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날아가는 화살촉으로 끝나선 안된다. 공모(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귀납(歸納) (작가: 권선율, 작품정보)
리뷰어: 샘물, 23년 3월, 조회 24

혹자는 말한다, 어떤 일을 성공하고 싶다면 무언가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시험 성적을 좋게 받고 싶다면 노는 시간을 줄이고 공부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고, 연애를 하고 싶다면 자신만의 시간을 줄이고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한다. 슬프게도 이 논리는 역이 통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포기했다고 어떤 일을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자는 시간을 줄여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쏟아도 되려 성적이 떨어질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음에도 제대로 된 연애를 시도도 못한 사람이 있다.

인간이라는 찰흙은 어떻게 결심하냐에 따라 자신의 형태를 바꿀 수 있고, 그것을 정교하게 만지면 도자기같은 것도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타인이나 자신이 만족하는 형태, 색채, 무게, 강도를 가질 수 있냐는 별개인 것이다. 마치 이 이야기 속 ‘나’와 같다. 석박사 과정을 합해 총 6년을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마땅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신의 생활과 젊음을 반지하 연구실에서 제대로 된 인간적 교류도 거의 메마른 채 살아가는 목숨. 그런 ‘평균적으로’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도 주변인 누구도 그것에 의문을 표하지 않고(마치 지각했던 나를 대하는 어머니처럼) 각자의 삶만 따라간다. ‘나’라는 ‘대학원생’은 이미 ‘그런 사람’으로 가공이 끝난 것이니까. 어쩌면 ‘나’는 아직 굳지 않은 찰흙일지 모르는데, 그저 어떤 도자기와 비슷한 시간을 보낼 뿐인데도 스스로와 주변인 모두가 나를 도자기로 간주하는 것이다.

연구에 모든 시간을 쏟아붓는 ‘나’처럼, 사람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깎아내며 현재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들을 종합하면 그 너머에 있을 행복, 만족감(여기엔 외압으로 인해 강제된 목표를 해결하는 것도 포함된다)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금융시스템의 이자처럼, 즐거운 것을 희생해 일에 몰두하는 건 현재의 불편함, 불만족이라는 인내를 통해 행복의 원금과 추가적인 보상을 통한 만족감을 얻는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라 꿈이 불분명한 형체를 가질수록 더욱 유지하기 힘들다. 정확하게는, 이상을 좇아 자신을 쌓아가도 현실적인 문제들과 부딪치다 보면 마치 도중에 목적지를 잃어버린 내비게이션처럼 그저 이전까지 자신이 떠올렸던 애매모호한 경계만을 떠올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심화되면 도착지에 있을 보상은 사라지고 그 과정에 불과했을 고통, 불편함을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한다. 이야기 속의 ‘나’가 그렇다. 연구실적을 쌓기 위해 자신의 시간은 내던진 채 진전이 더딘 연구에 시간을 쏟고, 후배의 죽음에 의문을 표하고 슬픔을 갖지 않는다. 바깥의 날씨는 뉴스에서도 언급하는 폭우라고 하지만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알더라도 놀라지 않는다. 이미 ‘나’는 연구를 마친다는, 목적지(바깥)에서 얻을 기쁨은 안중에 없고 현재(안)만을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외부에서 매일 던져지는 스트레스를 당연시하지만 자신의 감정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영역에 당도한 것이다.

 

이것이 과연 소설 속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과장이 섞여있는, 현실같은 비현실을 작가가 꾸며낸 것에 불과할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연구실에 갇혀, 각자의 교수에게 조여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면 각자의 후배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당해도 궁금증이 말라버린 세상에서 각자 살아가고 있다. 현대는 이미 충분히 효율적인 세상이 되었으니까, 아니 효율적이지 않으면 잘못됐다고 손가락질받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옛날부터 도구와 환경은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그런 비효율이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던 건 ‘어쩔 수 없으니까’라고 서로가 납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백 명에게 보내야 할 편지를 작성하고, 모두 곱게 접어 편지봉투를 접어야 하잖아?
저 넓은 논밭에 모종을 심는데도 혼자 하려면 반나절이 걸리잖아?
먼 고향땅에 이렇게 무거운 소포를 보내려면 우마가 끄는 짐수레에만 의존해야 하잖아?
어쩔 수 없지. 맞아,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현대는 어떠한가? 누구나 비효율적인 자유는 있다. 하지만 당신의 직장 선임이, 그 윗선이, 당신의 원고를 기다리는 편집자와 그 밑에 윤문 작업자가, 자재를 기다리는 공사반장과 그 밑에 고용된 기술자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나는 사회에 섞여있는 한 안타깝게 혼자가 아니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비효율적으로 살고싶다면 그 이어짐을 끊어야 한다. 비효율을 원하는 타인에게 자발적인 단절을 협박으로 삼다니, 세상은 너무나 무서워졌다. 조선시대에서 ‘팽형’은 극형벌에 대한 퍼포먼스에 불과했고, 실상은 그 자를 ‘죽은 자’로 낙인을 찍어 주변 마을과 주민들로부터 그를 없애버리는 처벌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혼자 편하게 살고 싶다면 사회적으로 죽어라’라고 말하는 사회에 살고있는 셈이다.

현대인의 ‘비효율적으로 남겠다’는 선택지는 이미 타인에게 압수당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효율성을 위해 타인이 비효율적일 자유를 빼앗았다. 남은 것은 스스로 자신의 군더더기를 떨쳐내는 것이다. 나이에 맞춰, 성별에 맞춰, 직급에 맞춰 그 작은 틀을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을 도려낸다. 거리를 걷다 생전 처음보는 사람이 아파보이면 기꺼이 도움을 주는 것, 날씨가 좋은 날에 꽃이 흐드러지게 핀 거리를 거닐기 위해 오늘의 급한 업무를 미루는 것, 힘들어하는 타인을 위해 하루를 써버리는 것… 비생산적으로 시간을 많이 써야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의 삶에서 쳐냈다. 그것을 위한 감정도 떨쳐냈다. 무엇이건 할 수 있었을 한 사람은 그렇게 몇 가지 일에만 특화된 공구가 되었다. 기껏 노력해도 스위스 맥가이버 칼 정도가 그만일까.

 

화살의 목적은 힘을 받아 정상적으로 허공을 가로질러 적의 신체를 꿰뚫는 것에 있다. 그것을 달성하면 화살 하나의 존재가치는 증명되며, 목적을 완수한 것이 된다. 살아가는 인간의 목적은 무엇인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과 또다른 당신의 목표는 서로 같은가? 눈앞에 무수히 갈라지는 분기들을 외면하고 목표를 완수하는 것만이 가장 가치가 큰 것인가? 감히 필자의 좁은 식견으로 말하건데, 우리에겐 분명 화살보다는 지금을 돌아볼 여유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이름이 화살과 같지 않은 것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달려나가는 건 주변을 둘러본 뒤 방향을 정한 뒤에도 늦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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