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표면은 거칠다 공모(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영원한 것을 동경해서 (작가: 샤유, 작품정보)
리뷰어: 스트렐카, 22년 4월, 조회 65

카르노 엔진이라는 것이 있다. 물리(학)적으로 가능한 가장 이상적인 상황에서 작동하는 엔진인데, 이런 엔진조차 열효율이 100%가 되지 않는다. ‘고립계의 엔트로피는 감소하지 않는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이 엔진의 구동 과정으로부터 유도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장 이상적인 상황에서조차 손실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우리의 현실이라면 어떨까. 편향된 합리주의로 점철된 사회적 원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손실이 있을까.

많은 이들이 영원을 좇는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축 위에서 무한히 남는 것을 가리킨다. 시간에 대한 변화가 0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열역학의 법칙으로부터 동역학의 대상들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영원은 달성할 수 없을까? 없다. 대신 우리는 근사적으로, 외현적으로 그와 비슷한 것을 달성할 수 있다.

저 혼자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은 없다. 모든 불꽃은 꺼지지 않기 위해 새로운 장작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장작을 계속해서 제공할 수 있다면? 적어도 누군가의 유한한 삶에서는 그것이 마치 무한하고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렇게 한정적이고 유효적인 영원은 달성될 수 있다. 그 방법은 여러가지겠지만 공통점이 있다. 보다 커다란 시간 규모에서의 수명을 지닌 것- 예컨대 사회 체제나 과학기술 발전의 역사 따위에 기대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는 체제의 관리자로서 집중된 부와 권력을 통해 영원에 도달한 사람이며, 서린은 세계에 변혁을 가져올 발견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새김으로써 영원에 가 닿고자 한다. 민주에게 있어 영원은 생득적인 것이며, 서린에게는 후천적으로 바라게 된 것이다. 서린이 왜 영원을 바라게 됐는지 우리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서린의 독백으로부터 열등감과 소외감을 읽을 수 있다.

민주가 서린에게 다가섬에 따라 서린이 가진 소외감은 일부 메워졌으나 서린의 영원에 대한 동경은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선후 관계가 다를 수도 있겠다. 작중에 등장하는 영원한 것은 명예뿐만이 아니니까. 결국 서린은 아르티온을 매개로 다이슨 스피어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방법을 내놓게 된다.

그렇게 서린은 영원에 가 닿는 과정에서 사랑도(따라서 소외감으로부터의 도피도), 전능감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서린이 종내 마주하는 것은 어떤 숫자다. 0.3%. 상대량으로는 서브퍼센트에 지나지 않지만, 절대량으로써는 백만 명을 넘는. 서린은 실존하는 영원의 유효성을 직면한다. “우연한 사고와도 같은 가능성”으로 학교에 다니게 된 서린에게는 그것이 충격이었을 것이다. 사실 세상에는 해석적으로 정확히 풀리는 문제가 적다는 것을 알게 된 어린 물리학도처럼. 동경하던 영원은 매끄럽지 않았다. 멀리서 보았기에 수많은 노이즈가 평활화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민주가 선천적으로 지닌 영원 또한 외부의 장작으로 유지되는 유효적인 것이었으므로.

서린은 민주와의 간극을 보다 제대로 마주한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이,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된다. 민주는 처음부터 그 간극 때문에 서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서린은 민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민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서린은 민주라는 별에 가 닿기 위해 발판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발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린은 발판을 무너뜨리려 하지만 민주는 그렇게 두지 않는다. 서린의 시도는 모조리 실패하고, 마지막에야 그것이 도피에 불과함을, 떠넘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게 민주가 바란 대로라는 점 또한 느낀다. 서린에게는 남은 것이 하나 있다. 서린은 그를 이용해 도피를 극복하고, 연인의 통제를 깨뜨리며, 별을 땅으로 끌어내린다. 별은 언젠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겠지만, 땅에 닿은 적이 있었음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신경이 쓰인 부분은 민주가 서린에 대해 일종의 ‘과몰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름 먼 미래에, 영원을 달성한 오가노이드가 존재하는 시대에 거대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기업을 운영하는 존재가 동질감이나 호기심으로 대상의 평가에 대한 가중치를 그렇게까지 크게 뒀다는 점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서린 이후의 세계가 민주에게 영구적인 상처이려면 민주가 서린에게 갖는 감정이 그만큼 커야 하는데(그리고 그만큼 큰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에 대한 설득력은 마지막 민주의 고백만으로는 부족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세 번째 읽을 때 든 생각이다)

더 나아가서, 두 사람의 사랑과 블랙홀 발전기의 등장이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이 점이 민주의 서린에 대한 과몰입과 맞물려, 민주에 대한 단죄가 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 뒤 서린이 민주와 결국 대립하게 된 우연 위에서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만약에 민주와 서린이 만나지 않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린은 영원을 동경해서 블랙홀 발전기의 단초에 가 닿을 수 있었다면? 그 단초가 민주에 손에 들어갔다면? 둘 사이에 아무런 연관도 없이, 민주에게는 그 어떤 약점도 없이 블랙홀 발전기가 희생 위에 세워졌다면? 민주는 어떻게 단죄받을까?)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로맨틱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견고함을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소하지만 아르티온 매장량이 소행성대만큼 있더라도, 항성의 수명만큼 유지되는 다이슨 스피어보다는 지속가능성이 떨어질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한 다이슨 스피어가 이미 존재하는 문명 수준에서 노동력이 실제 사람으로 구성될 필연성이 없어보이는데 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위의 사소한 의문들과 별개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서린의 선택이다. 도피자, 통제 받는 자, 그러나 사랑하는 자로서 서린이 도피와 통제를 극복하면서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러면서 연인으로써 당연한 일인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처음으로 하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이다) 동시에 이것은 민주에 대한 단죄로 작용한다. 물론 민주는 속죄하지 않는다. 다만 상처입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단죄라는 유비 구조로 정교하게 기능할 수는 없다.

혹자는 이런 방식이 감상(感傷)을 방정식으로 구현하는 와중의 실패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본 소설은 주어진 상황에서 작품 내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감상을 마지막 조각으로 사용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므로. 그러나 ‘너와 나’의 이야기로써, 서린은 온전하게 완결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연한 가능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여정을 거친 뒤, 모든 것을 제대로 마주하고 선택한다. 그것이 비록 바람직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서린에게는 최선이었다.

누구나 도피한다. 외면한다. 가끔 지나친 것들을 청산하려 들지만, 다시 눈을 돌리곤 한다. 얽히고설킨 복잡성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사고의 병목을 유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그것을 제대로 마주해야만 한다. 현실은 유효적인 영원 그 이상으로 매끄럽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해답이 있긴 어렵겠지만, 그렇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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