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와 축복의 양가성 : 유토피아의 리빙데드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커스터디 (작가: 오메르타, 작품정보)
리뷰어: NahrDijla, 3월 19일, 조회 72

 

※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SF의 힘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반추하면서 동시에 나아갈 힘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과 세계의 구성은 긴밀하며 상호 보완적으로 이뤄집니다. 그 과정에서 SF가 남긴 족적은 지침 중 하나가 되어 우리의 삶을 견인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상상력이 항상 긍정적인 영역에서만 발휘되지는 않을 겁니다. 디스토피아의 영락한 세계 역시 반면교사로써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니까요. 오메르타 작가님의 소설 <커스터디>는 유토피아로 눈속임한 디스토피아 속에 사로잡힌 개인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커스터디(custody)란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채권이나 주식을 거래할 때 금융자산을 대신 보관ㆍ관리해 주는 서비스를 말함과 동시에 단어 그 자체론 양육권을 뜻합니다. 소설 <커스터디>는 이 중의성 사이를 오가며 세계관을 확장합니다. 구조를 짚어보면 양육권 자체를 위시하여 서사를 전개해 나가나, 그 이면에 ‘서비스인 커스터디’를 ‘숨겨놓음’으로써 일견 균열이 날 수밖에 없는 유토피아를 완성합니다.

체인 닷컴에서 비록 알 수 없는 일을 하긴 하지만, 아들 선우 준을 키우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혜주는 어느 날부터 자신의 일상을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약속한 놀이공원에서 혜주는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남자와 마주하게 되지만, 남자는 아들인 선우 준을 보고 혼란에 빠진 듯 사라집니다. 이후 도착한 관리자는 해커의 소행인 것 같다며 둘을 집으로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돌려보내지만 혜주는 남자가 곧 찾아올 것을 직감하며 아들과 도망치기로 합니다. 집을 빠져나온 것은 좋았지만 남자는 곧 혜주를 뒤쫓게 되고, 운전 주행에 문제가 생기면서 남자에게 잡힙니다.

남자와 대질하며 혜주가 맞이해야 할 진실을 잔인했습니다. 남자는 선우 혁으로 남편이 맞았고, 아들인 선우 준은 이미 여섯 살 때 사고로 사망했으며, 혜주는 메타버스 속 체인 닷컴이 서비스하는 상품에 착취 당하며 비용을 내고 있었으며, 서비스 비용을 치르기 위해 그 알 수 없던 작업을 통해 가상 화폐 채굴을 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혜주는 외면하던 진실을 마주하지만, 로그아웃하면 아들의 정보가 소실된다는 이야기에 로그아웃을 끝내 결정하지 못합니다.

며칠 후 다시 남편이 밝은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체인 닷컴이 법정에서 패배해 더 이상의 과도한 과금 요소를 제거하고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세계를 구축하기로 합의했다고. 그렇게 혜주는 다시금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상실을 겪은 자가 상실한 것과 기술로 재회할 수 있는 곳은 현세에선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세계의 이름이 천지인 것은 또 다른 세계 – 즉 유토피아임을 상징함과 동시에 현대 도래한 특정 사이비 종교를 상기하게 합니다. 이 중의적 양가성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소설을 비극으로 끝맺을 준비를 합니다. 비극은 그 구조상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것으로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을 찾아오는 누군가로부터의 도피, 유토피아의 허상을 깨달을 때 비극의 기능은 완수되며 추락이 시작됩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유토피아(디스토피아)에 사로잡힌 사람은 균열을 마주할 힘이 없습니다. 이 ‘힘’은 능동적인 능력과 동시에 균열을 마주할 의지를 동시에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작용은 외부로부터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외부에서 찾아오는 감각을 소설 내에서는 스릴러로서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로 그려집니다. 편모 가정(처럼 보이는)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누군가의 존재.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존재는 그 합목적성의 맹목으로 말미암아 위협으로 현현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위협의 존재 역시 안팎에서 존재합니다. 표상적으로는 자신에게 찾아오려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존재가 스릴러의 정체지만, 집세, 입주비 등의 생활비나, 준의 머리 염색이나 놀이공원에 가자는 요구들 역시 과금 요소의 일부였다는 반전 속에서 혜주를 둘러싼 현실 역시 위협의 일환이었다라는 것은 종속적인 세계의 스릴러를 보여주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터입니다. 그것은 편모가정의 현실의 편린이라고 봐도 무방할 텐데, 메타버스 속에서조차 벌어지는 빈부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물질주의의 참혹함을 환기합니다. 하지만 이 참혹함은 일견 따스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혜주의 준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은 이 소설의 분위기가 한편으로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이는 듯싶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러, 준의 정체가 단지 메타버스 속의 가상 인물임이 밝혀지며, 그리고 혜주가 현실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가상에 대한 사랑과 자녀에 대한 사랑이 교차하며 참혹함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소설의 기저 밑에 숨어있던 사실이 드러난 순간, 시작된 인지적 소외(cognitive estrangement)는 강력하게 작품의 전반을 지배합니다. 인지적 소외 개념이란 다르코 수빈이 제시한 개념으로 새로운 기준들과 새로운 관점들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이 경험하는 현실을 낯설게 만들어 현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깨닫게 한다고 보는 일입니다. 메타버스 세계가 갖는 기능과 그 역기능, 그리고 가상화폐의 폐해가 맞물리면서, 그것은 일종의 노붐이 되며 새로움을 야기합니다. 노붐(novum)은 콘텐츠들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 기술혁신들과 새로운 고안물들을 말하며, 독자들의 현 세상과 구분해주는 가장 중요한 구분점이 됩니다.

이 소설의 노붐인 발전된 메타버스 속 가상 세계는 우리에게 새로운 해방감을 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저당 잡음으로써 그 것에 종속되고 착취되는 삶은 우리가 바라는 방식이 아닐 겁니다. 무언가를 저당 잡아 과금을 유도하는 방식은 현대에 있어서 회사와 유저 사이의 갈등을 촉발해왔습니다. 현대의 메타버스는 아마도 게임이 대표적일 겁니다. 게임의 저당 잡는 방식은 경쟁입니다. 뒤쳐지면 안된다는 것, 좀 더 나은 – 좀 더 앞질러 가는 경험은 게임에 결제를 유도하는 강력한 기저 방식으로 작동해왔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자신의 유희를 위해서 즐기는 것일 뿐 반드시 그것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게임사의 방식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중독효과를 발휘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유희’적인 측면에서 벗어나 삶을 저당잡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체인닷컴’의 방식은 인간성을 저당 잡는다는 측면에서 잔혹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동시에 끝없이 과금을 유도하기 위해 ‘애정의 대상’인 준을 매개로 각종의 유혹을 보여줍니다.

이 구도를 강렬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바로 놀이공원입니다. 놀이공원은 온갖 놀 거리가 가득한 공간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의 유혹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츄로스도, 플룸라이드도, 플룸라이드를 탈 때 찍은 사진들도 모두 돈입니다. 그것은 혜주가 직접적으로 원한 것이 아닌, 가상의 준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제시되며 문제를 제기합니다. 혜주에게 필요한 것은 준과의 오붓한 시간일 뿐이더라도, 그것에 기생하여 결제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커스터디>는 그러한 자본주의의 폐헤의 단편만을 보여줄 뿐임과 동시에 총체적인 디스토피아의 시작점을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저주라고 해야 할까요, 축복이라고 해야 할까요? 매트릭스 속 컴퓨터의 양분으로 사육되는 인간처럼, 그리고 유토피아 속에서 리빙데드처럼 혜주는 자본에 착취당하며 메타버스 공간 속을 배회합니다.

리빙데드는 정신을 상실한 채 육체만 움직이는 괴물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상실한 채 정신만 살아있는 상태 또한 리빙데드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지점에서 소설 <커스터디>의 인지적 소외는 가장 강력하게 드러납니다. 살아도 살아있을 수 없는 자인 헤주는 메타버스 속에서 스스로를 포기하면서도 착취 당하는 생활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메타버스 속에서 헤주의 신체는 주체적인 영역이 아닌 자본으로 물화되어 타자화 됩니다. 그 것은 일견 저주로도 보이고, 또는 축복으로 보이는 양가성 속에서 비극으로 현현하는 디스토피아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디스토피아는 붕괴하기 때문일까요. 이 이야기는 (비록 비극일지라도) 해피 엔딩으로 끝난 모양입니다. 물론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주인공이 구제되었다는 점에서는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문제는 SF의 세계는 곧 다가올 미래를 꿈꾸는 작업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비록 반면교사로써 현현할지언정 타인의 간절함에 값을 매기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끝날만 한 일일까요. 소설 <커스터디>는 사회의 가장 감정적이고 잔인한 지점에 SF을 위치 시켜 우리의 사회를 반추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단순히 고도로 발전한 ‘기술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이야기하지, ‘기술 속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소설의 울림은 SF를 넘어선 편린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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