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밖으로 날아가는 사람 의뢰(비평)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밤의 끝 (작가: 해도연, 작품정보)
리뷰어: 일월명, 6월 21일, 조회 37

별자리를 읽는 사람이 보는 하늘은 2차원이고 별을 찾는 사람이 보는 하늘은 3차원이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타르코스의 이론 사이를 오가며 발전한 천문학은 현대에 이르러 지구 대기권 밖 무한대의 공간으로 인간이 지각 가능한 영역을 밝혀 나가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단단한 땅에 발붙인 채 먹고 자고 살아가는 존재인 한, 반짝이는 신화로 수 놓인 검은 천장으로서의 밤하늘은 인류의 의식 한쪽을 여전히 지탱한다.

어쩌면 태양 주변을 벗어나 항성계과 항성계 사이 수십 광년의 공간을 날아다니는 미래에 다다라서도 우리는 이 두 우주관 사이에 끼여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맬지 모른다. 그 고뇌를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는 당연 SF이리라. 이 작품처럼 말이다.

 

 

지옥 혹은 미궁

 

우리은하의 중력장을 이용한 초광속 이동기술이 발명된 미래. 인류는 최초로 태양계 외부 항성 유인 탐사를 시도한다. 그러나 새 시대의 문을 열어야 했던 실험은 중력 엔진 폭주로 실패한다. 폭발의 여파에 밀려 지구는 태양계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지상은 생명이라고는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한다. 자신의 위치조차 파악 불가능한 광활한 우주 어딘가 던져진 얼어붙은 행성 표면에서,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유인 우주선 탑승자들이 찾을 수 있는 빛이라고는 엿새 간의 암흑 끝에 아주 잠시 반짝이는 먼 거리의 별들과 18일 주기로 돌아와 그들의 실패를 거듭 상기하는 비콘 한 대 뿐이다.

도시의 설립자들이 공유했을 통제를 벗어난 기술에 대한 트라우마는 곧 실낙원에 대한 원죄로 재해석되어 대를 이어 전해진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구세계를 파괴한 충격에 따른 상실감과 생존에 대한 부채감이 사람들에게 집단적 죄의식을 부여했으며, 이를 종교적 승화로 해결하고자 했으리라는 것은 짐짓 타당하다. 분화구 깊숙이 위치한 지열발전소부터 지표면까지 켜켜이 쌓인 100개의 층이 상기하는 『신곡』 속 지옥의 이미지는 자연스레 거주민들을 무기형을 살아야 하는 죄수로 정의한다.

이러한 도시에서, 시아의 비행은 그가 선조의 잘못을 답습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알아요. 바깥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 욕망은 우리, 특히 당신의 본능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거. 그래서 유혹을 견디기도 힘들다는 거. ”

 

교사의 힐난처럼 시아의 비행은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할 수 있을 법한 일이면 그게 무엇이든 일단 해보고 보는 인간의 원초적인 호기심에 기반한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호기심은 인간이 한계에 도전하고 고난을 극복하게끔 하는 원동력이지만 기성의 금기를 침범하는 경우 사회 규범 혼란이나 개인의 자멸과 같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양면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창세기서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유 역시 선악과에 대한 호기심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기독교 논리에 따라 구성된 도시 안에서 시아의 기질은 부정적 특질이 두드러지는 계도 대상이다. 교사와 장로회는 공동체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죄의 경중은 달라지되 도시 바깥으로 탈옥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시아의 호기심을 통제하려 시도한다.

허나 그들의 명령은 시아의 신분이나 행동을 통제하되 그의 생각을 억압하지는 못하는데, 시아가 인식하는 도시의 구조가 이들과는 상이하기 때문이다.

항성간 우주선 수석 엔지니어이자 지열발전소 설립자였던 이의 후손인 시아는 도서관에 숨겨진 지식을 팔아 도시의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올라온 인물로 묘사된다. 자력으로 손쉽게 극복 가능한 도시 내 계층은 그에겐 의미가 없다. 시아에게 있어 도시라는 공간은 밤하늘과 평행을 이루는 평면적인 미궁이다.

시아에게 있어 자신을 향한 교사의 협박과 회유는 디달로스가 크레타서 자신이 세운 라비린토스를 탈출할 때 아들에게 언질한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지 말라”는 경고와 같은 성격을 띤다. 감당하지 못할 재능이 불러온 나비효과 탓에 평생 갖은 수모를 겪은 디달로스가 아들의 미래를 염려하듯, 기술의 폭주를 목도한 선각자들 역시 그들의 후손이 자신들과 같은 실패를 겪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이 염려를 거스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시아는 다른 그리스적 영웅과 마찬가지로 부모로 대표되는 기성의 권위에 불복하는 저항하는 인간이다. 시아가 비행을 위해 만든 날개 형태의 기계는 그가 이카로스와 동일한 캐릭터임을 드러낸다.

지옥과 미궁. 나가선 안되는 곳과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곳. 도시는 두 가지 상징을 띈다. 둘 중 어느 맥락으로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비행이 지니는 의미 역시 달라진다. 위정자들과 시아의 이 견해차는 소설의 외적 갈등을 유발하고 서사의 무대를 입체적인 공간으로 구성한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도시와 비행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와는 별개로, 두 신화는 모두 비극적 결말을 예견한다. 어두운 밤하늘은 도시와 수직으로 위치한다. 시아가 스스로 하와가 아닌 이카로스로 정체화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비상 후엔 추락이 뒤따르는 것이 진리인 신화적 우주에서는 자신 앞에 놓은 실패(혹은 죽음)을 극복할 방도가 없다.

만일 시아가 이러한 사실까지도 수용하고 날아오르는 이야기였다면, 이 소설은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의 운명이 지니는 비장미를 이야기하는 판타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아가 털어놓은 말 한마디로 작품의 메세지는 완전히 달라진다.

 

 

동굴과 수갑. 날개와 별

 

“난 그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모르겠어.”

 

머리 위로 높이 뜬 비콘 ‘이카로스의 별’을 올려다보며 도시의 역사를 들려주는 한나에게 시아는 의구심을 드러낸다. 이는 앞서 짚었던 문화 간 충돌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통속적인 믿음을 불신하는 것은 곧 현재의 지식이 참이 아니며, 가시 세계 또한 어떠한 신화를 증명하는 증거가 아닐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선언이다. 시아의 이런 혁신적인 사고는 그가 도시가 단정하는 역사와는 별개로 증조모 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하늘과 땅’이 아닌 ‘우주와 지구’의 형태로 존재했던 세계에 대한 기억을 지녔기에 가능하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억과 현실 간의 괴리를 인식하는 순간, 여지껏 본능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졌던 비행에 대한 시아의 갈망은 지적 탐구심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도시와 밤하늘 역시 더는 수직적이지 않다. 우주는 위와 아래도 방위도 없는 수평적 공간이며, 시아가 벗어나야 할 것은 자신이 발붙이고 선 행성의 중력뿐이다. 도시와 우주의 접점인 관측소 유리창 너머 별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는 시아의 모습은 어두운 동굴 입구에서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시아는 그다지 문제를 겪지 않는다. 그는 이미 자력으로 날개를 만들 수 있고, ‘이카로스의 별’이 비행에 적절한 때를 알려주며, 조력자인 한나는 그가 마지막 계단을 무사히 오를 수 있게끔 추락한 착륙선의 위치를 알려준다.

정작 시아의 사지를 붙드는 건 인간적인 감정이다. 관측실서 교사가 난입해 한나의 손목에 쇠고랑을 채우는 장면은 다시금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동굴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그 속에 죄수로 갇힌 이들만은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시아는 아무도 도시 밖으로 데려갈 수 없다. 자신조차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설령 우주에 도달하더라도 그곳에서 본 것을 도시의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없다. 도시로 돌아올 거냐는 한나의 질문에 시아가 답하지 못한 건 이 때문이다. 비행은 시아가 현상계를 벗어날 유일한 방도인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를 타인과 분리시킨다. 한나를 인질 삼아 날개에서 내려오길 종용하는 교사의 협박은 칼날 위 같은 두 세계의 경계에 선 시아의 의지를 시험한다.

결국 한나와 고별한 시아는 이카로스의 별을 보며 날아오른다. 착륙선에 도착한 그에게 인공지능 앤은 디달로스 제로 승무원들이 항성 간 비행에 성공해 태양계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항성계에 불시착했으며 도시 사람들이 지구라 믿었던 곳은 그 항성계의 행성이라는 걸 알려준다.

 

(…)승무원들은 엔진이 다시 폭주하며 증발하기 직전에 착륙선을 타고 행성 표면에 내렸어요. 드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어딨는지 모르고서는 지구에서 구조가 올 수도 없었고 모두 절망했죠.」

 

앤이 증언하는 디달로스 제로 승무원들의 절망감은 도시를 떠나온 시아가 느끼는 고독과 동일하다. 자신의 생각보다 더 무거운 진실 앞에서 도시로 도로 도망쳐 들어가는 대신 지구에 구조신호를 보내는 시아의 결정은 이전 세대의 과오를 바로잡고 도시가 잊었던 세계의 형태를 회복하려는 첫걸음이다. 행성 궤도에 올라 도시를 덮은 영원한 밤 반대편의 영원한 낮의 영역을 보며 기약 없는 잠에 드는 모습은 그가 작중 꾸준히 보여준 굳센 행보에 방점을 찍는다.

 

 

안과 밖을 잇는 사람. 낙관적 SF의 맛

 

신화적 우주에서 수학적 우주로의 전복. 강인한 철인이 어둠 속 허상을 헤치고 동굴 밖으로 나가 빛을 마주하는 이야기. 이렇게 시아 개인의 서사는 한 번 완성된다.

그러나 시아가 보낸 신호를 포착한 지구가 곧바로 답신하며 소설의 반전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믿기 힘드시겠죠. 30년 전부터 초광속 통신과 항성간공간 원격탐사가 가능해졌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은하 곳곳을 뒤지며 계속해서 디달로스 제로의 비콘 신호를 찾고 있었습니다.」

(…)

디달로스 제로의 아프지만 위대한 실패와 희생을 딛고 우리는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시아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지구인은 계속 말했다.

「36시간 뒷면 우리 구조선이 그곳에 도착할 겁니다. 우리는 디달로스 제로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세상에,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군요.」

 

한낮의 아타카마 사막에서 보내온 디달로스 제로를 향한 헌사와 구조 약속은 시아 개인에게 무한히 넓고 길게만 여겨지던 우주의 시공간을 극복 가능한 것으로 바꾼다. 지구서 중력장을 통해 보내온 신호는 도시에서 우주를 향해 일직선으로 이어지던 시아의 행보와 유일하게 쌍방을 이루어, 접점을 맺는다.

양측이 소통에 성공함으로써 작중 내내 반복되던 단절의 문제는 마침내 해결된다. 가장 고독한 순간에 놓인 사람에게 우리가 만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말을 건넬 수 있는 우주라면, 자신에게 모든 걸 걸어 준 소중한 이를 기꺼이 데려갈 만하다.

 

 

마치며

 

글을 읽으며 두 가지가 못내 아쉬웠다. 하나는 시아를 가로막는 위정자들의 입장이 너무 평면적으로 묘사되었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사실상 시아 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어야 하는, 도시에 남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한나와 시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게 느껴졌다는 거다. 이 단점들은 작품이 철저하게 시아가 현재 겪는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발생했다 사려한다. 시아 정도로 견고한 캐릭터를 지닌 주인공이라면, 그의 안타고니스트나 주변인들 역시 보다 입체적인 인물이면 좋았으리라는 바람이다.

그럼에도 깔끔하고 흡입력 있는 서사, 그 서사를 통해 작품이 전하는 메세지는 매력적이다. 우주가 영원히 공허하지는 않으리라는 예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신의, 익숙한 두려움을 이길 수만 있다면 우리는 낯선 세계 사이에 놓이더라도 올바른 답을 찾아 서로를 향해 나아갈 거라는 확신. 이거야말로 SF 장르를 즐기는 이들이 바라마지않는 낙관주의적 전망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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