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찬사를 바치겠습니다. (밀사 작가전)

대상작품: <흔해빠진 여성사> 외 4개 작품
큐레이터: melpo, 1월 9일, 조회 63

조지프 콘래드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폴란드 태생의 뱃사람인데, 영어를 20살 넘어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소설을 썼죠. 이 사람이 쓴 소설을 보면 문장 하나하나가 굉장히 빡빡합니다. 평소에 전혀 쓰지 않을 법한 단어도 자주 튀어나오고요. 사전을 뒤져가면서 썼던 걸까요? 호불호는 갈리는 문체겠지만, 온갖 낱말과 비유를 섞어 쓴 그의 글은 굉장한 표현력을 갖게 됩니다. 고민하며 공들인 문장에 그만큼 깊이가 따라오는 것도 당연하지요.

밀사 작가는 최근에 브릿g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 같은데, 우연히 첫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몇 문장 읽기 전에 깜짝 놀라 버렸습니다. 머릿속에서 즉각 콘래드가 떠올랐던 겁니다. 문장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글의 자유분방한 구성은요? 이건 보르헤스나 밀란 쿤데라가 생각나는군요. 여하간 평소 보는 글과 기조를 달리하는 글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페이지마다 한참 동안 붙잡고 음미하며 곱씹어 봐야 하는 글. 오직 문장의 힘만 가지고도 끝까지 가져갈 가치가 있는 그런 글.

하지만 그런 글로만 소개하기에는 아깝습니다. 글에 담긴 주제에 대한 성찰도 무척 돋보입니다. 작가의 첫 두 글은 페미니즘에 관해서였습니다.

첫 글은 페미니즘의 당위성에 대해서, 두 번째 글은 페미니즘의 향로에 관해서 쓰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한 것처럼 보이고 또 그 편이 비유를 따라가기 쉽습니다.

이건 간단하지도 않고 더욱이 민감한 주제죠. 저라고 모든 부분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아 모든 부분을 다 이해했다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밀사 작가가 글을 쉽게 쓰는 편은 아닙니다(전혀, 아니죠). 하지만 주제에 관해서 많은 시간 생각하고 썼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초장에 등장하는 시지프스 개념부터 범상치 않으며, 그간 공격 일변도의 형태로 진행되어 온 페미니즘 운동의 한계를 자조하는 코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시되는 미래상에 대해서는 직접 해석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성찰하기 마련입니다만 저는 ‘비인간’ 개념이 썩 괜찮게 들리는군요.

‘이미테이션 석영’이 다음으로 업로드된 작품입니다. 본래는 이 소설의 단독 리뷰로 글을 올리려고 했습니다(제목에서 유추되듯이). 인간 관계라는 것과 작가 자신, 그리고 예술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고 할까요. 여러모로 매력 있는 글이었습니다. 별개로 독립하는 작품이므로 이것 먼저 읽으셔도 좋겠지요.

여성(이자 작가 본인의 아바타)으로 보이는 주인공이 역시 여성으로 표현되고 있는 대상을 사랑합니다. 여기서 이전 글처럼 페미니즘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만 이런 점은 전혀 소재화되지 않으며 단지 사랑과 관계라는 개념 그 자체에 대해서만 몰두하는 글입니다. 사상적인 면에서 다소 프리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무언가를 사랑함이란 무엇인가. 나는 나의 윤곽선을 자각한다. 나는 나의 윤곽선 너머의 사물들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려 한다. 나의 인력이 강하거나 상대의 인력이 강하다면, 어쨌든 우리는 한 공간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성숙한 관계라면 관계의 성원은 그 윤곽선을 자유로이 들고 나며, 그이가 윤곽선을 빠져나올 때 받는 손실과 타격도 훨씬 적을 터이다. 나는 스스로를, 성숙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의 인력은 영원하며, 그 무엇도 한 번 발을 들인 나의 낙원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윤곽선에서 나를 소외시키고, 외부 행성으로부터 들여온 것들로 군락을 지어 거기 그대로 있게 한다. 나는 나의 윤곽선 안의 군락을 방치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채 그 안에 빨려들어가 있다.

뒷문단은 생략합니다만 그건 단순히 길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작품을 보실 때 그 흥취를 온전한 상태로 체험하시라는 저만의 깊은 배려입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하나만 더 가져오겠습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문장 하나하나가, 당신이다. 나에게는 오로지 당신을 번역하기 위해 준비된 알고리듬이 있어, 나는 언제든, 당신을 만날 때마다 한가득 얻어낸 당신의 덩어리를 거기에 밀어넣어 분쇄한다. 처참한 비명과 함께 당신이 갈려들어가면, 내 입에는 천천히 침이 고이고, 기계 너머에서는 아주 향긋하고 농밀한 꿀 냄새가 가만한 밀물처럼 쏟아져 흐르기 시작한다. 뒷통수 즈음에서부터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있다. 당신은 사랑스럽다. 당신은 달콤하다. 당신은 꿈과 같다. 당신은 자주 나의 심장을 아프게 한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중간 부분을 떼어 놓으니 좀 격렬하게 보이는군요. 원래는 내내 차분하고 사색하는 톤입니다. 그건 그렇고, 마지막 저 ‘ㅏ’ 소리의 반복을 보셨습니까? 속으로 되새겨가며 이을 말을 고민하지 않고서야 저런 문장은 나오지가 않습니다. 보기 흐뭇한 열정이지 않습니까. 다른 거대한 담론과 동등한 수준으로 자기 자신을 이토록 치열하게 성찰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정성 가득한 방식. 작가로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 올라온 두 작품입니다. 윗것은 공산주의에 관해서 쓰였습니다(정확히는 유산계급-무산계급-탈락계급의 관계).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성찰이 전제된 글임은 앞에서 구구절절 밝혔고, 소재를 이유로 함부로 저어할 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을 받아들이느냐는 별론으로 두고 사회 구조를 바라보는 시야에 관하여 고찰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랫것은 어떤 트위터 출신 인연을 바탕으로 소설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가는 글입니다. 이 작품은 워낙 실감나게 쓰셔서 평하기 조심스럽습니다. 여하간 모두 읽어 볼 가치가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밀사 작가의 작품은요.

밀사 작가는 플롯으로 승부하는 작가가 아닙니다. 플롯중심의 대중문학과는 거리가 있죠(기승전결 구조를 가진 작품이라곤 없습니다). 그러나 작품에 담아내는 성찰의 무게와 문장을 향한 열의가 저로 하여금 절로 이 큐레이션을 쓰게 했습니다. 뭐, 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이 작가에게 주목했겠지만요. 이번엔 제가 선수쳤습니다. 언젠가는 문예지나 독립된 출판본으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렇게 미리 접할 수 있어서 저로서는 재수였네요. 작품들 모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쭉 건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