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판타지 속 여성들은 겁탈당하지 않는 전개를 꿈꾸는가? 공모(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공모채택

대상작품: 피와 불 (작가: 이지형, 작품정보)
리뷰어: 서계수, 20년 12월, 조회 437

작품의 만듦새에 대해선 크게 지적하고픈 생각이 없다. 브릿G에서 소설을 연재하는 사람으로서, 필자도 제대로 해낼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선 지적을 아끼는 게 좋단 생각이 들어서이다. 장편 소설을 쓰며 저지를 수 있는 초보적인 실수가 보였으나 이것은 필자 또한 아직 극복하지 못한 점이므로 뭐라 크게 할 말이 없다. 그러니 이 리뷰에서 다룰 것은 앞서 말한 문제들이 아닌 다른 것들이다. 작품의 정체성과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궁금한 점이 있다. 작가가 이 작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이다.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 원작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의 2차 창작 팬픽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본인이 스스로 창작해낸 창작물이라고 생각하는지. 전자라면 작품 소개에 팬픽이라고 표기하는 것을 권한다. 후자라면 이 작품은 아직까진 <얼음과 불의 노래>의 마이너 카피에 불과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마이너 카피라는 것 그 자체로 흠이 되진 않는다. 작가는 본인을 ‘작가 지망생’이라고 밝혔다. 이 소설도 습작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산’이나 ‘아리아’, ‘리틀 핑거’ – 등, <얼음과 불의 노래>를 연상하게 만드는 작명 방식에 대해선 재고할 것을 권한다. 필자가 일부러 비슷하거나 같은 부분을 찾아가며 읽은 것이 아닌데도 주연 캐릭터나 주요 설정이 꽤 겹쳤다. 물론 팬픽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흘려들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제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필자가 어릴 적엔 남자가 제 앞을 막은 여자 배에 주먹을 꽂아 넣어 기절시키는 장면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 많았다. 그러니까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에 말이다. 2020년도엔 안 볼 줄 알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 본작의 작가 얘기는 아니다 – 여성의 옷을 종잇장처럼 찢으며 강간을 시도하는 장면을 넣는 것으로 ‘이것이 진짜 중세풍 판타지다!’라고 얘기하고 싶어 한다. 중세에 여자 인권은 바닥이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현대인 중 실제 서양 중세 여성 인권이 어땠는지 아는 이들은 굉장히 드물고, 하물며 글 쓰느라 바쁜 소설가가 이를 칼같이 고증할 의무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서양 중세풍 판타지 소설이든 뭐든, 작품을 읽는 독자가 현대인인 이상, 작품을 쓰는 작가도 현대인의 윤리관을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조선 시대에 공화정을 부르짖는 정도로 현대인의 가치관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소금을 문질러 이 닦던 당대 문화까지 고증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필자가 권하는 것은 간단하다. 최악만 피하자. 왜? 재미가 없으니까.

여기서 말하는 ‘최악’은 강간이다.

다른 작품 리뷰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여성이 당할 수 있는 고강도의 위협이 강간인 것은 최악이다. 왜? PC하지 못하단 문제는 차치하고, 시시해서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자가 강간당하거나 강간당할 뻔한, 창녀가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수백 개쯤 될 것이다. 그중 재밌게 쓴 것은 손에 꼽는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계속 강간당하는 여자와 몸을 파는 여자를 판타지 소설에 넣는 것일까?

“서양 중세풍 판타지 소설을 쓰며 강간당하거나 몸을 파는 여자를 넣지 않으면 작가인 내가 죽을 것 같다!”

라는 의견이 아닌 이상, 강간도 창녀도 빼길 권한다. 재미와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방해 요소이기 때문이다. 잘 감상하다가도 강간이나 창녀가 등장하는 순간, 필자를 포함한 일부 독자들은 ‘아, 또야?’하고 피곤해진다. 괜히 ‘여자는 모두 죽이고, 남자는 모두 겁탈했소.’가 <눈물을 마시는 새>의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다가간 것이 아닐 터이다. 그만큼 판타지 소설에서 여자가 유사시에 강간당한, 쓸데없는 역사가 길단 뜻일 테고.

본작에 긍정적인 부분도 없지 않다. 리뷰를 쓰는 지금, 필자는 본작을 17화까지 읽었다. 작가 지망생이 이 정도 호흡으로 길게 이야기를 써 내려간 것은 굉장한 일이다. 분량을 늘리는 것은 얼핏 단순 노동으로 보이지만, 필자 또한 장편을 쓰려고 시도해본 사람으로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를 수 없었다. 이 정도의 분량을 쓰는 작가는 스스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리뷰어로서, 브릿G에서 글을 쓰는 동료 작가로서 필자는 작가가 건필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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