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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뎁투스가 오고 있소, 용의 동반자, 용을 품은 껍질, 용이 내다보는 창호…….
(본문.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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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판타지』에 대한 설정의 향연
2.작품에 보이는 『키워드』 두 가지
3.『살루』는 왜 멈출 수 없었을까?
4.글을 마무리하며…
1.『판타지』에 대한 설정의 향연
개인적으로 ‘판타지’라는 장르를 접할 때, 그 비일상적인 설정들을 거둬내고 무엇이 보이느냐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부르는 ‘판타지’라는 장르는 그 설정들이 너무 많은 것을 덮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인물, 사건, 배경 등 작품 내에서 제공해야하는 최소한의 정보들만으로도 그 분량을 채워갈 수 있는 데에 비해, 이 장르 내에서는 작가가 창조해낸 각종 환상적인 설정들에 대한 정보들을 덧붙여야하는 노동에 이르기 때문이죠. 그 설정들을 이해할 수 없다면 불편한 동행을 지속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해할 수만 있다면 작은 모험을 떠나는 감상과 함께 그 인상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뎁투스>라는 작품은 사뭇 다른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걸맞게 작가가 창조해낸 설정과 언어들이 곳곳에 깔려 있지만, 구조적으로 그것들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그 설정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인물들이 그 설정에 맞춰 움직이도록 활용되는 것이 확연하다는 인상마저 줍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번 작품은 설정을 거둬내고 그 밑에 담긴 이야기를 파헤치기보다는, 그 설정 자체에 담긴 이야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곧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면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설정과 단어를 해석하면서 쫓게 만들 수 있는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개성으로 이해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작품에 보이는 『키워드』 두 가지
첫 번째 키워드는 ‘용(龍)’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대부분의 독자가 알다시피, 현재 ‘용(dragon)’은 그 이미지 소모가 무척 큰 소재 중 하나입니다. 다만 그것이 곧 이미지의 몰락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 소설을 마다하지 않고, ‘랩소디 오브 파이어(Rhapsody of fire)’ 같은 이탈리아 헤비메탈 밴드를 필두로 한 ‘용’을 다루는 음악들마저 유행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관습적으로 뿌리내린 ‘용’이라는 이미지야말로, 이들을 사랑하는 가장 큰 힘이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 작품에서 보이는 ‘용’은, 말 그대로 신에 가까운 무언가로 상징됩니다. ‘무언가’라는 모호한 표현을 쓴 것은 이 작품에서 마땅한 정보를 주기 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묘사하며 ‘느낌’ 그 자체를 표현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껍데기처럼 언어만 남은 묘사는 아닙니다. 분명 곳곳에 이 ‘용’에 대한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구절들이 남아 있습니다.
(P.22). “제물로 바치려고” “신 말고 용에게.”
(P.128) ‘우리의 용께서 이 부락을 보살폈기 때문이지.’
간간히 언급되는 구절만 봐도, 이 작품의 ‘용’은 여느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짐승의 이미지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경외를 받을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묘사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특정한 인간과 동지와 같은 계약을 맺고, 그에 준하는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로 등장합니다. 그렇게 인간과 계약을 맺고 용에 준하는 힘을 부리는 자들을, 작중에서는 ‘아뎁투스’라고 부릅니다.
(P.130) ‘없지만 자네도 보지 않았나. 맹인 사제를. 적국의 정신 나간 아뎁투스들을… 난 그들이 고향까지 올라오게 둘 순 없네.’
작중에서 엿보이는 구절을 해석하면, 현재 작중의 무대가 되는 세상은 ‘맹인 사제’라고 불리는 ‘아뎁투스’들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중의 ‘아뎁투스’가 용의 힘을 얻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세상은 곧 ‘용’의 힘으로 인해 멸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P.29) “아, 용이 무섭긴 하지.” 거지는 술을 들이켰다. “근데 그래봤자 뭐하나. 망해가는 세상을 돌려놓을 만큼 무섭진 못 하잖나.”
그렇기에 현시대에 ‘용’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냉소적입니다. 아니, 어쩌면 자조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폐허가 된 세상을 다소 건조하게 바라보며, 그의 주축이었던 용 또한 원망보다는 조롱이나 다름없는 말투로 입에 올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용’이라는 존재가 주는 무게감이 상당한 것이 정상일 텐데, 이런 시선이 만들어진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더 이상 사람이 머무를 자리가 없는 세상에서, ‘용’이라는 존재조차 그 자리가 사라졌다는 의미겠죠.
한 마디로, 작중의 ‘용’이란 몰락한 신이라는 인상으로 해석됩니다. 더 이상 존경을 줄 수도, 힘을 받을 수도 없는, 심지어 그 모습을 관찰하기 어려운 이야기 속의 존재로 격하된 셈입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회신자(灰燼者)’입니다.
‘회신자(灰燼者)’라는 언어를 그대로 읽어보면 ‘불에 타고 남은 자’라는 뜻 정도로 해석됩니다. ‘찌꺼기’라는 추레한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작중에서 보여주는 ‘회신자’라는 존재들은 인간으로서 기능하지 못 하는 ‘찌꺼기’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P.94) 그림자가 걷어지며 정체가 드러났다. 회신자였다. 육신은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강직한 전사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망가진 흔적이 없었다.
(P.255) 회신자는 생전의 인간처럼 행동했다. (중간생략) 그들은 과거에 갇혀 있었다. 도끼는 이 부락을 상징하는 무기이자 제사의 도구였다. 그러나 회신자의 도끼는 녹이 슬었다. 또는 이가 닳거나, 자루만 남았다. 그럼에도 그것을 손에서 놓는 일은 없었다.
(P.164) “회신자는 회신자야.” 살루의 눈이 허공을 관찰했다. 내면을 보는 눈빛이었다. “살아 있던 자를 따라 하는 괴물에 불과해.”
즉, 작중에서 적으로 등장하는 ‘회신자’는 누군가 죽으면서 남긴 부산물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성, 더 나아가 마땅한 본능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 있을 적에 본인이 머물렀던 자리를 배회하며, 눈에 띄는 것들을 전부 살육하는 것이 행동원리의 전부입니다. 작중에서 등장하는 ‘회신자’들이 아뎁투스들의 습격으로 죽은 전사들의 망령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자루만 남아 기능을 하지 못 하는 검을 놓지 못 하는 것만 봐도, 그들은 이미 전사의 의미를 잊은 것이 분명합니다.
(P.172) “이 용괴 같은 새끼야. 회신자 같은 새끼야! 불이라도 피우라고. 솥에다 넣고 끓이라고! 사람처럼 굴란 말이야! 세상 망했다고 짐승처럼 굴지 말라고!”
이 ‘회신자’라는 것은 상당히 원초적인 두려움으로 묘사됩니다. ‘회신자’가 예정된 사람에게는 특수한 낙인이 찍히며, 죽으면 그들처럼 과거에 사로잡혀 익숙한 곳을 떠돌기만 하는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공포에 시달립니다. 그렇기에 ‘사람처럼’이라는 말은 단순히 관용되는 표현이 아니라고 보입니다.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선. 그 바깥으로 물러난 이들을 ‘회신자’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셈입니다. 이런 ‘회신자’들을 현세에 남겨두는 것은 ‘카르마’라는 힘으로 비롯됩니다.
(P.49) “왜 갑자기 달려드나 했더니, 카르마도 얼마 안 남은 놈이었어. 몸도 모래 같아.”
작중에서 이 ‘카르마’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일단 업(業)을 뜻하는 ‘karama’를 말하는 듯하지만, 단순히 업으로 설명하기에는 작중에서 ‘카르마’는 더 기이한 힘의 근원처럼 묘사됩니다.
‘카르마’는 말 그대로 업보입니다. 자신이 생전에 이룬 과오를 짊어지고 간다는 인과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죠. 이 작품에서는 생전의 의지 자체가 ‘카르마’로 나타나는 셈입니다.
(P.237) “내가 얻어온 타인의 카르마는 대개 염원을 이루지 못 한 자들의 것이다. 세상에 자기 꿈을 못 달성하고 죽는 자가 뭐가 그리 많은지…”
(P.361) “이대로 죽으면 나의 회신자는 온 동네를 걷겠지. 카르마가 부족해지면 사람을 습격하고, 카르마를 빼앗겠지.”
제게는 무척 기이한 인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회신자는 생전의 모습을 본능처럼 따라하는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런 생전의 과오와 업적이 자신을 이 멸망한 세상에 묶어두는 듯한 인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는 걸까요? 남의 과오를 뺏어서라도 제 존재를 유지하겠다는 회신자의 욕구야말로, 이들을 멸망한 세상의 단편으로 보이게 만드는 장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3.『살루』는 왜 멈출 수 없었을까?
(P.205) “네 아비가 아뎁투스였다고 했지. 너희 부락에서 모시던 용과 계약을 맺고 전쟁터에 갔다고?”
(P.207) “일곱의 즈메이. 그 왕 지킴이들이 이 나라를, 아니 이 땅을 버린 지가 언젠데. 전쟁터에서 남겨진 병사들이 어떻게 됐겠나? 맹인 사제들이 자비를 베풀었을까?”
‘살루’라는 인물을 분석할 때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흔적입니다. 발췌한 구절에 따르면, 그녀의 아버지 또한 용의 힘을 얻고 전쟁터에 나간 ‘아뎁투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말로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이미 맹인 사제들에게 세상이 멸망당한 이때, 나라를 지키지 못 한 군인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죠.
(P.131) 어린아이의 눈에 두 사람은 멋져 보였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는 아뎁투스였다.
(P.132) 살루는 따라잡고 싶었다. 하지만 달려서 가는 건 안 멋지다고 생각했다. 의젓해 보이고 싶었기에, 살루는 그들의 걸음걸이를 따라했다.
언뜻 보면, 살루가 조감나무로 향하는 여정 자체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혹은 동경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아뎁투스가 되어 전사했던 아버지의 발자취를 쫓겠다는 이상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죠.
다만 작중에서 아뎁투스라는 존재들이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의 거대한 힘을 부리는 것을 떠올리면, 살루의 이 여정은 무척 개인적인 감정이라는 것이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도 아뎁투스의 말로는 처참할 뿐입니다. 나라 곳곳에는 회신자들이 들끓고 있고, 그것들이 곧 아뎁투스로 비롯된 상흔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살루’라는 인물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P.218) “기억이 점점 흐릿해져. 맹인 사제가 부수기 전에 고향 풍경이 어땠는지 잊었어. 나무가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무슨 꽃과 열매가 자랐는지, 늪에 구더기랑 파리, 가재 말고 뭐가 살았는지….”
그녀의 말로 역시 ‘회신자’로 예약되어 있습니다. 낙인은 그녀의 어깨를 좀먹고 있으며, 그녀 또한 기억도 이성도 없는 괴물로 남아 세상을 떠돌게 되리란 것을 예상할 수 있죠. 그렇기에 그녀는 조감나무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걷게 만드는 힘은 바로 ‘두려움’이기 때문이죠.
(P.328) “회신자가 되기 싫어… (중간생략) 걷고 싶지 않아… 그만 걷고 싶어…”
(P.361) “이대로 죽으면 나의 회신자는 온 동네를 걷겠지. 카르마가 부족해지면 사람을 습격하고, 카르마를 빼앗겠지.”
(P.418) 늪에 있을 땐 가재라도 삶지 않으면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모든 걸 잃었던 그녀에겐 솥에다 뭘 넣어 삶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사람다운 짓이었다.
‘걷고 싶지 않다’는 외침이 부정되는 것은, 그녀가 멈추는 것이 곧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해석입니다. ‘회신자’의 말로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는 그녀에게, 같은 말로가 예약되어 있다는 것은 크나큰 두려움으로 작용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괴물들입니다. 이미 흘러간 과거에 얽매여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하죠. 하지만 살루는 어떤가요? 그녀가 이성을 붙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 이성이 향하는 방향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동경, 가재를 삶는 무의미한 행위, 그리고 걸어야한다는 원초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이 ‘살루’라는 인물이 아버지의 흔적을 쫓는 모든 과정들은, 이 ‘회신자’라는 말로에 저항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4.글을 마무리하며…
언제부터 ‘소울 시리즈’ 게임의 스토리텔링이 고평가를 받았는지는 이견이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그 흐름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는 편입니다. 그것은 정보와 게임 두 가지를 철저히 분리해놓는 데서 기인하기 때문이죠. 게임 플레이가 곧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져야한다는 이상에 비춰보면, 이 게임 시리즈는 파편화된 정보들을 흩뿌려놓고 그것을 발견하는 과정을 스토리라고 착각하고 있는 탓도 있습니다.
혹자는 오히려 그런 방식을 게임과 정보를 섞는 매력적인 수단이라고 평가하나, 소울 시리즈에서 제공하는 스토리가 유저들의 상상과 추측으로 공백을 채워가는 것이 일상이 된 것만 봐도, 게임 자체가 완벽하다는 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소울 시리즈의 향수를 짙게 느낀 편입니다. 특히 신성한 힘을 가진 나무를 찾아간다거나, 늪에서 가재를 잡아먹는 거지 이야기는 ‘엘든 링’의 오마주로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회신자’를 ‘망자’로, ‘카르마’를 ‘소울’로 치환하면, 이성을 잃은 좀비(?)들이 소울을 갈취하는 것이 주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울 시리즈와 거의 일치한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마지막에 다소 예고 없이 등장한 ‘맹인 사제’와의 전투도, 소울 시리즈에서 보스전에 입장하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였으니, 어쩌면 작가님의 세계관에 대한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된 셈입니다.
사실 저는 이 작품을 ‘소울 시리즈’처럼 읽었습니다. 단순히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치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정보들을, 마치 ‘소울 시리즈’에서 아이템을 발견하고 정보를 분석하는 듯한 과정처럼 받아들였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 작품은 마치 독자들이 모든 정보들을 알고 있다는 전제를 두고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앞선 키워드들도 작중에 나온 정보들을 이리저리 분석하며 나온 해석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하면, 작중에 나온 정보들이 부족한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정보를 도출하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힘이 소모되는가를 따지면, 다소 독자를 지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감상을 받은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용괴’가 정확히 무엇인지, 왜 맹인 사제가 나타나 싸움을 시작하는지, 왜 맹인 사제들이 나라를 멸망시켰는지 등 막연히 느낌만으로 파악할 뿐 그것이 정답이라고 여기기는 힘든 요소도 더러 있었습니다.
서두에서 저는 판타지를 읽을 때, 그 설정을 덜어내고 무엇이 보이는가에 집중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살루의 서사는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이 주인공에게 씌워놓은 설정들이 다소 무겁다는 인상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정보를 배제하고 플레이 자체에 몰입할 수 있는 게임에 비해, 소설은 정보를 배제하고서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아주 만약에라도, 여느 독자들이 이 설정들에 길을 잃고 헤맨다면 과연 ‘조감나무’라는 목적지로 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겁지 않을까…… 하고 작게 염려를 구겨두는 바입니다.
인상적인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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