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박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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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김 씨와 문자를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세일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김 씨도 더는 문자를 보내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 7시를 지나 있었다.

 

여전히 선영으로부터의 답장은 오지 않는다.

 

‘지금쯤이면 깨어 있어야 할 시간인데..’

 

알수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선영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통화음이 몇번 울리지도 않고 전화가 끊어진다.

 

‘..이거 전화 받다가 끊은거..’

 

그 어느 때 보다 더 간절하게 선영이 필요할 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세일의 머리를 뒤흔들어 놓는다.

 

“배신 받고 버림받은 거야 불쌍하게도..”

 

‘그냥 무슨.. 일이 있는거겠지..’

 

심호흡을 하며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켜보려 해도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간다.

 

세일은 휴대폰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애써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아무리 뜨거운 물을 몸에 퍼부어도 좀처럼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세일은 욕실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더 차가워진 몸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침대에 길게 몸을 드러누웠다.

 

온갖 생각과 감정들의 격전장이 된 머릿속이 간절히 휴식을 원하고 있다.

 

‘이대로 잠들면 또 꿈꾸게 될건데..’

 

더 이상은 꿈속의 대화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주는 진실들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밀려오는 졸음에 저항해 보려 해도 잠이 가져다줄 위안을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지치고 혼란스러웠다.

 

세일이 오직 간절히 원하는 것은 꿈도 진실도 대답도 아닌 선영의 온기와 목소리였다.

 

질척거리는 수면의 늪으로 조금씩 내디디고 나아가는 세일을 깨운 건 갑작스러운 문자 수신음이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이 더 앞선다.

 

침대에 몸을 누인 체로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들고 확인해 보니 선영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미안해요. 늦게까지 자느라 문자 확인도 못 했어요. 급하게 출근하느라 전화도.. 저녁 식사는 내일 해요. 아니면 점심때부터 만나서 같이 놀아도 좋고. 이따 퇴근하면서 문자 남길게요.]

 

온기가 온몸에 퍼져나간다. 이제까지의 모든 공포와 불안감이 다 하찮은 망상처럼 여겨진다.

 

안도감이 세일을 더 깊은 잠속으로 끌어당긴다. 세일을 기꺼이 안도의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낯선 복장의 박 노인 같기도 하고 박 노인이 아닌 것 같기도 한 남자가 칼을 내민다.

 

꿈속이라는 자각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현실감이 공존한다.

 

머뭇거리며 칼을 건네받는 손이 떨리고 있다.

 

건물과 사람이 불타는 열기와 그보다 더 뜨거운 학살자들의 숨결이 데일 듯 뜨겁게 느껴진다.

 

사방에서 칼을 손에 쥔 남자들에게 살해당하는 아이들과 여자들의 비명이 피를 들끓게 한다.

 

칼을 쥔 세일의 손 아래에 엎드려 탄원하는 여자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온다.

 

비어 있는 손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하얀 목을 드러낸다.

 

‘꿈이야.. 이건 다 꿈이다..’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봐.”

 

공포에 잠식당한 눈동자에 선영의 얼굴이 떠오른다.

 

‘낮에 들었던 이야기에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칼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신의 몸이 행하는 행동에서 눈을 돌려 보려 해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은 손에 힘을 풀자 비명과 탄식과 함께 생명이 빠져나간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진다.

 

“충분하지 않아. 너무 느리고 비효율적이군. 꿈꾸는 자를 재우기엔 아직도 충분하지 않아..”

 

박노인의 말투는 세일이 평소에 듣던 그대로 담담하고 감정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야 한다. 그게 우리의 반석이자 자장가를 부르기 위한 사형대가 돼줄 것이다.”

 

‘이건 다 꿈이다.. 박 영감님이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봐. 눈을 봐봐.”

 

세일의 몸이 고개를 들고 눈물로 흐릿해진 눈으로 박 노인을 바라본다.

 

박 노인의 눈이 세일을 마주 바라본다.

 

그 눈빛에 실린 이해와 경악의 빛이 세일을 두렵게 한다.

 

“자네..”

 

‘날 보셨어.. 알고 계신 거야..’

 

박 노인이 고개를 내젓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해의 위치를 가늠해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다음 마을로 간다. 꿈꾸는 자가 완전히 깨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마쳐야 해.”

 

세일의 몸의 주인이 느끼는 비통과 분노가 세일에게도 전해진다.

 

자신의 손으로 숨을 끊은 아이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부짖던 남자가 고성을 지르며 박 노인에게 달려든다.

 

머뭇거림도 놀라움도 없는 박 노인의 시선이 남자의 몸에 닿자 옷자락 끝에서부터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울부짖던 남자는 재가 되어 사라진다.

 

“부족이, 가족들이 자네들을 위해 모든 걸 내어주고 자네들이 밤낮으로 해와 달을 바라보며 숨죽여 기다렸던 이유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네! 우리는 문명의 반석이자 파수꾼이다! 머뭇거림 없이 나아가서 해야만 일을 하도록 해!”

 

소리를 높이지 않고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였지만 모두에게 뜻을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얼마 전의 서울 정부 종합 청사에서 모두를 압도하던 박 노인의 연설이 떠오른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야.. 다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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