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이해와 용서의 경계 감상

대상작품: 감옥, 여자 (작가: 이우연, 작품정보)
리뷰어: cedrus, 5월 25일, 조회 71

* 작품을 이해하려는 개인적인 시도가 담긴 글입니다. 모든 부분이 스포일러일 수 있습니다. 일독의 충격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면 작품을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것은 실패의 기록이다.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고, 알을 생으로 길러내는 데 실패하며, 경계를 벗어나 온전히 속하는 데 실패한다.

아무도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는 목 매달려 죽었을 것이다. 한 팔로 공중에 매달려 백조처럼 부유하는 서커스의 아름다운 배우들처럼 어머니는 이 층 높이의 건물 아래 구멍에 희고 부드러운 발을 언뜻 내비치며 사라져갔을 것이다.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 여자가 아는 것은 살아있는 어머니뿐이다. 그래서 여자의 상상 속에는 어머니의 죽음이 여러 버전으로 존재한다. 어머니는 모든 죽음이다. 죽음이 하나로 특정되지 않아 여자는 모든 죽음, 모든 죽어있는 것에서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의 죽음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여자에게 알을 낳는 법, 울지 않고 우는 법을 가르친 어머니는 여자가 알지 못하게 죽었다. 여자가 본 것은 살아있는 어머니뿐이므로, 죽음 이후의 어머니는 여자가 알지 못하는 존재다.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죽은 어머니는 여자의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여자는 어머니의 시체를 거울 속에 안치했다. 여자는 거울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만, 거울 속의 어머니는 진짜 어머니가 아니다. 여자가 아는 어머니는 살아있는 어머니이며, 거울에 비치는 것은 어머니의 모습을 한 여자이다. 어머니의 사라짐 이후 홀로 남겨진 여자이다.

 

여자는 그녀를 위해 조개의 젖은 입속에서 썩어가는 우윳빛의 진주처럼 아름답고 징그러운 알들을 낳았다. 창가에, 거미줄에, 천장 구석자리에, 식판 위에, 변기 안에, 잠든 여자들의 입속에, 아이들은 미세한 먼지로 위장하였고 꾸역꾸역 태어났다.

여자는 감옥과 ‘깊이 연루’되기 위해, 감옥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감옥에 속하기 위해 집요하게 알을 낳는다. 알 낳음은 감옥에 속하고자 하는 여자의 무수한 시도이다. 여자가 낳은 알을 수인이 죽일 때, 알과 벌레는 감옥의 환경이 된다. 여자는 감옥에 드글대고 매일같이 수인들의 손에 죽어가는 벌레들의 어머니이다. 그렇게 여자는 감옥의 환경을 만든다. 영웅들의 이야기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괴물들처럼, 감옥에 속하고자 한다.

어머니는 알을 낳는 방법만을 가르쳤다. 길러내고 살게 하고 죽이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여자가 낳은 알들은 ‘가장 더러운 것’, ‘불결함’이다. 그래서 수인들이 그것들을 찢고 터뜨리고 밟아 죽여도 말리지 못한다. 아이들의 죽음은 여자의 죽음이었는데도, 여자는 죽음을 막지 않는다. 막지 못한다.

아이들의 죽음은 여자의 죽음, 아이들의 생은 여자의 생이었다. 여자는 스스로의 생을 돕지 못했다. 삶을 이어가도록 돕는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여자는 죽었고, 다시 살았다.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모든 죽음은 끔찍해요, 하고 여자는 소리쳤다. 삶처럼, 생처럼, 탄생처럼, 유년처럼, 벌레처럼 끔찍해요. 엄마는 더 이상 겉돌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모두가 엄마는 사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형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죠.

어머니는 사형을 원했다. 사형수들은 온전한 수인이 아니었고, 사형수는 ‘죽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사형당하지 않은 사형수는 온전히 속하지 못한 인물이다. 지금의 여자가 그러하듯이.

‘심오하고 집요한 유사성’ 속에 여자는 어머니이고, 여자가 낳은 알들이다. 어머니의 바람은 여자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감옥과 거리의 경계에 선 여자는 어딘가에 속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패한다.

여자가 여자이기 때문에 실패한다면, 실패의 책임은 여자에게 있지 않으리라. 감옥의 수인들, 학교의 아이들은 여자가 실패를 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자에게 감옥과 학교는 모두 낮이었다. 낮의 시간만을 보내기에 결코 제대로 알 수 없는 곳이다.

학교에서 여자는 유일한 범죄자였으며 저지르지 않은 모든 범죄를 용서받았다. 용서는 여자가 학교에 속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용서는 낙인과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이 감옥에 있는 당신은 우리와 다르다고, 그러나 우리는 당신을 용서하겠노라고. 강제로 주어진 용서는 여자가 어린 시절을 잊을 수 없게 한다. 여자를 아프게 한다. 더 이상 용서를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여자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갔다. 감옥으로.

감옥에서 여자는 용서받지 못했으나 수인이 될 수도, 감옥일 수도 없었다. 이곳에서 여자는 용서받지 않는다. 수인들과 달리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죄는 수인들의 것이니까. 그러나/그래서 여자는 감옥에도 속할 수 없다. 너는 여전히 감옥을 알지 못해, 수인들은 말한다. 수인들은 온전히 감옥이기에 언젠가 감옥을 완전히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여자는 감옥을 알지 못하고 온전히 감옥이 아니다. 감옥을 ‘결핍’했기 때문에 감옥을 떠날 수 없다. 매일 밤 감옥을 떠나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것이다.

어머니는 마침내 죽음의 기회를 향해 달려갔다. 여자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어머니는 온전히 사형수이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는? 여자는 온전히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여자가 무엇에 속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실패의 기록이다. 

글이 올라온 날부터 4일간 곱씹어보고 다시 읽어보았지만, 나는 여기서 고립과 실패만을 읽어냈을 뿐이다. 내가 발견한 것은 어린 시절을 보낸 감옥과 이어져 있고자 하루하루 투쟁하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사라진 것을 놓을 수 없어 기억을 꼭 움켜쥔 아이의 모습이다.

여자의 알은 언어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아글라야 페터라니를 떠올렸다. ‘혈관 속을 흐르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 흐르도록 둘 수 있지만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언어. 여자와 어머니의 언어. 같은 맥락에서 여자가 끊임없이 배설하는 알들은 그녀의 글이었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쏟아부었던 알들은, 여자가 잠에 들기를 기다리며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인지 모른다. 이야기와 기억과 추억을 회상하고, 곱씹고, 다시 이야기로 만들어 글로 써내려간 것은 아닐까. 배설하듯 끊임없이, 그녀의 모든 것을 글로 적어내려갔다. 어머니가 쏟아부었던 알들, ‘어머니와 여자의 아이’를 여자는 ‘홀로 수태하고 홀로 다시 낳아야 했다.’ 여자는 이해받지 못할 글을 계속해서 쓴다. 쓰는 것밖에 알지 못하므로. 아무것도 쓰지/낳지 않고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매번 그녀의 모든 것을 써내려갔다. 이 외로운 행위는 혼자가 아니고 싶은, 이해받고 싶은, 절박함이 묻어나는 여자의 발버둥이다.

나는 다른 것을 읽어내지 못했다. 다른 누군가는 이 글에서 끊임없는 도전을, 끈기를, 시들지 않는 생명력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탑처럼 높고 무덤처럼 깊은 곳’에서도 여전히 ‘반짝거리는 생의 진한 물기’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여자가 온전히 속할 수 있는 곳, 여자가 여자일 수 있는 곳을 상상하는 데 실패했다. 여자는 자신을 위한 새로운 감옥을 건축해야 했는데,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여자가 경험한 감옥뿐이므로, 여자가 본 적 없는 감옥은 상상할 수 없다. 본 적 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알지 못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일말의 가능성은 교도관과의 대화 속에 있다.

너는 바깥을 살아도 괜찮아. 네 엄마는 이미 죽었고 어머니의 죄는 네 죄가 아니란다.

하지만 제 어린 시절은 아직 감옥에 있어요. 전 그걸 두고 바깥에서 살아갈 수는 없어요.

어린 시절을 두고 어린 시절을 잊고 살아도 괜찮아.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어린 시절을 극복한 어른들보다 훨씬 많단다.

어쩌면, 여자는 그녀를 두고 사라진 모든 것들을 잊음으로써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감옥에 있는 어린 시절을 잃으면 바깥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잃는 것만이, 여자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까?

어머니에게서,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 여자가 여자일 수 있을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행복일 수 있을까?

여자는 그녀를 두고 떠나가는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사라짐이 여자를 아프게 했다. 상실이 남긴 상처에 그들은 악착같이 용서를 붕대처럼 감았다. 붕대 아래 여자가 숨쉬지 못하고 상처가 짓물러도,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용서하는 행위였기에. 여자의 상실과 죽음을 알지 못했기에.

상실로 인해 실패하고 있는 여자에게 또다른 상실, 상실의 상실만이 감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일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감옥에서는 외로운 생이 이어질 뿐이다. 여자에게 남은 것은 ‘모든 사라짐’, ‘그녀의 것이 아닌 사라짐들’뿐이다.

감옥을 벗어난다면, 적어도 다른 생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가르침을 잊는다면, 여자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익숙한 언어로 쓰인 낯선 글을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없지만 강렬한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미지가 흘러가는 것을 보며, 진득거리는 분위기를 즐기는 것으로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대로 놓아버리기엔 잊을 수 없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들이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벌레와 알을 으깨는 수인들. 손 안에 죽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지도 않는 이들을 보며 나는 다를 게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설픈 수용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도 죄스럽게 느껴졌다.

고민 끝에 내 나름의 해석을 적어보았지만, 이 역시 불완전하다는 확신만이 남았다. 부족한 글이 작품에 누가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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