 계신 나혁진 작가님과 나눈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낙원남녀』는 애거서 크리스티 풍의 본격 추리소설을 의도했습니다.
물론 완성도에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용의자를 수사해 범인을 잡아내는 고전적인 추리소설 장르를 시도해본 것입니다.”
Q. 브릿G에서 연재하고 있는 『낙원남녀』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먼저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요.
A. 네 번째 장편소설이 무사히 출간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게다가 표지도 예상보다(?) 훨씬 사랑스럽게 잘 나와서 만족도가 딱 두 배입니다. 이렇게 표지나 책 만듦새가 좋으면 작가 입장에서 무엇보다 행복하지만 핑곗거리가 사라져서 걱정도 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동안에는 책이 잘 안 팔리면 표지만 좋았어도 두 배는 더 나갔어, 하면서 지인들에게 변명할 수 있었거든요. 변명거리를 미리 제거해준 편집부에 감사와 유감을 동시에 보냅니다.
『낙원남녀』는 유지혜와 강마로 콤비가 여섯 명의 용의자를 찾아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요. 『낙원남녀』의 모티브가 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이 있습니다. 플롯 구성면에서는 『다섯 마리 아기 돼지』가 모티브가 되었고, 캐릭터 구성면에서는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가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동요이자 용의자 각각을 아기 돼지 다섯 마리에 비유한 작품 『다섯 마리 아기 돼지』는 20년 전의 사건 관계자 5명을 찾아간 탐정 푸아로가 인터뷰만으로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입니다.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가는 남자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를 바탕으로 평범한 남녀 콤비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작품 모두 재밌어 추천하고 싶네요.
전업 작가로 나선 지 5년 동안 네 편의 장편소설을 썼는데, 전부 종이책으로 펴낼 수 있었던 게 제가 봐도 용하다 싶습니다. 잘 팔리거나 크게 떠본 적도 없는 작가가 쓰는 족족 출간되는 것이 진정한 미스터리가 아닐까 싶네요, 하하.
Q. 미스터리 장편 소설을 여러 편 쓰셨는데, 하드보일드에서 스릴러, 코지 미스터리 등 아주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셨죠. 그중에서 가장 쓰기 즐거운 장르가 따로 있으신가요? 아니면 더 쓰기 어려운 장르가 있으시다거나?
A. 원래 뭐든지 잘 질리는 성격이라서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것 같습니다. 반찬도 낮에 먹은 걸 저녁에 안 먹고, 출판사에 다닐 때도 7년 동안 다섯 번이나 이직할 정도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걸 싫어합니다. 그래서 생활에 안정이 안 되고, 이 나이 먹도록 이 모양 이 꼴로…….
각설하고 특별히 쓰기 즐거운 장르는 잘 모르겠습니다. 뭘 써도 줄담배에 머리를 쥐어짜고 생고생하며 쓰는 스타일이라서요. 스티븐 킹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날 쓸 이야기를 빨리 작업하고 싶어 안달복달한다는데, 그런 분이야말로 작가의 재능을 타고난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막상 컴퓨터 앞에 앉아도 인터넷 뉴스부터 연예가 소식, 영화 사이트 등에서 몇 시간을 허비하다가 죄책감이 느껴질 때가 돼서야 겨우 한두 장 써놓고, 오늘 작업은 충분히 했으니 나에게 주는 선물! 운운하며 치맥 한잔하고 잘 때가 많거든요. 다만 모든 작가가 그렇듯이 통장 잔액에 따라 작업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Q. 추리 플롯은 보통 어떤 방식으로 떠올리시나요? 캐릭터나 에피소드를 창조하실 때 도움이 되는 비법이 따로 있으신가요?
A. 통상 핵심이 되는 줄거리나 배경을 먼저 떠올리면서 작업합니다. 예를 들어, 졸저 『교도섬』은 필리핀의 원시적인 섬에서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 대결한다는 내용으로 구상했습니다. 배경을 필리핀의 오지로 설정했는데, 갑자기 기중기나 로봇 등을 이용한 트릭이 나온다거나 하면 안 되잖아요? 핵심 줄거리나 배경에 따라 자연스레 플롯이나 트릭이 제한되는 것이죠. 이렇듯 제한된 설정 안에서 이야기의 맛을 최대한 살려주는 방향으로 플롯이나 트릭을 다듬으면서 결말을 향해 달려 나갑니다.
캐릭터 역시 해당 소설의 줄거리에 가장 잘 맞겠다 싶은 성격을 설정하므로 딱히 공통점은 없습니다. 아, 한 가지 있다면 대개 탐정 역을 하기 때문인지 다들 말이 많다는 겁니다. 원래 캐릭터라는 게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는 투영되기 마련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저부터가 뻐꾸기 날리는 걸(요즘은 이런 표현 안 쓰죠?) 엄청 좋아하는 중증 수다병 환자라서요.
Q. 『낙원남녀』는 강남에 존재하는 가상의 서민 아파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책의 말미에 후기에서도 밝히셨지만, 아직 책을 읽지 못한 독자분들을 위해서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A. 말씀대로 작가 후기에 적은 내용인데, 몇 년 전에 제가 사는 18층 아파트에서 화재 경보가 울린 적이 있어요. 급하게 집에서 뛰쳐나와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지요. 저희 집이 10층이라 한 층, 한 층 내려갈 때마다 자연스레 아래층 사람들과 합류하게 됐습니다. 아파트 주민들이 죄다 뛰쳐나와 한 3층쯤 가니까 거의 수십 명으로 불어났어요. 그런데 불이 났을지도 모르는 나름 절박한 상황에서 아파트 주민들이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는 겁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 504호 분이시구나.” 등등 인사가 끝이 없었죠.
실제로 불이 난 건 아니고 경보기 오작동으로 곧 다시 각자 집으로 흩어졌지만 그날의 정겨운 기억은 왠지 머릿속에 오래 남더라고요. 처음으로 이 살풍경하게 하늘 높이 뻗기만 한 집단 거주 공간에 낯선 ‘타인’이 사는 게 아니라 ‘이웃’이 살고 있다는 걸 의식하게 됐지요. 그때부터 언젠가는 꼭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특성상 주인공 지혜가 만나는 이웃들은 뭔가를 숨기고 악의도 있는 등 부정적인 면이 강하지만 그들과의 잦은 만남을 통해 지혜는 그전에는 몰랐던 이웃의 꿈이나 아픔, 비밀 등에 눈을 뜨게 됩니다.
Q. 『낙원남녀』에는 개성적인 여섯 명의 용의자와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죠. 이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가 있다면 어떤 인물일까요?
A. 『낙원남녀』는 애거서 크리스티 풍의 본격 추리소설을 의도했습니다. 물론 완성도에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용의자를 수사해 범인을 잡아내는 고전적인 추리소설 장르를 시도해본 것입니다. 본격 추리소설에서는 대개 5~6명의 용의자가 등장하는데(그것보다 적으면 답이 너무 쉬워지니까요), 특히 애거서 크리스티는 용의자들을 고집 센 노파, 꼰대 전직 군인, 말괄량이 부잣집 딸 등 일종의 캐리커처 식으로 가볍게 그려내고 있어요. 만약 모든 용의자에게 치밀한 성격이나 깊이 있는 과거 등을 부여한다면 오락성을 우선하는 본격 추리소설하고 맞지 않을뿐더러, 쪽수도 거의 1,000페이지는 돼야 할 테니까요.
저 역시 여섯 명의 용의자들에게는 캐리커처 기법을 도입했지만 두 주인공의 감정이나 과거에는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특히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여주인공 지혜는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그 나이 대 여성들의 아픔이나 좌절감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마음이 가네요. 강마로라는 인물은 작가인 제 모습이 많이 투영된 것 같습니다. 두 캐릭터 모두 잘생기고 예쁘며 모델과 닮지 않았습니다.
Q. 이번 작품을 쓰시면서 발생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으시다면 알려 주세요.
A. 가장 당황했던 건 뭐니 뭐니 해도 출간 직전에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핵심 배경인 낙원아파트가 북향이었다는 거죠. 별생각 없이 북향으로 설정하고 약도도 그렇게 그렸는데, 편집부에서 한국에 북향 아파트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겁니다. 시쳇말로 완전 멘붕에 빠져서 알아보니 역시나 그렇더군요.
만약 한국에서 건축법으로 북향 아파트를 원천적으로 허가해주지 않는다거나 현실에서 북향 아파트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했을 거예요. 다행히 한강 남쪽 편에는 조망을 위해 북향으로 짓는 경우도 많고,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부족한 일조권 때문에 북향 아파트에서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좀 찜찜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지요. 단순히 머릿속 그림으로는 말이 되는 것도 실제 현실에서 적용하면 말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걸 크게 깨달은 경험이었습니다.
또 『낙원남녀』는 원래 2016년에 쓰면서 2015년 여름을 배경으로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2015년 여름을 강타한 메르스 사태의 한가운데에 주인공 지혜와 마로 탐정이 겁도 없이 너무 당당하게(?) 돌아다니고 있더군요. 소설 속 지혜의 꿈 장면에서 다소 뜬금없이 전염병과 백신이 나오는 것도 메르스 사태를 완전히 무시하는 게 걸려서 무의식에서나마 영향을 받고 있다는 식으로 눙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출간작에서는 2016년으로 시간적 배경을 옮겼기에 크게 상관이 없어졌지만 꿈 장면은 그대로 놔뒀습니다.
추리소설의 플롯은 대동소이한 편이라 캐릭터에 힘을 실으려고 인물 설정도 퇴고하며 소폭 수정했습니다. 원래 강마로라는 인물은 성격이나 용모가 우수하기보단 평범한 남자에 가까웠는데요. 더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고자 지금의 표지와 같은 훤칠한 키의 미남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력은 허당인 초보 탐정입니다.
Q. 직업이 ‘추리 소설 작가’라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일상에서 추리력이 빛날 것만 같고 괜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추리 소설 작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가요? 독자분들의 호기심을 채워 주세요.
A. 원래 추리소설 애독자에서 추리소설 편집자로, 추리소설 편집자에서 추리소설 작가로 변신할 정도로 추리소설을 사랑합니다. 장서도 추리소설만 2,000권 넘게 있고요. 워낙 추리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매사를 추리소설적으로 보게 되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한 번 그나마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긴 했는데요. 아주 예전에 저희 이모 아들이 고등학교 때 폭주를 뛰다가 붙잡힌 적이 있습니다. 그 사촌 동생은 광복절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다가 경찰에 체포된 건데 교통 방해와 시민들의 숙면을 방해한 죄는 당연히 처벌받아 마땅하지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녀석은 소화기를 들고 길거리의 남녀에게 닥치는 대로 뿌렸다는 심각한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면회를 갔더니 자신은 절대로 안 했다고 주장하면서 눈물을 철철 흘리더라고요. CCTV를 보니 동료(?) 폭주족들과는 달리 그 녀석은 혼자서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모, 녀석은 분명 오토바이를 몰다 잡혔어요. 그런데 분말 소화기를 분사하면서 오토바이를 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알다시피 소화 분말을 뿌리려면 안전핀을 뽑아야 하고 레버를 꽉 잡아당겨야 합니다. 소화기 자체가 별로 가벼운 물건도 아니죠. 그걸 들고 다니면서 사람에게 정조준해서 뿌리고 오토바이 운전까지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 사건은 분명히 오토바이 뒤에 탄 동승자가 저지른 일입니다. 한 명은 앞에서 운전하고 뒤에 탄 다른 녀석이 소화기를 뿌렸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문제의 소화기를 수거해보면 아마 지문이 남아 있을 겁니다. 소화기를 그토록 뿌렸다면 소화기에 묻은 하얀 분말에 지문이 뚜렷하게 묻어있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어때요, 대단한 추리는 아니지만 추리소설을 생활화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요? 참고로 범인은 금방 잡혔고, 제 사촌 동생은 다시는 폭주를 뛰지 않고 무사히 졸업해서 지금은 열심히 회사 다니고 있답니다.
Q. 개인적으로 독자분들께 여름에 읽기 좋은 추리 소설로 추천할 만한 작품이 있다면?
A. 도진기 작가님의 『유다의 별』을 강력 추천합니다. 1930년대의 실존 사이비 종교와 오늘날의 불가능 범죄를 연결시킨 구성부터가 한국 추리소설에서 보기 드문 장대한 스케일을 보여줍니다. 작가님 특유의 밀실 트릭도 두 개나 준비되어 있고요. 무엇보다 일제시대 때 실제 재판 기록을 몇 달이나 분석하고 본인만의 작법으로 재구성해서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기 쉽게 만든 역량은 법조인 출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작업입니다. 여러모로 한국의 2000년대 이후 추리소설 중에서는 최고 걸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에 나온 같은 작가님의 단편집 『악마의 증명』도 여름에 읽기 좋습니다. 본격 추리와 공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의 맛깔 나는 단편들이 모여 있어 하루에 한 편씩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Q. 차기작으로 생각하고 계신 작품이 있으신가요? 있으시다면 어떤 종류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A. 그동안의 소설들은 홍콩 영화나 일본 만화처럼 다소 과장된 세계를 배경으로 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번 『낙원남녀』는 좀 더 현실적인 세계관으로 접근해본 첫 시도이고요. 앞으로는 좀 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취재하여 1950년대부터 2010년까지의 전쟁고아를 주인공으로 한 시대 추리소설에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이럭저럭 한국에서 40년을 살다 보니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대해 나름대로 느낀 점을 얘기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네요. 물론 독자분들이 『낙원남녀』을 읽으신 뒤 뒷이야기가 더 궁금하시다면 작가로서 속편 또한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대부」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좋은 친구들」처럼 품격 있고 완성도 높은 한국형 갱스터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보고 싶은 건 제 영원한 꿈입니다. 데뷔작 『브라더』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었는데, 결과물에 아쉬운 점이 너무 많아서 꼭 재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추리소설가의 궁극의 꿈이라 할 수 있는 현란한 트릭을 바탕으로 한 일본식 신본격 추리소설도 역량을 더 높여 꼭 시도해볼 계획입니다.
Interviewed by 영국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