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멍청한 도감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멍청한 판타지 모음집 1~10 (작가: 녹차백만잔, 작품정보)
리뷰어: 랜돌프23, 19년 8월, 조회 152

※주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 이야기가 다량 함유되어있음

저는 호러만큼이나 코믹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코믹도 그 방법과 하위 분야가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 특히 제가 좋아하는 코믹의 느낌은, 나사가 한두 개 빠진 것 같은 정신 나간 센스가 드러나거나, 아니면 기존에 존재하던 클리셰를 철저하게 비틀어버리는 종류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봤고 또 좋아하는 작품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입니다. 읽어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괴악한 센스와 정신을 나가버리게 만드는 과감한 블랙유머들이 가득한, SF코믹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이런 느낌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게 해준 소설이 있었습니다. 제목도 과감한 ‘멍청한 판타지 모음집’입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SF 코믹이었다면, 이건 ‘판타지 코믹’입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판타지 소설 혹은 RPG 게임의 요소 등을 등장시켜 쓴 코믹인데, 그 방법이라는 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존 판타지 작품에 등장하던 당연시되던 설정이나 클리셰를 비튼다

2. 기존 판타지의 세계관에 느닷없이 현실의 요소를 끼얹는다

오우,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재미없게 보이는군요. 코믹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파헤쳐서 분석할 수 있겠습니까? 비논리성과 의외성에서 발현되는 게 웃음인데 말이죠. (흔히 설명이 들어간 개그는 더이상 개그가 아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의 이 리뷰를 보시고 ‘와, 재미없어 보여’하고 편견을 가지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가분께 죄송할 따름이네요…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멍청한 판타지 모음집 1~10’뿐만 아니라 그 뒤로 3편이나 더 있어서 ‘멍청한 판타지 모음집 31~40’까지 있습니다. 연재인듯 연재 아닌 연재 같은 중단편들입니다. 제 리뷰를 읽지 말고 그 소설들을 먼저 읽는 걸 추천드립니다. 중요하니까 볼드체에 밑줄까지 쳤습니다.

어쨌든 다시 말을 이어가자면, 1.은 기본적인 웃음 포인트이자 흔히 쓰이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건 그 장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하기 어려운 작업입니다. 호러의 클리셰와 설정을 비틀려고 해도, 호러를 많이 접해보지 않고 또 좋아하지 않으면 꽤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래서 그 공감대를 콕 집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웃길 수가 없습니다. (호러영화에선 꼭 도망칠 때 시동이 안 걸리더라, 를 언급한 만화 중에서 자동차도 시동이 안 걸리고 오토바이도 시동이 안 걸리고 자전거도 시동이 안 걸려서 죽었다는 게 떠오르는군요. 자전거는 그냥 페달을 밟으면 돼, 멍청아) 하지만 이 소설은 그 부분을 잘 꼬집었습니다. 읽으면서 작가의 재치에 매번 감탄했습니다.

2.는 예전에 네이버 웹툰에 올라왔던 ‘실질객관동화’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99%의 허구에 1%의 사실을 보태는 순간, 동심의 세계는 발작을 일으킨다’는 문구가 나오는데, 딱 그게 들어맞는 방식이었습니다. 허구의 세상에 현실이 보태지자, 판타지 세계가 발작을 일으킵니다. 보통 판타지라는 허구의 세상을 서술할 땐, 현실의 법칙이나 현실 세계에 관한 건 암묵적으로 무시하고 오롯이 만들어진 세계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현실이 자비없이 추가되어 일어나는 효과는 꽤나 대단했습니다.

물론 이 소설의 코믹 요소는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일단 강렬한 인상을 받은 두 가지를 뭉뚱그려 적어놓은 것이고, 실제로 보면 작가의 재치 있는 필력, 천연덕스러우면서 골 때리는 대화들, 살짝 정신나간 센스 등 요소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해체하지는 않으렵니다. 왜 웃긴지 일일이 각주를 달아버리면, 그건 더 이상 웃기지가 않잖아요. 웃음은 그대로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정말 곧이곧대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유머를 만들어냈습니다. 전 그 점이 좋았습니다.

 

특히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짧은 길이의 글들을 주르륵 늘어놓았고, 각 글들의 성공률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머감각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짧은 개그들을 시도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그 글 안에서 의도한 대목에서 의도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재치를 발휘해야 합니다. 재치라는 단어가 자꾸 나오는데, 코믹은 재치의 소설이라 생각됩니다. 거기에 더해 적절한 끊기도 중요합니다. 개그 단편을 쓸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읽는 사람들이 혹여나 이해하지 못 할까봐’ 자신의 의도대로 몰고가기 위해 이런 저런 힌트와 설명을 덕지덕지 붙여 글이 길어진다는 겁니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 제공’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함’, 그 중간의 균형을 잡는 건 모든 장르의 글에서 어려운 것이지만, 코믹에서는 특히나 치명적입니다. 이해를 시키겠다고 글에 이런저런 게 막 붙으면 이해는 되어도 재미가 없거든요. 그러나 이 소설은 각 글이 정말 필요한 서술만 나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을 때 이마를 탁 치며 웃게 만듭니다. 그 유머의 절제미가 감탄스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각 글이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이 없고 각각 개성이 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유행했던 괴담 ‘로어’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길지 않은 서로 다른 개성의 글들이 모여서 하나의 시리즈를 이루다보니, 한입에 들어가는 서로 다른 맛의 스낵들을 하나씩 꺼내 입에 홀랑홀랑 집어넣으며 먹는 것처럼, 계속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며 부담없이 모든 글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독립적이진 않고, 나름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편들이 있었습니다. 그건 그 시리즈 내에서 소소한 재미를 주더군요. (피자 배달부는 정말 멋지고 강한 직업입니다) 저는 읽으면서 ‘와, 이 시리즈 자체가 쭉 이어져서 하나의 커다란 세계관을 형성했으면 좋겠다’라고, 더 읽고 싶고 더 나오길 바란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모든 소설이 꿈꾸는 일이지요.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고, 더 써달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것. 저에게 이 소설은 그런 소설 중 하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로 글로 웃기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코믹 장르에 도전은 해보고싶은 마음은 있지만, 누군가를 웃길 자신이 없어서 끄적거리고 쌓아두고만 있는 실정이지요.(또 지 혼자 아는 거 나왔다고 낄낄대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엔 한바탕 공연을 보고 난 뒤 박수를 치는 것처럼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읽는 내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써놓고보니 이게 감상인지 비평인지 모르겠는데, 주관적인 생각도 많이 들어가고 분석과 해체를 포기한 부분도 많으니 리뷰성격을 ‘감상’으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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