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의 말
이세계어 번역은 『연중무휴 던전: 던전의 12가지 모습』 이후로 몇 년 만의 일이다. 그사이 제7시대 연구에 매달렸는데 문헌 검토 과정에서 작자 미상의 흥미로운 저술을 발견했다. 짧게나마 번역본을 공개할 기회를 얻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제7시대 19년에 개미굴처럼 길이 얽힌 동굴 안에서 각자의 마왕을 옹립한 세력들이 다자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를 복합 던전의 시작으로 본다.
당시에는 다수 던전이 단일 출입구를 공유했을 뿐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복합 던전의 양상이 다양해졌다. 나중에 가서는 출입구도 마왕도 공유하지 않는 지역 내 느슨하게 연결된 던전 안보 연합체를 복합 던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기기까지 했다.
이러한 흐름은 필연적으로 모험가의 탐사 기간을 장기화하고 탐사대 규모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모험에 요구되는 식량과 도구도 양적 증가를 겪었다. 몇몇 모험가가 군의 병참 개념을 던전에 적용하고자 했으나 이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나마 발전을 겪은 분야는 마법을 활용한 단방향 송신이었다.
지금에야 전송 마법을 통한 물류가 도입되었지만 당시에는 제한적인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모험가들은 깊숙한 던전 안에서 물자가 고갈되면 주문서를 활용해 보급품을 주문했다. 그러면 중립 세력의 표식을 붙인 배달부가 주문표를 받아 출발했다.
그렇기에 제6시대 말, 제7시대 초를 던전 딜리버리의 태동기로도 본다. 이때 탐사의 장기화 경향과 불확실성에 적응하지 못한 모험가들이 배달업 종사자로 전직하기도 했다.
이어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 시기 배달업에 뛰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교차 검증할 수 있는 다른 저술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 유명한 이야기는 아님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던전 딜리버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할 만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저술이 취재를 바탕으로 쓰였는지 아니면 단순 상상에서 비롯했는지 알 길이 없다는 데 있다. 실제 사건을 옮겼다고 보기에는 허무맹랑한 지점이 다소 있고, 지어낸 이야기로 읽기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구석이 많다.
여하간 번역 과정을 지원해 준 이계청에 감사 인사를 전한다. 개정된 「한-이 고유명사 번역 지침」을 열람하지 못했더라면 이번 번역은 불가능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번역본에서 부족함을 느꼈다면 분명 말을 옮기는 실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앞선 말이 쓸 데 없이 길었다. 이세계 서적에 보내주시는 관심에 늘 감사드리며, 이어지는 이야기가 부디 즐거운 경험이 되길 바란다.
유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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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슬라임이 길 위에 나타나면 잠시 멈추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희뿌연 의식 가장자리로 말이 맴돌았다.
종유석 끄트머리 맺혔던 물방울이 뺨에 떨어졌다. 또 한 번 툭, 그리고 배달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는 울퉁불퉁한 사이 물이 고인 동굴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기름 먹인 횃불이 틱, 틱 소리를 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배달부는 몸 곳곳 쓸린 상처에 신음을 흘렸다. 빛이 들지 않아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배달부는 머릿속이 희미했다.
기어오를 엄두가 나지 않게 가파른 비탈 옆에 어깨 끈이 끊긴 짐 가방이 있었다. 횃대를 잡은 배달부가 머리 위로 불을 비추어 기억을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