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1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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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한껏 들떠 오른 세일의 기분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해가 뜨자 잠과 함께 익숙한 꿈의 대화가 이어진다.

 

밤의 어둠을 몰아낸 햇볕도 꿈속의 대화가 세일의 머릿속 어두운 영역 깊숙한 곳에 또아리를 트는걸 막을 수는 없다.

 

꿈속에서는 두려움과 슬픔에 몸서리를 칠지라도 세일이 깨어나는 순간 곧바로 잊혀질 대화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자 세일은 휴대 전화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선영으로부터의 연락은 없다. 몇 번이나 먼저 메시지를 보내 보려 시도해도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며칠만 더 있어 보다가 연락하자. 너무 바로 연락하면 부담스러워 하실 거 아냐?’

 

자존심 인지, 두려움 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세일의 열망을 억누른다.

 

시계에 대해 답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세일은 또다시 출근 시간을 한참 앞당겨 출근한다.

 

어쩌면 박 노인과의 말수 없는 대화의 순간을 즐기고 싶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세일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박 노인이 또다시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한다.

 

세일의 손목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시계와는 또 다른 모양새의 물건이다.

 

“오늘도 일찍 왔군..”

“네. 저기.. 그때 시계 선물해주신 거 감사하다는 말 안 했던 게 생각나서요..”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것이니 자네가 감사할 필요는 없네.”

 

어떤 감정도 읽어내기 힘든 건조한 박 노인의 말투에 세일은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시려 왔다.

 

“.. 그래도 감사합니다.”

 

알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박 노인의 뜨개바늘을 잡은 손이 다시 바삐 움직인다.

 

“저..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보게.”

“그때 영감님이랑 같이 국무회의에 타고 간 차 말입니다. 그런 거를 사고 싶은데 제가 전혀 알지를 못해서요..”

 

박 노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제법 많은 시간을 박 노인과 함께한 세일에겐 너무나도 명확한 감정 표현이다.

 

“그런 귀한 물건이 돈이 있어 사고 싶다고 쉽게 구해지지는 않지..”

“..아.. 꼭 그 차 아니더라도 비슷한 차면 상관없는데요. 영감님이 잘 아실 거 같아서 조언 좀 구하려고요..”

 

또다시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박 노인의 손길이 멈춘다.

 

“자네 수동 차량 운전 할 줄 안다고 했나?”

“네? 아.. 면허 딸 때 운전해보긴 했습니다.”

“요번 주말에 선약이 있나?”

 

선영과 명확하게 정해놓은 일정은 없지만, 시간을 비워두어야 할 것만 같다.

 

“요번 주말은 선약 있습니다.”

 

박 노인이 고개를 들어 세일을 유심히 바라본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박 노인의 눈빛이 세일을 찌르듯 날카롭다.

 

‘나를 탐색하고 계신거야.. 선영씨를.. 영감님이 알게되면..’

 

세일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망상을 애써 억눌렀다.

 

“그럼 다음 주말 중 하루 정해서 몇 시간만 나 좀 보도록 하게.”

 

‘박 영감님도 단골 자동차 매장 가지고 계시나 보네..’

 

이 노인의 선례를 떠올려 보아도 쉽게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네… 어르신 오후 근무 서시니 그럼 제가 토요일 오전에..”

“아니. 토요일 밤이 좋겠군. 밤 11시에 사무실에서 보도록 하지.”

 

차를 사러 가기에는 부적절한 시간이다.

 

하지만 아무리 친숙해졌다 해도 박 노인의 지시를 거스르고 의문을 제기하기란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네. 그럼 다음 주 토요일 밤..”

“그리고 수요일 자네와 김 형 근무 시간에 김씨가 시설 점검차 방문할걸세.”

 

‘그 분에 대해서 이전에 김 영감님이 말했었는데..’

 

“그럼 제가 뭘 해야 하나요?”

“.. 김 씨의 일이니 자네가 딱히 신경 쓸 건 아니지..”

 

김 노인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질문을 억누를 수가 없다.

 

“저.. 김 영감님 말로는 그.. 김씨라는 분이 .. 지하실에서 안 좋은 일 있어서 휴직 하셨다고.. 박 영감님 때문에..”

“.. 김 형은 늘 현상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제가 여쭤봐도 될까요?”

 

머릿속 깊숙한 곳에 또아리를 튼 목소리가 부추기라도 한 듯 알 수 없는 열망이 세일을 몰고 간다.

 

“.. 우선 김 형에게 물어보도록 하게. 똑같은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이들이 있다면 양자의 말을 모두 들어봐야겠지.”

 

박 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단호한 표정에 압도되어 세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때맞추어 사무실 문을 열고 출근한 김 노인에 의해 둘의 대화는 끊어졌다.

 

김 노인의 코 고는 소리와 손목에 찬 시계의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를 배경으로 근무시간은 흘러 지나갔다.

 

퇴근길에 차에 올라타 휴대전화를 확인해 보았지만, 선영으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세일은 초조함과 원망이 뒤섞인 감정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해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