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 허나 아쉬운 답변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플래시백 (작가: 반신, 작품정보)
리뷰어: 이유이, 23년 5월, 조회 41

이 소설 <플래시백>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하나였다. 소개글이 매혹적이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기억은 어떻게 사람을 되찾아 오는’이라는 2가지 문장을 보고 무려 6가지 궁금증이 들었다.

첫째, 소설에서는 ‘죽음’을 무엇으로 정의할까.
둘째, 죽음과 기억은 관련되어 있는걸까.
셋째,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기억이란 돌고 도는 걸까, 혹은 ‘윤회’에 관한 이야기일까.
넷째, 죽음과 기억, ‘돌고 도는 사이클’을 겪는 주인공은 어떠한 사람일까.
다섯째,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고,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끝날까.
여섯째, 주인공은 결말에서 ‘죽음’에 대해서 깨닫게 될까.

궁금하게 하는 소설은 좋다. 그 만큼 ‘깊이 있는 질문’을 설정했다는 것이고, 그 주제 속으로 한껏 뛰어들 마음의 준비가 된 작가라는 의미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감상은 작가에게 쓰디쓴 비평이 될 수 있다. 허나, 리뷰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당신이 작품을 쓰기에 앞서서 떠올린, 작품 소개글로 올렸을 만큼 작품 전체를 꿰뚫는 ‘질문’이라고 생각한 저 두 줄에 흥미를 느낀 자로서 ‘왜’ 나는 소설 본문에서 만족하지 못했는가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서두의 문장은 좋았다.

– 나는 어머니만 둘이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 하나에 어머니 셋. 생물학적 부모까지 합해서. 여자 둘이서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까.

생물학적 부모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고아지만 성소수자 커플과 함께 행복했던 ‘한때’가 있다는 시작점은 흥미로웠다. 허나, 너무도 ‘설명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첫문장 이후로 모든 문장들이 ‘나’의 일생과 ‘나’와 함께했던 여성 커플에 대한 설명만으로 이뤄져서다.

고아라는 나의 상황, 소연과 은혜 커플의 과거 서사, 커플이 운영하는 카페에 대한 설명, 내가 머물렀던 아동복지시설, 나를 대하는 소연과 은혜의 태도에 대한 설명까지 서두부터 5문단까지 모조리 다 ‘설명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까 ‘나’라는 사람의 일대기를 다루려고 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죽음’과 ‘기억’과 ‘플래시백’은 나란 사람의 일대기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 걸지 쫓아갈 만한 ‘동앗줄’을 내려주고 쭉쭉 써내려가면 좋았을 거 같은데 내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정보들이 주루룩 나열되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설정 자체는 흥미롭다. 문장이 담담하게 안정되어 있고, 잘 읽히는 편이어서 결말까지 읽을 수 있었지만 ‘알맹이’가 다소 비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부모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나를 거둬키운 레즈 커플과 그들이 운영하는 카페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런데 이 장면을 이러한 ‘설명’의 형태 말고 에피소드로 풀거나 ‘장면화’하거나 ‘사건’을 만들 수 없었을까. 아쉬운 마음에 조금 더 흥미로운, 핵심을 꿰뚫는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면서 읽었다.

입학식 이후로 전개되는 초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3학년 담임이 중요한 인물로 나오다가 내가 영재교육을 받는 루트로 전개되더니 느닷없이 ‘테러’가 발생한다. ‘테러’가 발생하기 이전에 평화로웠던 시절을 보여주고 싶어서 마련된 장면들이었다고 한다면 더욱 아쉽다. 차라리 도입부에 ‘테러사건’을 보여주고 난 뒤에 플래시백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의문스러웠다. 만약 이 앞의 나열된 설명과 장면들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면 궁금하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작가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어쨋거나 사건은 벌어졌고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간략하게만 서술한다) 나는 따스했던 손길을 잃은 채로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간다. 아내를 만났고 일자리를 찾아 평화로운 삶을 사는데 또 이상한 사람이 한 명 더 출현하지만, 나의 인생에 그리 큰 변화를 주진 못한다. 그렇게 소설이 끝나고 나서 나는 마지막 문단에 잠시간 머물렀다. 한번 더 마지막 문단을 읽었고, 다시 올라가서 내가 읽었던 내용들을 되짚어봤다.

아- 나는, 이 소설의 소개글을 읽으며 기대했던 6가지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 실마리조차 없었다.

첫째, 소설에서는 죽음을 다루고 있으나 짧은 에피소드로만 보여줄 뿐이다.
둘째, 죽음과 기억의 관련성은 보이지 않는다.
셋째, 사람이 죽고 난 뒤의 기억이나 윤회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넷째, 다 읽었는데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가 한 행동은 있는데 어떠한 캐릭터인지 들어날 만한 장면은 없다.
다섯째, 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시작도, 결말도 어떠한 장면을 다루고 있지 않다.
여섯째, 죽음이 그저 ‘소재’나 ‘에피소드’, 단편적인 ‘사건’으로 사용되었기에 주인공이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소설 <아몬드>를 떠올렸다.

그 소설 역시 주인공을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까지의 시간대를 다루고 있다. 물론 길이가 조금 더 길긴 하지만. 남들보다 감정적인 이해가 느린 주인공이 크나큰 테러 사건을 겪고,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온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르지만… 따스한 손길이 있었고 그 손길이 사라진 순간을 겪는다는 ‘사건’의 지점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리뷰를 쓰기 조심스러운 글이었다. 쓰지 않을까 그냥 읽고 넘어갈까 하다가 한자씩 정성들여 섰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이기에 이런 글을 작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허나,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좋은 지점을 잡았고, 흥미로운 설정을 채택했으나, 그것이 독자인 나에게 ‘반짝이는 찰나’를 주는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물론, 이건 나에게만 해당될 수 있고 누군가에겐 전달됐을 수 있다)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애정을 담아 쓴 리뷰다. 이 글을 쓰는 데 무수한 시간과 고민의 밤을 보냈을 거란 걸 알고 있기에 리뷰라는 ‘창’을 통하여 짧게나마 소통하고 싶었다.

이목을 끄는 ‘고민점’을 갖고 글을 시작할 줄 아는 사람은 그 본인이 갖고 있는 사유도 깊다고 생각한다. 다음 소설을 기대해본다. 또한, 문장이 차분한 만큼 가독성이 좋은 소설이니 “뭘 이렇게 길게 주절주절 썼나, 내가 한번 읽어보겠다”라는 생각이 이 리뷰를 보고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한번 스르륵 읽어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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