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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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에 정부청사역 1번 출구 앞 무가지들을 챙기며 세일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날 따라 다니고 있는 거 같았는데..’

 

세일의 기대와 달리 항공 점퍼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과 무슨 상관 있는 거 아닌가?’

 

이 노인의 벤츠가 내는 요란한 엔진 소리에 세일의 상념은 깨어졌다.

 

조수석 쪽 창문이 내려오는 걸 보고 세일은 손에 챙겨 든 무가지 뭉치를 흔들었다.

 

“역시 똘똘한데? 제일 중요한 것도 하루 만에 배웠으니 이제 혼자 근무서도 되겠어?”

 

노인의 농담에 세일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런데 사실이잖아? 사실 그 정도 일이라면 초등학생도 쉽게 할 수 있겠다. 어차피 배운 거 써먹을 일도 없을 거라 하셨고..’

 

“어제는 잘 쉬었어? 첫 출근이라 되게 피곤했지?”

 

3시에 퇴근해 집에 들어가니 아직 5시도 채 안 된 시간이었다. 그동안 몇 건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세일로써는 남아도는 여유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지경이었다.

 

“일단 주중에 바짝 열심히 일 배워보자고. 어제 말했듯이 내가 박형한테 이야기해서 세일군 일 배울 동안은 주말에 쉬게 해줄테니..”

“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더 열심히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세일은 의욕을 담아 대답했다.

 

단호하게 거절당할 거라는 세일의 예상과 달리 박 노인은 순순히 휴식을 허락했다.

 

“요새는 주5일 근무라고 했나?”

“아.. 아닙니다. 저 어머니 병실 찾아가고 개인 용무 처리할 시간만 하루 정도 주셔도 충분합니다.”

“어차피 3시면 끝나는 직장인데 평일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을 왜 핑계로 삼나! 요새 규칙이 그렇다면 그걸 따라야지! 자네는 일 배울 때까지 토, 일요일 쉬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딱딱한 말투로 선언하듯 내뱉는 박 노인의 말에 고마움을 느끼며 세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젊은이들은 좀 여유도 가지고 해야지.”

 

이 노인이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막 퇴근하려는 박 노인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난로 옆 책상에서 의자를 빼고 다시 주저앉았다.

 

“자네 집이 인천 쪽이라 했지?”

“네”

“출근하는 데 몇 시간 걸리나?”

“정부청사역까지만 2시간 정도 걸립니다.”

 

박 노인은 혀를 내 찼다.

 

“차도 없다 했지?”

“네”

“근무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과천에 아파트 장만해서 이사 오도록 하게. 차도 당장 한대 사고. 언제까지 이 형한테 빌붙어 출퇴근할 수도 없잖은가?”

“아 이제 출근한 지 이틀째 되는 친구한테 뭘 그리 닦달을 해~”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시잖아.. 이제 갓 회사 입사한 내가 어떻게 아파트를 장만하고 차를 사.. 빛 갚는것도 벅찬데..’

 

세일은 기묘할 정도로 경제관념이 없어 보이는 노인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확실히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영감님 저도 그러고야 싶지만 제가 아직 첫 월급도 못 받았고 갚아야 할 빚도 많아서 이사나 차는 좀 무리일 거 같습니다.”

 

지금처럼 보증금 300에 월세 20만 원의 주거공간을 과천에서 구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걸 세일은 잘 알고 있었다.

 

박 노인은 세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고 보니 임 교수가 자네 어머니 병실 잘 챙겼다 했지?”

“네”

“이형 우리가 지금 국민안전처 소속인가?”

 

박 노인은 무언가 떠오른 듯 이 노인을 보며 말했다.

 

“그렇지 아마?”

“이세일군 사무실 출근한 거 그쪽에 통보 갔는가?”

“김형이 어제 오전에 연락해서 처리하겠다고 했는데 이제 하루 지나서 어떨는지 모르겠네?”

“자네 그때 내가 준 명함 잘 가지고 있지?”

 

박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세일을 보며 말했다.

 

“네”

“내일 아침 일찍 국민은행 과천지점 가서 월급 통장 만들고 대출받도록 하게. 은행 문 열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출받고 바로 차 한 대 뽑아 오도록 하게. 아파트 구하는 건 당장 힘드니 회사 퇴근 후나 주말에 열심히 집 알아보고.”

“저.. 영감님 그게.. 자동차를 어떻게 당일에 바로 뽑고. 아니 그보다 저 신용등급이 낮아서 대출도..”

 

말없이 눈을 쏘아 보는 박 영감의 기세에 질려 세일의 말꼬리가 흐려진다.

 

“당장 출퇴근만 해결하면 되니 근처 중고차 매장 가서 적당한 거로 당일 출고 받도록 하게. 자네가 원하는 차는 이 형 따라 벤츠 매장을 가든가 해서 천천히 사도록 하고. 그리고 우리 사무실 봐서 알겠지만, 서류 처리하고 무슨 전산에 등록하고 하려면 일일이 비번인 사람이 직접 찾아다니며 해야 해서 시간이 꽤 걸리네. 내일 아침까지 자네 우리 소속으로 등록 안 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이니 지점장 불러서 내 명함 보여주면 자네 어머니 병실 건처럼 대출 건도 잘 진행될걸세. 혹시라도 딴소리하면 나한테 전화하고.”

 

말을 마친 박 노인은 세일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이 노인은 세일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눈알을 굴리더니 시계로 시선을 옮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하잖아? 가뜩이나 하는 일도 너무 이상한데 갑자기 대출이니 뭐니..”

 

끊임 없이 내던지는 이 노인의 농담 섞인 말들이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