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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작품: 유기체의 소생에 관한 실험 (작가: 한애선, 작품정보)
리뷰어: 사피엔스, 21년 8월, 조회 122

내가 살고자 남을 죽여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대부분(?)은 없다고 하실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살생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먹는 것부터가 다른 생명, 즉 식물과 동물을 섭취하는 것이고요, 우리가 배출하는 대변의 대부분은 장내 세균의 시체입니다. 또한 양치질을 하는 것도 입안의 충치균을 죽게 하고요. 감염이 되면 면역체계를 발동시키든가 항생제를 먹어서 내 몸에 질병을 일으킨 병균을 죽이게 되죠.

그 외에도 간접적으로 살생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동물실험인데요. 살면서 약 한 번 안 드셔보셨거나 화장품 한 번 안 발라 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새로운 약이나 화장품을 만들 때 기업들이 임상실험 전에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함으로써 제품의 효과를 입증하고 부작용을 점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도 없을 겁니다.

현재 우리는 거대한 실험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바로 코로나 백신의 임상4상입니다. 많은 분들이 백신을 접종하셨고 저도 곧 접종을 앞두고 있습니다. 3상이면 임상실험 다 끝난 거 아니냐는 분도 계실 테지만 지금부터가 진정한 임상실험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다른 백신을 접종할 때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을 테지만 코로나 백신을 접종하면서는 편안한 마음만으로 하기는 힘들 거예요. 사실 저도 맞을지 말지 여전히 고민 중이긴 합니다. 마루타 되기 싫다, 끝까지 안 맞겠다 하시는 분도 계실 거고요.

백신이란 게 참 그렇습니다. 부작용이 걱정돼서 안 맞겠다지만 그런 분들이 실제로는 반사이익을 얻는다는 거죠. 주변 사람이 다 백신 맞아서 그 병에 안 걸리면 나한테 병을 옮길 사람이 없으니까요. 혹자는 그것을 무임승차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들을 비난만 할 수는 없겠죠. 아무리 오래되고 훌륭한 백신이라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백신의 부작용으로 고생을 하고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데이터가 쌓여서 더 훌륭한 백신이 만들어지는 걸 겁니다. 결국 백신의 효과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다른 생명의 지불 혹은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백신뿐만 아니라 어느 신약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다른 생명이란 임상실험에 참여한 ‘인간’은 물론 그 전에 실험실에서 무수히 희생된 실험동물들도 포함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인간의 희생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면서도 동물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모르거나 알고서도 모른 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저는 학부 시절에 약학대학에 다니는 어느 후배로부터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년이 다 된 이야기라 그 후배가 직접 본 것인지 카더라 통신인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만, 그 끔찍한 얘기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쥐를 해부하기 위해서는 죽은 쥐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쥐를 죽여야 하는데 천천히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이면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고통 없이 빠르게 죽이기 위해서 보통 한 손으로는 쥐의 몸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꼬리를 잡고서 척추를 잽싸게 뽑는 방법으로 죽인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실험 시간에 누군가가 힘 조절을 잘못해서 쥐의 척추가 아닌 머리가 뽑혔다는 얘기였습니다. 순간 전부가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고요.

그 얘기를 들은 저는 약대든 의대든 안 간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대학 입학할 당시는 IMF가 있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회사원은 금방 잘리니까 교사나 전문직이 최고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서 교대, 사범대, 법대, 의약대의 인기가 치솟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부모님도 제게 의대 진학을 권했지만 전 도저히 해부실험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단호히 거부했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아마 그때 의대를 갔으면 해부실험보다도 살인적인 학습량 때문에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의대생들은 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야 할까요? 물론 진료 과목 자체가 많아서일 수도 있지만 일단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이겠죠. 사소한 실수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까요.

자, 그런데 여기서, 사람이 죽는 게 그렇게 큰일인가요? 물론 큰일이죠! 사람이 죽는 문제에 대해 “That’s what people do!”라고 외치던 모리어티는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본인의 사상(?)을 실천하기라도 하듯 셜록의 눈앞에서 자살을 해 버리죠. 왜냐면 자신의 생명보다도 셜록을 궁지로 몰아넣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요. 그런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사람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심각한 문제일 겁니다.

누구한테든 가장 두려운 일, 가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일은 죽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인의 죽음이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든 간에요. 여기서 (대부분의) 우리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므로) 역지사지의 정신을 발휘합니다. 따라서 내 생명이 소중하고 그것을 보호받고 싶고, 내가 아닌 남도 나와 똑같은 심정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때 ‘남’이란 비단 사람만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물론 식물도요)의 생명도 소중하죠. 그렇기에 많은 분들이 동물 실험을 반대하시는 걸 거고요. 동물 실험의 윤리적 문제를 알면서도 외면하는 건 ‘그게 뭐 어때서.’ 보다는 ‘어쩔 수 없잖아.’와 같은 심정이기 때문이겠죠. 이럴 때 우리는 ‘불편한 진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실제로 동물 실험은 필요합니다.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포조직을 이용하거나 시뮬레이션만 해서는 올바르거나 충분한 데이터를 얻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개발된 신약을 가지고 임상실험을 했다고 칩시다. 약효가 없어서 시간과 자원만 낭비되든가 부작용이 심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일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요?

이런 식으로 실험동물들의 권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동안 논의에서 빠진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실험동물들을 매일 대하는 사육사, 수의사, 연구원들인데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마치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에서 사형수들의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스트레스를 다룬 것과 비슷합니다.

소설의 배경은, 정확한 과는 나와 있지 않으나, 동물 실험을 하는 어느 대학 연구실이고요, 주인공은 실험동물들을 다루는 수의사입니다. 주인공은 연구실의 수장인 최 교수와 연구실의 잡무를 맡은 정연 씨와의 사이에서 고난을 겪습니다. 왜냐면 최 교수는 연구를 위해서는 실험동물들의 생명이나 아랫사람들의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고요, 정연 씨는 제가 위에서 언급한 역지사지의 정신이 매우 투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정연 씨는 실험동물이었던 어느 병든 비글에게 정이 든 상태였고 그 비글을 돌보다 제대로 멸균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험실을 드나드는 바람에 쥐들이 감염돼 프로토콜에 따라 모든 쥐를 안락사 시켜야 하는 지경을 만듭니다. 실험실도 오염됐으니 전문 업체를 불러 소독과 살균을 시켜야 하고 나머지 실험도 모두 중단돼야 하고요. 정연 씨의 안일함 때문에 엄청난 비용을 치르게 된 거죠. 최 교수는 그 점이 너무 괘씸해서 이 참에 교육을 단단히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정연 씨의 손으로 쥐들을 전부 안락사시키라고 명령하죠. 주인공인 고호 박사는 원래 그것이 자신의 업무이기도 하고 가뜩이나 소심하고 동물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정연 씨를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고 싶지 않아 정연 씨와 함께 쥐들을 안락사 시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거의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죠.

고호는 원래 극심한 불면증을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연구실의 골치 아픈 문제들을 고호에게 맡겨놓고 실험실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면서 연구 성과만 챙기는 교수, 실험동물들을 수도 없이 안락사 시켜야 하는 일상, 과거 자신과 실험실 직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죄 없이 희생된 쥐, 실험을 목적으로 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동물들… 그러한 일들이 눈앞에 떠오르며 잠들지 못 하죠. 그렇다 보니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도 실험실에 도착하면 믹스커피 5개를 한꺼번에 타 마셔야 겨우 제정신을 유지할 정도로 피곤한 생활이 매일 이어집니다.

고호는 잠을 편히 자고 싶은 생각에 죽음과 소생을 갈망합니다. 잠시 죽더라도 깊은 잠을 자고 싶어서죠. 죽어버리면 그건 죽음이지 잠이 아니니까 소생까지 마무리돼야 됩니다. 결국 죽고 싶을 정도로 잠을 자고 싶지만 실제로 죽고 싶진 않은 겁니다. 하지만 죽었다 살아나는 기적은 그냥 일어날 수 없기에 고호는 누군가가 자신을 대상으로 그런 실험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바로 제목처럼 ‘유기체의 소생에 관한 실험’이죠.

헌데 그 실험은 고호가 아닌 정연 씨에게 먼저 일어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마지막에 고호 박사의 상태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표현되며 소설이 끝납니다.

이 소설은 고호 박사의 스트레스와 죄책감, 피로감, 분노, 좌절, 이런 감정들이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한없이 안타깝고 공감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주변인들이 갈등상황을 부채질하다보니 더욱 답답함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심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죠.

최 교수는 아마도 젊은 시절에는 고호처럼 여러 스트레스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쌓아온 커리어를 그런 이유로 내던질 수도 없었겠죠. (그렇기에 고호도 이 일을 그만두질 못 하는 걸 거고요.) 최 교수는 ‘어쩔 수 없잖아.’ 같은 변명과 자기 위로를 수도 없이 반복하다 나중엔 ‘아, 몰라.’ 이런 심리로 변해버렸을 겁니다. 한 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거였죠. 하지만 그런 그를 비난만 할 수 있을까요? 문제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다면 일을 그만뒀든지 미쳐버렸든지 둘 중 하나였을 겁니다. 아마 고호도 살아남아 이 일을 계속한다면 최 교수와 비슷하게 변해가지 않을까요? 고호는 그것 또한 자신을 대상으로 한 실험의 일종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정연 씨의 경우는 소위 그 놈의 정 때문에 일을 망쳐버린 소심하고 무능력한 캐릭터의 전형이지만 이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실험동물이어도 매일같이 보살펴 주다보면 반려동물처럼 정이 들겠죠. 특히, 어느 기사에서 읽은 건데, 비글은 사람을 매우 잘 따른다고 하네요. 그래서 실험동물로 잘 쓰인다고……(눈물) 또한 정연 씨는 원래 전산 작업을 하라고 고용된 사람인데 교수가 부족한 예산 때문에 실험실 관리까지 시킨 바람에 일이 그렇게 돼 버린 것도 있습니다. 자기 전문 분야도 아닌데 일 제대로 못 한다고 구박받고 또 그 일 자체가 동물들을 괴롭히는 격이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고호의 말대로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불쌍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냥 일을 그만둬버리면 안 되는 걸까요? 하지만 그러면 신약 개발은 누가 하죠? 세상엔 아픈 사람이 넘쳐나고 신약 개발은 돈이 되고 누군가는 자본을 굴려 제약 회사를 차릴 것이고 회사는 연구원을 고용하고 대학에 연구를 의뢰하겠죠. 그리고 누군가는 실험이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것도 모르고 신약을 개발하겠다는 순진한 포부를 안고 대학을 갈 거고요. 최 교수와 고호 박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또 이렇게 살게 되지 않을까요?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어, 누군 스트레스 안 받고 사나, 그냥 시키는 대로 일하고 월급 받아, That’s what people do! 이런 조언을 해 주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는 현대 의학의 혜택을 누리며 사는 한편 실험동물들의 생존권을 지켜주려 하지만 이런 이들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수많은 의료진들이 살인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며 의료 현장을 지키고 있는데요, 현재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 중인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모더나였던가 화이자였던가 백신 개발한 연구원들이 몇 개월 간 집에도 못 들어갔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기억이 나네요. 해당 연구팀의 일원들은, 단순히 야근을 반복한 걸 떠나서, 고호 박사와 비슷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실험동물들을 담당했던 직원들이요. 그들의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그저 스톡옵션이나 성과급 좀 챙겨준다고 해결이 되는 걸까요?

생명은 소중한데 그 소중함의 정도를 우리는 늘 저울질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이요. 몇 번 언급했듯 어쩔 수 없는 문제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아, 몰라.’하고 지나치기 보다는 한 번 쯤은 생각을 해보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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