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카드

  • 장르: 기타, 일반
  • 분량: 15매
  • 소개: 지구 최후의 날 나와 아내에게 일어난 일 더보기

녹색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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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3일 후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녹색 카드가 있는 사람만이 승선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식탁 구석에 놓인 녹색 카드를 말없이 응시했다. 며칠 전에 관계자라는 사람이 방문하여 주고 간 것이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카드는 처음 자리에 계속 놓여 있었다. 섣불리 손댈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녹색 카드는 일반 신용카드와 비슷해 보였다. 선명하고 싱그러운 초록색의 바탕.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작은 플라스틱 조각 같기도 했다. 아내와 나는 카드를 바라보며 밥을 깨작거렸다. 저 녹색 카드를 받고부터 도통 입맛이 없었다. 아마 영원히 입맛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아내는 작게 한숨을 쉬며 나를 슬쩍 보더니 다시 카드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마음속에 일고 있을 풍랑을 이해하기에 그 눈빛을 모른 척했다.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녹색 카드는 한 장뿐이었다. 녹색 카드를 받은 날 이후로 우리는 말을 잃었다. 차라리 카드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아내와 나는 홀가분하게 최후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로하며 조용히 죽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처럼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최악을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겠지. 하지만 카드를 처음 받던 날, 나는 심하게 갈등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우리의 신뢰는 깨져버렸다. 다시 회복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에겐 시간도 기회도 그리 많지 않았다.

 

카드를 받고 난 후 아내는 직장에 출근하지 않았다. 아파서 며칠 쉬겠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은 직장 동료는 해맑은 목소리로 상사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그 밝은 목소리가 차라리 부러웠다. 미래를 아는 것이 이렇게 독이 될 줄이야. 아내는 주방에서, 나는 작업실에 처박혀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작업실에 쌓인 것들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손을 놀리다 보면 금세 해가 저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음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아내에게 양보해야겠다 싶다가도 금세 그럴 수 없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 다음은 죄책감이 찾아들었다. 고민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다가 늘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끔 잠이 들면 악몽을 꿨다. 아내가 나를 죽이고 카드를 차지하거나, 혹은 내가 아내를 죽이는 꿈들.

 

만일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나는 기꺼이 그녀에게 카드를 양보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복권 당첨금이 들은 통장의 체크카드 정도였더라면……. 아내는 좋은 여자였다. 불법을 일삼는 나의 재능을 높이 사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내를 깊이 사랑했고, 결혼을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녹색 카드는 고민의 스케일을 바꿔놓았다. 아내를 죽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내가 죽는 것도 싫었다. 결국 잔인한 선택만이 남았다. 그 시간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 거기 물 좀.”

 

아내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나는 말없이 물을 건넸다. 식사를 마친 아내는 식기를 개수대에 갖다 놓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반찬 그릇들을 우두커니 보다가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작업실로 들어오니 관 속처럼 고요했다. 다른 집에도 녹색 카드가 전해졌을까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