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무척 흥미로운 상상에서 시작한다.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 라니…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 는 엿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하던 주인공에게 응답한 악마-혹은 신일지도 모르는 남자- 앞에 마주앉아 죽음을 두고 협상을 벌이게 되는 이야기이다.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빌딩에 문패조차 없는 사무실’. 이런 곳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할 만한 자리에, 주변과 괴리감을 풍기며 자리 잡고 있는 문으로 한 남자가 들어서게 된다.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 라는 명함을 보고 찾아간 그 곳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듯 보이는 많은 이들이 앉아 있었다. TV 뉴스 화면 아래에 자막으로 자살소식이 계속해서 전해지는 시대에 살아가다보니 어쩌면 이 많은 이들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이 그리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정태호, 그 역시도 그 한 줄의 자막에 등장하길 간절히 원했기에 여기 함께 앉아 있는 것이니… 어쨌든 그는 협상을 시작하게 된다.
내용적으로 보면 자살하는 주제에, 아니 죽음을 사고 있는 주제에 복수까지 그 협상 내용에 포함시키다니 뭐 좀 놀랍기는 했다. 인과응보, 정의구현, 뭐 그런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작이자 마지막이 죽음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은 조금 아쉽게 다가온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뺑소니나 교통사고 가해자가 이런 복수심(!?)에 의해서도 결코 벌 받지 않는, 돈으로 그 죄에서 벗어난다는 설정을 더했다면 죽음을 사고파는 것도 결국에는 돈 때문이라는 사실이나 자살이 사회의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 소설로 이 사회를 향해 더 큰 엿을 날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물론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 뭐 그 정도라 말 할 수 있을 것이고, 전체적으로 전혀 문제 될 것은 없다는 사실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
읽다가보면 자연적으로 나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기보다는 그래도 이런 선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죽음을 원한다면!? 이라는 생각을 해본다면 결과적으로는 무척 무서운 상상이 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앞서 언급했듯이 자살이라는 것이 -설사 다른 이에게는 다른 모습의 죽음으로 보이도록 바뀐다 하더라도, 여기서는 결국 자살이니까- 이렇게 다양한 조건을 내걸고 협상을 할 수 있을 만큼 인정받을 수 있을만한 일인 것일까, 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저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제목부터 끌리게 만들고, 조금씩 읽어나가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상당한 몰입을 하게 만드는 소설의 힘은 훌륭하다고 느껴진다. 소설 속 주인공이나 소설 밖에서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나 모두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낯선 공간의 분위기를 함께 느끼고 함께 그 순간을 겪어나가는 기분이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내 머릿속을 읽는다는 듯이 장면의 순간순간에 가졌던 의문이나 생각들이 주인공을 통해서 혹은 그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통해서 조금씩 풀려나갔으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독자들까지 잘 끌어들이고, 나름의 사이다를 가미한 이야기 전개에, 마지막에 또다시 던지는 한 방까지,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풀어나간다. 또한 많은 대화를 주고받고 있음에도 전혀 어색한 투가 없다는 것이 더 훌륭하다고 느껴진다. 이야기 자체로, 그리고 그 뒤에 던져진 많은 생각들까지 모두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으로 다가올지 기대까지 더해지는 소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