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라는 이름으로

대상작품: <내가 열지 않았어> 외 9개 작품
큐레이터: 장아미, 18년 8월, 조회 181

금기, 혹은 터부. 그것을 깨뜨리는 자에게 뒤따르는 처벌. “임이여, 그 강을 건너지 말아달라”(公無渡河)는 경고와, “그 임이 끝내 물에 빠져 죽었다”(公果溺死)는 비극처럼.

금기란 자고이래로 한밤중 글 쓰는 이들의 발치에 드리운 그림자 같은 소재였습니다. 낯뜨겁지만 제가 쓴 소설의 한 구절을 빌려 말씀드리고 싶네요.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의 발처럼 손가락 끝이 욕망으로 뜨거워졌다.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누른 선재가 손바닥을 맞비볐다.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빈 문서 위에서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데.”

금단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섯 작가님들의 다섯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그 문을 넘지 마시오, 파멸과 맞닥뜨리게 될지니

첫 번째 이야기, marnorte(montesur)님의 <내가 열지 않았어>.

“네 집. 너의 둘. 더 이상 담은 들어오고 나가는 걸 막지 못해. 문이 활짝 열렸어. 담 밖의 모두가 너를 바라볼 거야. 네가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어.”

사당과 아파트, “처음부터 열려 있”던 문과 그 너머 “이음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굳게 닫힌 문”, 안과 밖, 당신과 나, 바이크와 자동차, 둘. 수수께끼로 약동하는 이 단편의 심장에는 대구가 있습니다. 한때 왼손이라는 필명을 쓰신 적이 있는 montesur님의 글에서 좌와 우, 방위와 지리를 가리키는 온갖 지시들은 쉽게 흘려 넘길 수 없는 상징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내가 열지 않았어>는 첫 줄부터 마지막까지 아슬아슬한 위험의 정조로 가득 차 있는 호러 작품이며 그에 일조하는 것은 역시 금기를 깨는 행동들입니다.

‘나’가 만약 그 사당의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았다면 내게는 파국적인 결말이 들이닥치지 않았을까요. “엔진 시동을 끄고 왼발(……하필이면!)을 땅에 내디”디는 바로 그 첫 순간부터 나의 운명은 결정돼 있었던 게 아닐까요. 터널에 부딪쳐 흩어지는 엔진 소리의 여음처럼 이야기는 뭉개지고 뒤섞여 몽롱하게 흐려져 있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 매우 단정적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남자임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시연에 비하면 성별부터 불분명한 주인공 나처럼, 그럼에도 그들이 “4년 동안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던 연인”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듯.

생략된 장면 이면에 손에 잡힐 듯 또렷한 파멸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이 단편은 그래서 더욱 긴 여운을 남깁니다. <내가 열지 않았어>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이끌린 독자님이라면, ‘선생’이라는 금기에 도전하는 montesur님의 신작 장편 <과외활동>을 강력하게 추천 드립니다.

 

 

금기는 쾌락과 함께

두 번째 이야기, 해도연님의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

씹고 싶지도 않았다. 입속에서 느껴지는 면발의 생기 넘치는 움직임은 마치 천사의 춤사위 같았다.

해도연님의 작품 속 인물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며 향기 맡는 데 익숙할 뿐더러 그것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지니가 “쓴 샴푸의 오렌지 향이 아스라이 퍼져나”가고(<안녕, 아킬레우스>), “신우는 블루베리 초콜릿이 듬뿍 발린 한정판 올드패션 도넛을 한입 깨”물지요(<블루베리 초콜릿 올드패션>). 민감한 독자님이라면 해도연님의 소설을 읽고 공기 중을 감도는 미세한 피 냄새를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올 여름 첫 소설집 <위대한 침묵>을 발표한 해도연 작가님이 “첫 글이라고 생각”하신다는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은 스파게티, 즉 음식을 소재로 삼았으며 그에 걸맞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미각의 극치를 선보입니다. 그것의 정점에는 미와 섹스와 쾌락이 있습니다. 접시 위 음식을 눈앞에 두고 ‘나’는 되뇝니다. “아내는 가냘픈 몸을 내게 붙이며 새하얀 촉수 같은 양팔로 내 목과 가슴을 감쌌다.” “하얀 접시 위에서 검은 면발들이 몸을 섞고 있었다. 집단교미하는 벌레들 같다.”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아 전율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금기라는 스파게티는 열락이라는 그릇에 담겨 당신의 테이블에 놓입니다. 그것을 드시겠습니까. 드시지 않겠습니까. 감히 말씀드리건대 당신에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건 어느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기에.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이라는 미식을 만족스럽게 즐긴 독자님이라면, 그보다 강렬한 맛으로 기억될 <안녕, 아킬레우스>의 일독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어? X 까라 그래.

세 번째 이야기, 붕붕님의 <당신의 웨딩플래너>.

그 안에는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악의가 꿈틀대고 있었다. 도무지 겁대가리라곤 없는 여자였다. 아니면 분노에 미쳐 사리분별을 못하게 되었거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잠이 오지 않는 밤, 품에 안고 위안을 구하는 낡고 폭신한 곰 인형 같은 것일까요. 혓바닥에 올려놓는 즉시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초콜릿의 풍미와 닮아 있을까요. <당신의 웨딩플래너>에서는 최소한 그렇지 않습니다. 악의적이고 거침없는 이 단편소설 속에서 사랑은 충동질합니다. “결혼식을 망치”도록. 아니, “망치는 정도로 끝낼 순 없”습니다. “다 박살”내야 합니다. “예식장 매니저 신상”을 털고 “웨딩사진 촬영기사를 납치”해야 합니다. 그 이상, 그 이상의 이상입니다. 더는 발설할 수 없습니다. 직접 읽으셔야 합니다.

사랑이 불타 없어져버린 자리에는 광기만이 남습니다. 그 잿더미가, 아수라장이 모두의 손을 더럽힙니다. 아무도 진심을 고백하지 않고 복수는 성공하되 그 뒷맛은 달콤하지 않으며 약삭빠르게 굴지 않으면 뒤통수를 맞게 됩니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세상 아닙니까.

반성할 틈 따위는 주지 않고, 일말의 후회나 망설임 없이 질주하는 이야기에 매료된 독자님이라면, 붕붕님의 장편 작품 <짐승>을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 붕붕님의 연재작 <오늘의 징징> 중에서 4, 6, 7, 8회차에 걸쳐 공개해놓으신 <어둠의 탐정 장아미> 시리즈의 일독 역시 권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최고로 용감한 욕망

네 번째 이야기, 노타우님의 <자애로운 애자씨>.

그와 같은 느낌인, 종교가 없는 그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실한 믿음을 통해 얻는 충족감과 비슷했다.

나는 매정하지 않아.

그녀는 생각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애자입니다. 사랑 애 사랑 자, 아마도 자애(慈愛)와 같은 한자를 쓰지 않을까요. 사랑 자 사랑 애. 애자는 진정으로 ‘자애로운’ 사람입니다. 그 마음이, 이렇게나 선량한 사랑이 애자를 위로하고 움직이게 만듭니다. “까치의 고통을 덜어주”도록. “까치의 대가리”를 “왼발”로 누르도록. 그 “작은 머리통”이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으깨지”도록. 그 행위는 “그녀 나름의 애도하는 방식”이었고, “애자씨의 영혼은 어느 때보다 충만해”집니다.

그것이 마흔 번째 생일에 애자씨가 받은 선물입니다. 영적인 깨달음.

여기에서 막을 내렸다면 애자씨의 이야기는 까치가 물어다놓은 둥지 속 돌멩이처럼 잠시 반짝이다 잊혀졌을지 모릅니다. 노타우님은 그 너머, 가려져 있던 커튼을 젖히고 오욕으로 범벅된 광경들까지 과감하게, 남김없이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애정과 희생, 고통과 기쁨, 혐오와 동정, 욕망과 결핍으로 끓어 넘치는 우주가 있습니다. 금기라는 놈의 대가리는 파삭, 소리를 내며 으깨져버린 지 오래입니다.

도덕률 같은 건 떠올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사랑 애 사랑 자. 저는 노타우님이 쓰시는 이른바 ‘호로맨스’(호러/로맨스)의 애독자입니다.

이토록 용감한 사랑 이야기에 호기심이 인 독자님이라면, <자애로운 애자씨>만큼 뜨겁고 절절한 노타우님의 또 다른 단편 <클라우디 베이>를 읽어보시기를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지 않으면

다섯 번째 이야기, <아이 없는 세상>.

선재는 그제야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결코 용서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맞습니다. 이것은 제가 앞에서 슬그머니 인용하고 넘어간 바로 그 단편이기도 합니다. 서울 외곽의 신도시, 남자는 어린이집 행사에 참석했다 한 여자를 만납니다. 아이를 매개로 만나 부정을 저지른 이들에게는 어떤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오늘의 소개는 여기까지입니다.

즐거운 독서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