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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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막 – “너무야”]
 

사랑은 마음 속에 지피는 불쏘시개로 자주 비유되지만 내가 단연하건대 사랑은 미지근함에 더 가까운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불은 언젠가는 꺼지고 사라지지만 식은 사랑은 결코 그렇게 쉽게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 숯이 조금은 계속 남아있어 언젠가는 다시 펴질지 모른다는 희망에 우리는 달라붙는다. 그 희망은 빈 공허로 변해 점점 자신의 마음 자체까지 피폐하게 만든다. 운이 지지리도 없다, 우리. 노이로제 걸리겠다. 꽤나 슬프다. 정말로.

 

“어… 그러니까, 저기…”

 

전부 다 사람들이 예전에 가졌던 사랑의 감정을 그냥 내버려두지를 못 하기 때문이다. “잘 하지 (못)한다”의 “못한다”가 아니라 “불가능하다”의 “못 한다”이다(띄어쓰기 조심). 영어에서는 “없는,” 혹은 “전의”라는 의미로 쓰이던 접두사 “ex”가 이제는 그냥 “전 애인”이란 뜻의 명사로 쓰일 정도로 많이 말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 과거의 연애이다. 사람들은 이제 등 뒤에 있는 것이라며 가볍게 전 애인들의 얘기를 하지만, 그 얘기들을 그렇게도 선명하게 하는 것으로 봐선 가볍게 여기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마음은 한번 깨지면 절대로 완전히 도로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접착제를 써도 흠이 나있으면 결을 복구할 수는 없다.

 

“오래 전부터, 어, 너를… 좋아했어.”

 

경험으로부터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분명히 경험해본건 사람들이 말하는 그 불타는 시간들이다. 누군가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되면 마음이 탁하게 올라 차서 정말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의 불꽃을 느끼게 된다. 당연히 책들에는 그런 감정들이 세미하게 묘사되어있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니까. 그리고 가장 흔하게 겪어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쉽게 공감할 수는 있어도 겪어봤기에 과장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런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다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보인건 아니다. 이야기란 바로 그런 허구로 미지근한 마음을 다시 지피기 위하여 쓰여진 것들이다.

 

“그러니까. 나랑 사귀어줘!”

 

소년의 목소리가 음량이 증폭되면서 나는 현실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 애는 나보다 이마높이로 큰 키로 나의 시선을 피하다가 소리를 지르면서 부탁을 한다. 나는 눈의 초점을 맞추면서 숙이고있는 그를 바라본다. 얼굴은 순진하게 생겼는데 머리를 이렇게 숙이는 것으로 보니까 엉망진창인 머리카락이 잘 보인다. 분명히 자신의 덩치에 비해서 너무 작은 교복은 몸과 딱 달라붙어 얼마나 마른지를 알 수 있다. 내 작은 몸과 대조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누구든지 지나가면서 이 풍경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나도 지금 고개를 갸우뚱하고있다. 딱히 나하고 이 아이가 같이 있는 풍경을 봐서가 아니라(내 눈으로는 나 자신이 안 보이니까, 당연하지) 이 소년이 마른 몸을 내 앞에서 숙이면서 고백을 하는 통 이해가 안 되는 이 상황이 도대체 실감나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이런 순간들엔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남자 아이는 계속 어, 그러니까, 그게, 같은 것들을 중얼거리며 말을 하는데도 모든 단어들이 또박또박하게 나한테 들린다. 마치 큰 부탁이라도 하는 것처럼 허리를 90도로 꺾어 내 앞에서 절하듯이 땅을 바라본다. 내가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사랑은 불쏘시개라든지 미지근하다는지 사람들은 감정들을 버리지 못 한다는지라는 생각들이 광속같이 머리를 스쳐나갔지만 내 눈 앞에 목격한 이 장면이 정말로 어떤 의미를 가진지는 아직 알아채지 못 하겠다. 바보같은 기분이다.

 

“어…”

 

애가 눈을 조금 치켜들어서 내 표정을 바라본다. 아마 나는 또라이같이 멍하게만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거다. 놀라거나 부끄러워서 홍조를 띄거나 무서워서 도망가거나 그런 정상적인 반응 대신에 나는 그저 너무나도 혼란스러워서 이 남자 아이의 눈을 바라보기만 한다.

 

“저기…” 라고 애가 꺾은 몸을 피며 선다. 나는 다시 눈길을 좀 위쪽으로 바라봐야한다.

“응? 아, 잠깐.” 아이가 곧게 서자 나는 그제서야 감정의 기미를 보이며 바보같은 일련의 세 단어(라고 할 수 있으면)를 말한다.

 

나는 일단은 침착해 보이려고 미소를 지으려 노력한다. 아이는 계속 마치 나를 두려워 하는 것처럼 눈썹을 내린채로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런 모습을 보니까 한번 도망갈까나 생각이 들긴 한다. 이 학교 운동장 구석 주변을 바라보니 도움을 요청할데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게 된다. 희망은 없다. 구조는 오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이 폭탄을 제거해야만 한다.

 

“근데… 왜 나?”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하지 말라고 아버지가 가르쳐줬지만 난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거다. 나의 혼란스러움은 이 문제에서 기인한 것 같다. 분명히 좀 더 뉘앙스를 붙힐 수는 있을거다. 내 얼굴이 뭐라고 볼 것도 아니라던가, 가슴은 없고 키가 크거나 심지어 내 기준으로도 재밌는 사람은 아니라던가, 그리고 우리는 전에 한번도 말해본 적도 없다던가. 아니, 얘하고 아예 만난 적이 있었던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