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물의 가죽을 쓴 사람물. 감상

대상작품: 아파트 (작가: 김설단, 작품정보)
리뷰어: Mast, 11월 17일, 조회 18

저는 좀비가 소재로 등장하는 창작물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살이 썩어 문드러진 시체 괴물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건 아닙니다. 

좀비의 등장으로 급속도로 무너지는 문명사회와 이러한 사회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벌이는 생존 과정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아파트의 배경 설정은 제 입맛에 아주 착 달라붙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말해 취향 저격을 당한 셈이죠.

여고생인 주인공과 그녀의 가족들은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이미 완전한 요새화가 이루어져 외부의 접촉을 결연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정문을 지키는 노란색 철제 바리케이드와 화단을 따라 둘러쳐진 날카로운 철조망.

결사항전. 

단단한 요새로 변모한 콘크리트 아파트에서는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전쟁을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좀비 웨이브도 능히 견뎌 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들이 맞서는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좀비가 아닙니다. 

그들의 적은 할인분양 입주자.

정가를 내고 입주한 자신들과는 다르게 땡처리 가격으로 입주계약을 맺은 증오스러운 후기 입주자들인 것입니다.

김설단 작가님의 소설 ‘아파트’는 재미있게도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추측을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2013년도 경기도 파주시. 

어느 신축 아파트 단지의 미분양 가구에 대한 30% 파격 할인이 원인으로 벌어진 아파트 요새화 사건. 당시 해당 사건을 뉴스로 접했던 저는 여러모로 경악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민들과 어떠한 협의도 없이 분양가를 대폭 삭감하여 판매에 나선 건설사와 담벼락에 철조망을 치고 24시간 불침번을 서는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할인 분양자의 입주를 막아서는 주민들의 대치를 보면서 어쩐지 답답하면서도 암담한 기분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채널을 돌려 예능 프로의 재방송이나 영화를 찾아보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낄낄거리며 즐거워했더랬죠.

그렇게 제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스쳐 흘려보낸 사건을 두고 김설단 작가님은 아무래도 저와는 다른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이처럼 완성된 요새 아파트의 바깥에서 좀비 감염사태가 터지면 어떻게 될까?’ 와 같은 아이디어의 씨앗이 작가님의 머릿속에선 빠르게 발화하여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 것이 아닐까요? 

아파트값을 지키기 위해 둘렀던 방벽이 말 그대로(전혀 본의는 아니었으나)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안전한 방어선이 되어준다는 발상은 별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바로 떠올리기에 쉽지 않은 것입니다. 당장 저부터도 이런 생각도 가능했구나! 하고 뒤통수가 얼얼했으니깐요.

요새화한 아파트 내의 12가구.

홀로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는 영리하고 꼬마 민용이네가 살고 있는 1503호

형설여중에 다니는 효민이네가 살고 있는 1501호

노부부가 살고 있는 1204호

군대를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과 엄마가 살고 있는 1101호

같은 형설고에 다니는 남학생 진관이네가 사는 802호

주인공과 같은 반인 선희네 가족이 살고 있는 703호

할인분양 대책 위원회 대표이자 법무사인 구봉식네 603호

여자 혼자가 살고 있는 501호

군인인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새댁과 아기가 함께 살고 있는 401호

소설의 주인공인 은미와 그녀의 가족들의 203호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103호 아저씨(주인공은 초반에 그가 전과자라 지레짐작합니다만 그의 정체는 그것과는 180도로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안전한 아파트 단지로 진입해 들어온 39사단 1개 중대 병력까지.

좀비는 이 소설에서 크게는 조명되지는 않습니다.

그 존재가 주인공의 눈앞에서 명확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일절 없습니다. 좀비는 주민과 군인들이 아파트라는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두는 동시에 극의 긴장감을 유지시키고 비극성을 강화시키는 장치로써 존재감을 발휘할 뿐 적극적으로 아파트를 공격하고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감염시키거나 하는 사태는 벌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작중 좀비가 정말 좀비가 맞는 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일절 움직이지 않습니다. 괴물은 인간을 먹이로 삼아 사냥을 합니다만 사냥한 인간을 한 번에 모두 먹어치우지 않고 손질하여 다리에 걸어 말리는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추정입니다만 그들은 휘발유의 냄새를 귀신같이 알아 맡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무장한 군인들을 뒤쫓아 그들이 탄 트럭을 습격해 일망타진하는 수준의 전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염경로는 아마도 타액이나 체액 감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음, 사실 이 괴물의 정체는 좀비가 아니라 ‘나는 전설이다’에서나 나올 법한 뱀파이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떠올려봤습니다만 이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작가님도 좀비의 활약에 대해선 크게 무게를 두지 않으셨으니깐요. 소설에서 주(主)는 좀비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작가님은 전개상 굳이 좀비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조차 없으리라고 판단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작가님이 판단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떼거지로 몰려드는 좀비의 무리를 향해서 소총을 난사하고 소방 도끼를 휘두르는 액션 넘치는 장면이 없어도 이 소설의 몰입감은 굉장하거든요. 가독성 높고 읽기 쉬운 문체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또한 든든하게 문장을 받쳐줍니다. 

그런데 이런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요?

저는 이 소설의 결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는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들이, 특정 인물들의 비극성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급전개라고 생각되는 흐름이 싫었어요.

관객들에게는 아직 극을 즐길 여유가 충분하게 남아있음에도 돌연 커튼이 내려지고 어라? 하고 당황을 하는 사이에 분장을 지운 배우들이 인사를 하러 무대에 올라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애정이 깊었던 문장인만큼 아쉬움이 컸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이라면 소설이 21화가 아닌 20화의 중후반 어딘가에서 결말을 끊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후반부의 전개가 다소 비극으로 치달았던 만큼 그 끝을 소소하게나마 희망적으로 그려 넣어 마무리 짓는 걸 좋아하거든요, 저는.

김설단 작가님의 아파트.

정말로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읽어보지 않은 분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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