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만 없다면 내 인생은 완벽해. (똑똑, 문 열고 B 들어온다.)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오리엔트 특급의 또 다른 살인 (작가: 백도씨, 작품정보)
리뷰어: 새벽노을, 19년 10월, 조회 58

0.

소설에 관한 말에는 실없이 웃음이 터지는 못된 습관이 있어, 특히 다음 농담은 기겁할 듯이 좋아합니다. 그 이름은 시나리오 작법의 기본 원칙.

A: B만 없다면 내 인생은 완벽해.

똑똑, 문을 열고 B 들어온다.

완벽함은 결함이 없어, 변화나 개선이 필요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정지 신호와 같네요. 하지만 정지란 불가능한 행동이고, 살아있는 자는 행동합니다. 잠시 죽어 자신의 기억과 고통을 읊조리는 이 A가 살아야 소설이 움직이겠지요. 그러니 B를 한 움큼(원고지 71매) 섞고 오물오물 주무릅시다. 문을 열고 B가 들어옵니다.

불현듯 인기척이 들렸지요. 문이 열려 있었어요.

그리하여 지구처럼 불변할 것 같던 이 사람의 세계가, 얌전히 그리고 세계의 예의범절에 맞춰 노크하고 들어오는 인물에게 무너진다니, 일상과 이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진 독자들이라면 기꺼이 환영하겠지요.

나아가 소설이 학습된 무기력과 기만을 측면돌파하는 예의바른 무너짐이라면, 단편의 완성도란 곧 모든 장면이 그 붕괴를 제대로 지시하는가에 달렸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네,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 리뷰는 본 소설, 「오리엔트 특급의 또 다른 살인」을 찬양하는 글이 되겠으니, 저 특급에 탑승하셔 한 바퀴 돌아보시길 권합니다.

 

 

1. 첫 정거장, 방관자라는 달콤한 자리

열차에 대한 로망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서술자는 이야기 내내 욕망을 지닙니다. 하나는 오리엔트 특급에 대한 동경이며, 다른 하나는 어릴 적 알던 세미에 대한 의문입니다. 이야기의 후반부, 즉 자신의 의도와 다른 인터뷰 기사가 나오기 전까지, 이야기는 서술자의 욕망과 그 방해물로 꼼꼼히 채워집니다. 서술자는 오리엔트 특급에 타고 싶으나 돈이 모자랍니다. 심지어 학원에선 해고되어 시간만이 남아돌지요. 한편 어릴 적 알던 세미가 떠오르나 그 속사정은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문득 이 기억을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연계하겠다는 마음이 들고, 이 소설이 상을 받으며, 서술자는 기차표를 살 돈과 불분명한 기억에 대한 확신을 동시에 얻습니다.

이 소설 쓰기는 자신이 사랑하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서사를 세미에게 줌으로써, 상상으로 세미의 나머지를 채우려던 욕망의 결과입니다. 세미는 유괴를 당했으며, 서술자는 그 은밀한 목격자이자 그 범죄는 밤중의 사이렌으로 끝나고 말았다고요.

 

이미 완성된 작품의 현실성을 뒤늦게 확인하는 일은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

그러게 말이다.

그러나 서술자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곧 서술자의 일방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성을 따지자면 유괴로 확정지을 정황 증거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지요. 실로 유괴와 같은 강력범죄가 있었다면, 아이더러 낯선 이를 조심하라는 경고나 흉흉한 일이 있었더라는 소문이 있었을 터인데, 왜 최소한의 말도 서술자는 기억하지 못할까요? 유괴한 아이를 바깥과 통신이 되는 창문 있는 방에 둘까요? 여자아이는 왜 신고 요청이 아닌 자신의 이름만을 유리에 적어 전할까요?

그러면 서술자가 유추할 수 있었으나 무시해버렸던, 세미가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었다는 가능성이 떠오릅니다. 사적인 일이므로 신고가 무의미하고, 어른들이 아이에게 알리지 않고 쉬쉬 해야 옳은데다, 장기결석아동 전수조사로 수많은 가정폭력 사건이 밝혀졌던 2016년 초반의 풍경을 생각하면요.

만일 그것이 유괴였다면, 서술자는 충분히 방관자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상대가 처한 상황을 이해했으며, 나아가 세미를 구할 수 있는 위치와 힘이 있었음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단어입니다. 그 방관자라는 지위는, 상대가 추억 속의 여성일 때 더욱 달콤한 단어가 되지요.

그러나 가정폭력이었다면요? 경찰이 와도, 심지어 가부장이 칼을 휘두르던 상황에조차 그가 사과하면 다른 식구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지지부진되는 그런 사건이라면? 서술자는 신고 등으로 상황을 개선할 수 없으며, 나아가 서술자 역시 속옷 차림으로 집에서 쫓겨나는 등 권위적인 부모를 지니고 있었으니, 부모와 국가라는 두 길이 막막히 막혀 있던 셈이지요. 모두가 무시하며 방관하므로 “범인은 힘이 센 남성이며 힘이 약한 여성이고, 오른손잡이이며 왼손잡이인” 사건이 기꺼이 거듭됩니다.

이때 서술자는 방관자일 수 있을까요? 인간은 자연재해의 방관자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목격자이고, 오래 생각하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모아 미래에는 같은 일이 없도록 철저히 대비하는 사람이어야 하지요. 방관자라는 자기 호명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유발할 수는 있겠으나, 진실로 할 수 있던 행동이 부재하던 상황에선 달콤한 함정에 가깝습니다. 서술자 역시 자신을 방관자라 부르고, 소설 속에서 배심원들에게 사적 제재를 당하게 할 뿐, 정작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못하지요. 자신의 소설로 적은 상상과 자기처벌에 머무는 대신, 세계를 개선하는 더 나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서술자는 다만 그 달콤한 기억과 자리를 사랑합니다.

 

 

2. 중간 종착지. 오직 한 사람의 기억

서술자는 자신의 기억을 말합니다. 매우 당연하면서도, 모든 당연한 것이 그렇듯이 한계이기도 하지요. 서술자의 기억 자체는 그들이 그 이야기를 사랑함을 뜻할 뿐, 그 이상은 무엇도 말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는 매우 한정적인 경우입니다. 과거형으로 쓰인 모든 소설이 서술자의 일방적인 욕망과 자기기만의 전시장이지는 않으니까요. 1인칭 서술의 그 달콤한 함정을, 자기기만을 벗어나기 위해, 소설의 인물들은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다른 관점에 섞이고, 자신의 관점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관측에 부딪힘으로써, 그들의 관점과 방향은 바뀌어갈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B가 없으면 완벽했을 A는 다행히도 다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일상과 이 세상을 벗어나지요.

다른 사람이 없다면요? 그들은 달리 기억합니다. 이는 사람이 워낙에 생동한 존재라, 다른 사람의 기억에 갇혀서도 새로운 의미를 잘도 만들어내는 덕에 가능합니다. 자신의 옛 기억을 더듬고 열심히 서술하다, 불현듯 그 사람은 사실 이랬구나, 깨닫고 말지요. 인물들은 기억 속에서 새로운 화두를 얻고 돌아옵니다. 기억의 문을 통해 온 B에 A의 완벽함은 무너지고, 그들은 홀로 깨달음을 얻곤 새로이 구르기 시작합니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중략) 적어도 그동안 학원에서 나를 물 먹인 학생은 잊을 수 있었어요.

그나저나 그 학생 이름이 뭐지?

그러나 본 작품의 서술자에게선 그런 배려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꿈이 없다는 학생에게, 서술자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장황설을 내뱉습니다. 세미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라는 그의 취향을 통해서만 해설되며, 그의 수건에 적힌 이루어진다는 꿈은, 아무래도 그의 것에 불과하지요. 그의 소설은 타인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합니다.

그래서 중간 종착지에서, 다른 노선으로 빠질 기회를 놓친 서술자는 묘하게 완벽한 상황으로 들어서고 맙니다.

 

 

3. 목적지, 오리엔트 순환 노선

이런, 어찌할까요? 오리엔탈 특급 살인과 유괴라는 환상에 빠진 그는, 세미를 해쳤을 다른 가능성인 가정폭력은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 사적이며 모든 나라의 전통이라는, 민법 915조로 보장된 완벽한 가정폭력의 세계가 계속됩니다. 서술자의 완벽한 세계를 깨줄 타인은 좀처럼 나오지 않은 채, 기차는 중간 종착지 다음으로 질주합니다.

결국엔 ’당신들‘이 나타납니다. 서술자가 자신의 소설에 적고 욕망한, 방관자를 심판하는 배심원과 다른, 정체를 알 수 없어 누구인지를 물어야 하는 당신들이요. 그들은 인기척을 내며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세미를 상상 속에서 구했고, 오리엔트 특급을 탄다는 꿈을 이루었어!” 이렇게 완벽해진 서술자의 삶에 당신들이 찾아왔습니다.

결말에 이르러 반복되는 몇 문단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저자 없이도 책은 끝나지 않으며 계속 쓰인다는 인용을 생각한다면, 이 장면이 끊임없이 반복되리라는 느낌을 독자는 받기 마련입니다. 이 순환이 위 논의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그것은 점점 강해지는 데자뷰였죠.

지금까지의 문제는, 서술자의 소설이 서술자의 일방적인 상상이자 욕망이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억이 되지 못하고 데자뷰만이 남는, 끝없이 반복되고 망각되는 이야기는 어떨까요?

서술자는 순환 노선 속에서 기시감만을 느낀 채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이때 문제의 원인이던 상상과 욕망이, 오롯이 그의 기억에 빚지고 있음을 상기합시다. 서술자는 기억하지 못하므로 그것을 서술할 수 없고, 따라서 더는 달콤한 자기기만에 빠질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반복되는 이야기란, 서술자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환상이 아닌 현실의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서술자의 사후적인 해석이 불가능해지니까요. 그의 마음에 들지 않던 인터뷰가 사실이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은 그의 오래된 꿈이 아니라 소설의 진위를 판단하는 현실성의 시험대였던 셈이지요. 방에 찾아온 ‘당신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고서야 끝날, 긴 징역형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작가님의 말마따나, 오리엔트 특급은 없습니다. 자기기만에, 완벽한 세계에 빠져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 이를 위한, 현실성을 확인할 시험대란 없습니다. 그러니 유감스럽게도 혈당 자기기만 농도가 높겠다 싶으면, 다른 사람과 관점을 섞어 꾸준히 시험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사람들이 기억을 뺏기고 순환 노선에 내팽개쳐질 만큼 고집불통이진 않을 것이란 희망을, 타인과의 대화가 우리를 바꿀 것이라는 믿음을, 실로 가진다면 그리 나쁜 현실은 아니겠지만요.

 

 

4.

서술자가 목격한 것은 유괴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서술자는 소설과 다른, 자신을 방관자라며 처벌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승객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해보았으나, 실은 이 해석 자체가 제 독단적인 읽기이기도 하지요. 이 소설이 유괴의 방관자를 처벌하는 소설이 아닐 이유란 없으며 그렇게 읽어도 소설은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제 자신이 이 리뷰의 마지막 온점을 찍자마자 자기기만이 과했다며 오리엔탈 특급에 실려 열두 명 손님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2년 전의 소설을 오늘에야 읽고 리뷰를 쓰는 뒤늦음을, 그리고 아무래도 당연하고 진부한 말을 늘어놓은 듯한 부끄러움을, 모든 자의적인 읽기에 뒤따르는 민망함을 데리고 총총 기차 타듯 떠나겠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는 감상을, 단문응원보다 더 길게 적고 싶었어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글 써주셔 정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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