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기대, 기대. 인물은 어떻게 인물을 의심하고 독자는 어떻게 인물을 의심하는지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 (작가: 문녹주, 작품정보)
리뷰어: 소윤, 4월 30일, 조회 67

이 글을 읽기 시작할 때 기대하던 바는 반전되었고, 반전 이후 생각한 기대는 충족되었는데, 막상 그러니 무언가가 허전해서 작가님이 흐릿하게 가려놓으신 글의 말미에 또 다른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말이네요. 서늘하고 이성적으로 쓰는 리뷰가 있고 읽으면서 쌓인 생각을 웱 하고 뱉어내게 되는 리뷰가 있는데 이건 후자입니다. 리뷰에서 스포를 피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할 것 같으니 글을 읽고 와주세요, 재밌습니다.

 

 

 

 

 

 

 

채희정은 7년 전부터 살인범 이혁진을 옥바라지했다. 혁진은 평범한 흉악 살인범과는 완전히 달랐다. 언론을 통해 혁진을 접한 날 희정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 희정은 혁진이 죄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도입부를 읽으면 흉악범과 그를 숭배하는 어리석은 여자의 구도가 머릿속에 세워집니다. 리차드 라미레즈와 도린 리오리 같은. 글이 희정의 시점을 중심으로 쓰였다고 해도 독자가 진심으로 혁진이 흉악한 사람이 아니고 희정의 사랑이 자기파괴적인 충동이 아니라 진심으로 쌓아올려진 관계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슬비 기자의 <살인마를 사랑한 여자들>이 방영될 때에도. “성공한 사업가 채희정이 번 돈의 일부는 살인범 이혁진의 영치금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나올 때에도, 제 반응은 아이고, 능력있는 사람이 어쩌다가 저렇게 되가지고. 하지만 혁진이 고모와 고모부를 살해하게 된 구체적인 동기가 드러나고, 희정과 혁진의 면회가 묘사되면서 오묘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희정의 가족사가 밝혀지고 “비슷한 역경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사람끼리 지니는 연대감”이 언급되면서 이 구도는 보다 확고해집니다. 혁진이 정말 벼랑 끝으로 몰렸을 뿐인 선한 사람인지 – 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희정의 연애에 폭력의 아드레날린에 끌린 병적 충동 이상의 무언가가 있음을 확인된 셈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가진 첫 번째 기대가 뭔가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에 갸웃하고 있을 때 쯤 여름과 하진이 찾아오고 서사는 훅 틀어져버립니다.

하진이 고백한 내용에 따르면 혁진은 희정과 동병상련의 위치에 있는 안쓰러운 청년은커녕 금수만도 못한 놈이고 희정을 속여온 사람입니다. 처음에 충격에 쉽사리 들은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희정도 결국 혁진을 외면하고, 그의 자리는 하진이 차지합니다.

마침 희정의 집에는 하진처럼 키가 큰 남자가 입을 만한 옷들이 많았다. 면도용품부터 양말까지 다양했다. 심지어 속옷도 있었다.

사실 이미 그 순간부터 희정과 하진이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예측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도 이 작품에서 이것만은 제 기대대로 되어서 나름 소소한 마음의 안정(?!)을 얻었습니다. 희정이 혁진을 사랑한 이유를 하진도 모두 가지고 있는데다 한 집에 살며 서로 챙겨주기까지 하는데요. 두 사람은 관계는 지나치게 세밀할 정도로 차근차근히 쌓이며 변화해가고 혁진의 존재는 이제 치워야 할 장애물입니다. 그리고 희정은 혁진을 매우 깔끔하게 치우는 데 성공하지요.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든 생각은 크게 두가지, 첫째는 결국 희정도 혁진과 별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독자가 희정의 판단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희정의 오묘한 태도는 눈에 띠었습니다. 살인범과 사랑에 빠진 사람치고는 감정에 치우치는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고, “혁진은 희정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 상대였다. 일단 친척 어른이랄 사람이 변변하지 않았다” 같은 말도 하고. 혁진을 챙길 때에도 희정은 꼼꼼하고 현실적인 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희정은 하진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분명히 감정적 동요가 일고 있음에도 하진에게 물을 권하고 “힘든 얘기 하느라 고생했어요. 쉬고 와요”라고,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식적이지만 약혼자가 자신을 속여온 친족강간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의 반응이라기엔 묘하게 서늘한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면모는 하진과 연인이 된 이후 출소한 혁진을 만나, 모든 것이 예전같이 문제없는 척 감쪽같이 연기해내는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났습니다.

“나 짐승 될지도 몰라요.”

“이미 짐승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런 철저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희정이 온전히 이성적, 합리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혁진을 확고하게 믿었던 희정이 그 믿음을 무너뜨리고 하진에게 마음을 주게 되는 과정에서 희정은 이미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혁진은 믿음직했고 정이 많고 수줍은 남자였다. 희정과는 오랜 기간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였다. 편지 교환은 생각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길고 긴 편지를 오랜 기간 교환했지만 그걸로 혁진을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편지는 일종의 넋두리였다.

사실 찬찬히 살펴보면 희정이 혁진을 버리고 하진을 믿을 근거는 그렇게 견고하지 않습니다. 주관적일지라도 물질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하진의 일기장조차 희정은 이슬비의 언급을 통해 전해 들을 뿐이고, 그 외에는 오로지 하진의 증언에 의존하는 판단입니다.

혁진과 닮으면서 좀 더 앳되고, 좀 더 안쓰러워 보이고, 좀 더 지켜줘야 할 것만 같은 청년이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희정은 하진이야말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혁진과 하진 중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어느 쪽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와 별개로, 희정은 7년간 혁진에게 속아왔든지 아니면 자기보다 한참 어린 청년의 눈물에 속았든지 둘 중 하나인 셈이니 독자는 더 이상 희정의 판단력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3인칭 작품이기는 해도 실질적인 화자는 희정이라고 해도 괜찮겠지요. 서사를 전달하는 책임자(!)를 신뢰할 수 없는 독자에게는 글을 읽어내는 경험이 무척이나 불안정해지는 동시에 비할 수 없이 흥미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감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슬비 기자 다시 보고 싶습니다. 글이 두서없어서 죄송하지만, 나름 읽으면서 느꼈던 즐거움을 그대로 기록해 보고 싶었어요. 즐거운 글 써 주신 작가님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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