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살인> – 풀 길 없는 스트레스 속 공교육 환경에 갇힌 우리나라 학생들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오늘의 살인 (작가: 김슬하, 작품정보)
리뷰어: 그림니르, 2월 22일, 조회 42

어느새 내가 브릿G 리뷰단으로 뽑힌 이래 네 번째 리뷰를 쓰고 있는 걸 보니, 이 활동을 한 지도 한 달 가까이 된 것 같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에도 내가 평소에 잘 읽지 않는 장르의 작품을 선택했다.

 

 

나는 평소에 비위가 약해서 범죄물을 못 읽는 편이라 김슬하 작가의 <오늘의 살인>을 제목만 보고 처음 클릭했을 때만 해도 걱정했는데, 막상 이 작품을 읽어 보니 범죄물의 탈을 쓴 철학 소설에 가까웠다. 사실 이 작품은 제목에만 ‘살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전혀 살인하는 내용이 아니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 세 명이 셋 중 한 사람의 방에 모여서 죽이고 싶은 사람을 고르고, 살인 계획까지 세우지만 그걸로 끝이다. 주인공인 학생들은 자신들이 몇 시간씩 들여 가며 살인 계획을 세운 사람을 실제로 죽일 생각이 없다.

 

 

그들이 왜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살인 계획을 세우는지는 그들의 살생부에 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 보면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던 생윤선생님(*’생활과 윤리’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부터 해서 급식아줌마, 교장선생님, 아르바이트 사장, 동석이에게 가끔 선 넘는 장난을 치던 병연이, 윗집 아줌마, 수능을 만든 사람, 피타고라스, 뉴턴” 은 모두 학생들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스트레스를 야기시키는 사람들이다. 저들 중에 이미 죽은 사람이 둘(피타고라스, 뉴턴)이나 있고 심지어 한 명(수능을 만든 사람)은 실존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은 학생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학생들은 그냥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필요했던 것 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학생들에게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이 작품을 읽은 성인 독자라면 해 봤을 수도 있겠다.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게 어른들의 의무 아니던가! 그런데 학생들에게 살인 계획이 아닌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알려 준다는 생각은 사실 한낱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한민국의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내 공부가 아직 짧아 한국사에서 교육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언제부터 이렇게 타락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나라 곧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양계장에서 닭을 길러 내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화기에서 부화한 병아리(학생)들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병아리들을 두는 곳(유치원, 어린이집)에 있다가 어느 순간 선별장(초등학교)으로 간다. 중닭(청소년)쯤 돼서 선별장을 나온 병아리들은 본인 의지에 상관없이 “양계장(국가)의 이득을 위해 상품가치가 뛰어난 닭이 된다(출세하여 입신양명한다)” 라는 한 가지 목표를 주입받고 한 마리당 A4용지 한 장 크기 정도를 제공하는 닭장(중, 고등학교)에 갇힌다.

 

 

대한민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내가 그곳을 “한 마리당 A4용지 한 장 크기 정도를 제공하는 닭장”이라고 비유한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만 돼도 본격적으로 수능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평소에도 학생들을 시험 대형으로 앉힌다. 한 사람의 개인 공간이 책상 하나, 의자 하나가 차지하는 범위뿐이다. 마치 양계장의 닭들과 같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도 힘든 범위 안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갇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공교육 과정 어디에도 학생 본인의 의지는 들어 있지 않다. 그런 것이 들어갈 자리조차 없다. 공교육 과정이 오로지 국가의 입장에서 국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은, 곧 크게 성공하여 이름을 하늘 아래 사방에 떨칠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을 길러 내기 위해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다는 것은 곧 판검사나 의사가 되거나 사업가, 공무원이 되는 것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험을 잘 봐야 하고,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공부 중에서도 ‘시험용’ 공부를 잘 해야 한다. 그러니 학교 교육은 학생의 의지를 고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전에도 쓸모없기까지 한 ‘시험용’ 교육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병폐에 가까워진 교육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예전부터 계속 나와도 국가는 그에 조금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는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 출세할 가능성이 높고 국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능력을 가려내기 위해 시험은 꼭 필요하다. 어떤 직무에 사람을 쓰려면 그 사람이 해당 직무에 적합한 능력을 가졌는지 최소한의 검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출세하려는 개인에게 요구하는 시험들은 그가 자신이 하려는 직무에 걸맞는 능력을 가졌는지 알아보기보다, 그냥 “우리는 으흠… 인재를 요구한다. ‘저기는 뛰어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야’ 같은 사회적 명망을 얻고 싶다” 라는 각 기관 및 기업들의 두루뭉술한 겉멋내기용 요구에 맞추어져 있다. 시험의 내용이 그 직무에서 실제로 하는 일과 연관 있든 없든 그 시험의 성적 자체가 하나의 ‘패스’처럼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꽤 기형적인데도 아무도 그에 대해 지적하지 않는다. 극도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사실상의 신분제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지적할 시간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지적할 힘이 없으며,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고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지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작품의 주제로 돌아와서 말하자면, 학생 개인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교육 환경에 놓인 우리나라 학생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학교 안에서 개인의 취미나 여가를 즐기고 싶어도 교사들이 “그건 시험 끝나고 하고 지금은 공부해야지?” 라며 막고, 학교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교사들이 “학생이 왜 학교 밖으로 나가? 공부해야지!” 하면서 학생들을 학교 안으로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도무지 스트레스를 풀 수가 없는 환경이다.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학생들이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살인 모의를 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며 옹호할 수 없다. 나도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풀 곳 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린 그들의 정신 상태만큼은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살고 있거나 혹은 이미 살아 본 모두가 공감할 것이라고 감히 생각하며 이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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