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퀼라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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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기 타는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나는 소매로 코를 막고 황동 테이블 주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꽈배기처럼 뒤틀린 숯덩어리의 수를 세어보았다. 열, 열하나, 열둘. 열세 번째 숯덩어리는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안고 앉아 있어서 한참 뒤에야 찾을 수 있었다.

주호는 맞은 편 왼쪽 벽 모서리에 박혀 있던 아홉 번째 숯덩어리였다. 김영천 회장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몸에 불이 붙자 방 안에 있던 영감들은 미친 것처럼 문을 향해 돌진했고 밖으로 잠긴, 정확히 말해 밖에서 용접된 자물쇠를 열거나 부수려 시도했다. 열세 명 중 여덟 명이 문 앞에서 죽었고, 배배 꼬인 채 뒤엉킨 숯 덩어리들의 신원을 맨눈으로 구별하는 것은 어려웠다.

아직도 벽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옛날 유행가가 나오고 있었다. “텔 미, 텔 미, 텔 미. 자꾸만 듣고 싶어, 계속 내게 말해 줘.” 끄고 싶었지만 최 팀장은 현장보존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설명해 줘.”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최 팀장이 말했다.

“저 늙은이들이 15살짜리 어린애와 바지 벗고 뭐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캐한 연기 너머로 보이는 건 벽과 창문뿐이었다. 동료 경찰들은 다들 눈치를 보며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이 알면 곤란한 거.”

내가 대답했다.

“영감들이 다 저런 취향이었던 거야?”

최 팀장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주호는 감응력자였어. 좋은 감응력자가 있는데 굳이 진짜 여자가 필요했을까.”

“15살 남자애에게 인간 포르노 짓을 시켰단 말이잖아. 너도 그걸 알고 있었고.”

“몰랐어. 그런 걸 나한테까지 알려줄 거 같아? 하지만 난 주호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아. 저 영감들이 어떤 인간들인지도 알고. 아무리 세상이 이상해도 1 더하기 1은 여전히 2야. 그렇지 않아?”

‘어떤 인간들.’ 그래, 나는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영감질하느라 끈적끈적 말라붙고 시들어 빠진 초라한 욕망 위에 우쭐거리는 15살 아이의 생명력을 들이붓고 싶었던 게 그렇게 탓할 일일까. 여전히 처량하고 수치스럽고 우스꽝스러웠지만 이미 숯 덩어리가 된 영감들을 욕할 생각은 안 들었다.

“넌 회장 일정을 몰랐다. 하지만 라스푸틴은 알고 있었단 말이네? 회사에 스파이가 있었을까?”

최 팀장이 말을 이었다.

“그럴지도. 아니면 저 사람들 중 하나를 미행했던 건지도 모르고. 그건 경찰이 알아내야지.”

“텔레파시 같은 걸로 알아냈을 수도 있어?”

“정신감응이 영화 속에서 나오는 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잖아. 라스푸틴에게 그 정도 수준의 감응력자가 있을 리가 없어. 우리도 없는데. 그냥 다른 데를 알아봐.”

그들은 이미 복도 끝에 와 있었다. 최 팀장이 문을 열자 누런 저녁 햇빛이 문틈으로 기어들어왔다. 나는 눈을 껌뻑이며 밖으로 나와 참사가 벌어진 빌딩을 돌아보았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부서진 유리창과 그을린 벽만 봐도 라스푸틴과 부하들이 어떤 경로를 따라 들어왔다가 나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라스푸틴까지 포함해서 아홉 명이었었어.”

최 팀장이 패드를 내밀어 CCTV가 찍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라스푸틴이 이렇게 대놓고 대규모로 움직인 적은 없었어. 그것도 이런 대낮에. K-포스와 아미쿠스의 임원 12명을 한꺼번에 날려버렸으니 해볼 만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비정상적이야. 라스푸틴에게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 아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제스처는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도, 나도 모른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의미 같은 건 없었다. 나는 피곤했고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지난 닷새 동안 잠 잔 시간을 다 합쳐도 한 시간이 못 됐다. 약이 뇌를 속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검정색 밴 다섯 대가 도착했다. 모두 K-포스 것이었다. 아미쿠스 팀은 원효대교에서 길이 막혔다고 했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베타 보안요원들이 우르르 기어 나와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차에 박힌 로고를 보고 몰려든 사람들은 실망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들이 기다렸던 알파들은 당연히 없었다.

보안요원들과 함께 내린 회사 직원이 준 카페인 강화 음료를 억지로 들이켜며 뉴스를 검색했다. 김영천이 여의도 한식집에서 불에 타 죽었다는 소식은 이미 전 세계를 돌고 있었다. 인공지능이 작성한 게 빤한 부고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김영천의 못생긴 얼굴보다 더 인기 있는 건 그보다 더 못생긴 라스푸틴의 사진이었다. 코끼리 가죽을 뒤집어 쓴 거 같은 회백색 대머리 괴물. 대부분 1년 전 CCTV에 찍힌 것이었다. 글로우의 지나가 지난여름 안산 대전투에서 얼굴에 낸 대각선의 상처는 어느 사진에도 없었다.

뉴스들을 훑다가 인터넷 토론 프로그램과 마주쳤다. 화면을 모자이크 모양으로 채운 여섯 개의 얼굴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라스푸틴 음모론은 격파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왼쪽 중앙 화면의 턱수염을 기른 인도 남자가 카메라에 침을 튀기며 말하고 있었다.

“대치동 백발마녀의 자폭 이후 관심을 끌 만한 빅 배드가 없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3대 회사가 작당해서 라스푸틴을 빅 배드로 키웠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빅 배드를 키우는 게 회사 임원들을 불태워 죽여도 될 정도로 중요했단 말입니까?”

오른쪽 밑에 있는 불어 억양의 흑인 남자가 심드렁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통제에서 벗어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빅 배드가 어디로 튈지 누가 압니까?”

“남한 격리가 20년이 넘어갑니다. 그 사람들은 20년간의 노하우가 있어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정도는 안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괴물들을 시청률 높이겠다고 일부러 풀어요? 지난 1달 동안 라스푸틴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잊었습니까? 고아원과 학교를 불 질렀어요! 애들이 죽었어요! 그게 저 나라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인지 모릅니까?”

“그렇다면 지난 반 년 동안 아퀼라가 라스푸틴과 붙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저번 리더가 죽은 건 핑계가 안 돼요. 그게 언제 일인데. 그리고 지금까지 라스푸틴과 붙은 K-포스 팀은 그 공기놀이하는 여자애들밖에 없어요!”

토론은 나머지 다섯 명이 내는 “우우우!”하는 야유 소리로 잠시 중단되었다. 글로우를 모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의 주장은 부당했다. 빅 배드 양성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글로우와 라스푸틴과 막판에 맞붙은 안산 대전투는 세 회사의 자원이 총동원된 엄청난 전쟁이었고 우리가 그에게 바란 건 신속한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라스푸틴은 죽지 않았다. 바로 그래서 그의 별명이 라스푸틴이었다. 그는 러시아인도 아니었고 팔뚝만 한 물건을 다리 사이에 달고 있지도 않았다. 오로지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았기 때문에 라스푸틴이었다.

그런 괴물이 지금 서울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최 팀장이 다가와 내 멍한 눈앞에 손을 휘저었다.

“회사와 대충 입을 맞췄어. 죽은 생도 이야기는 기자 회견 전까지 묻어둘 거야.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그 동안 나머지 이야기를 만들어 둬. 재료가 없지는 않아.”

“어떤 거?”

“라스푸틴이 그 애만은 봐줬어. 영감들은 불태워 죽였지만 애만은 불 지르기 전에 척추를 부숴놨어. 거의 안락사였어. 부하 짓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야기 재료는 되지?”

“그럴 거야. 고마워. 부탁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시간 나면 글로우 소미 사인이나 받아줘. 남편이 갖고 싶대.”

2

상암동 K-포스 본사 건물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훈련복을 입은 생도들이 웅성거리며 로비와 복도로 몰려나와 뉴스와 소문을 교환하고 있었고 데스크의 직원들은 넋이 나가 있었다. 건물을 둘러싼 기자들에게 전기방패를 휘둘러대는 보안요원들은 모두 살짝 미친 거 같았다.

나는 회사 안 상급 그림자들이 모여 있는 12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회의는 절반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나는 차 안에서 최 팀장한테서 받은 정보를 전달했고 이야기 아이디어 서넛을 내놓았다. 글로우 팬픽 작가 출신인 박인희가 회의 중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서 그럴싸한 이야기를 하나 만들었다.

아이디어 대부분은 주호가 영감들만 모인 식당 안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설명하는 데에 할애되었다.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박인희는 이미 마무리한 이야기를 다듬고 있었고 다섯 명의 작가들이 조금씩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터질 소문이었으니 우리가 직접 선수 치는 것이 나았다.

“이제 아퀼라와 라스푸틴을 대결시킬 때가 됐어.”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말했다.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어. 보스가 죽었고 주호도 죽었으니 더 이상 핑계도 없어. 멤버들도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거고.”

“이번에도 글로우를 대신 보내면 안 되나? 해외 인지도는 글로우가 더 높은데?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을걸.”

은근슬쩍 보스 의자를 차지하고 앉은 김세훈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지만 목소리엔 슬픔이나 충격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시간 전에 아버지가 환각 파티에서 불타 죽은 건 그냥 까다로운 회사 문제에 불과하다는 투였다. 일그러진 얼굴도 그냥 예의차림 같았다. 하긴 가짜 감정을 억지로 연기하느니 거기에서 멈추는 게 나았다. 그는 형편없는 배우였다.

“전투에는 글로우, 스튁스, 오리온 기타 등등 다 보내야지. 준비된 생도들이 있으면 걔들도 다 보내고. 하지만 마지막 결전에는 아퀼라가 나서야 해. 그래야 지금까지 아퀼라가 라스푸틴과 싸우지 않은 게 설명이 돼. 이번 사건으로 라스푸틴은 이제 서울 최대 빅 배드가 됐어. 계속 피하면 있으면 그림이 이상해져.”

“라스푸틴 정도는 우리도 해치울 수 있어, 언니.”

글로우 그림자의 리더인 안수진이 툴툴거렸다.

“알아. 저번 여름 때도 잘했어. 하지만 결국 놓쳤잖아. 캔디 공격은 접근전엔 한계가 있어.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접근전이야. 복수전이라는 걸 잊지 마. 아티쿠스와는 달리 우린 보스를 잃었어. 회사를 대표하고 접근전이 특기이고 보스와 가장 친밀한 팀이 나서야지. 아퀼라엔 고요가 있어. 글로우도 접근전이 가능하겠지만 그럴 경우 라스푸틴을 마지막에 상대하게 되는 게 누구지? 미라솔이야. 미라솔이 보스의 복수를 하는 그림을 상상할 수 있겠어?”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다른 그림자들을 설득하는 데에 30분 이상 더 걸렸다. 졸음과 카페인 모두와 맞서 싸우느라 머리가 제대로 돌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아퀼라 그림자의 리더라는 사실이 설득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진은 내가 글로우를 만들었기 때문에 멤버들을 과보호한다고 따졌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의견이 받아들여지자 나는 허겁지겁 회의실에서 달아났다. 복도 천장에 걸린 모니터에서는 기자 회견 생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한자경 부대표는 주호가 식당에서 늙은이들을 구하기 위해 혼자 어떻게 싸웠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몇 명이나 믿을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성공으로 잡은 하한선은 30퍼센트였다.

한자경 뒤로 고요, 미라솔, 산주, 수연의 얼굴이 보였다. 배경 그림 만들려고 시간에 맞추어 회사로 불러들일 수 있는 알파들을 모두 끌어온 것이다. 고요는 엉엉 울고 있었고 미라솔은 슬픔이 살짝 깔린 무표정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고 있었다. 카메라는 대부분 미라솔을 잡았다. 통제되지 않은 진짜 감정보다 완벽하게 연기된 처연함이 더 그림이 좋았다.

사람들은 미라솔 그린-최가 얼마나 김영천을 증오하는지 모른다. 그건 김영천도 몰랐다. 그가 한 일이라곤 싹수가 보이는 알파를 아미쿠스나 HJS가 건드리기 전에 K-포스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에겐 일상 업무였다. 하지만 부모 잃고 낯선 땅에 감금되어 괴물로 키워진 아이에게 넓은 아량 같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내가 글로우 팀을 짤 때 미라솔을 가장 먼저 염두에 두었던 것도 예의바른 미소 속 증오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미라솔을 중앙에 넣고 나니 팀에 넣어야 할 나머지 아이들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특성화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부적응자 생도들을 모아 회사를 대표하는 A급 팀을 만드는 것.

그것은 김영천에 대한 나의 작은 복수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도약자, 방어자, 발화자 등 역할 분담이 뚜렷하고 건강한 이미지의 아퀼라가 K-포스의 양이고, 애교 없고 삐딱한 태도에 능력도 정체불명인 글로우는 음이라고 했다. 그건 아직도 음양 어쩌구가 이 나라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서양애들의 생각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면실이 있는 7층 복도에서 지나와 마주쳤다. 공식 행사에서 다녀왔는지 베이지색 더플코트의 벌어진 틈 사이로 회사에서 지정해 준 가짜 교복 세트의 네이비 블레이저와 벨크로 패드에 고정된 보라색 가짜 스트링 타이가 슬쩍 보였다. 머릿속에 도는 온갖 감정들이 조금씩 드러난 하트 모양 얼굴은 오묘하게 무표정해 보였다. 한동안 우리는 우두커니 서서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정말 주호가 죽었어요?”

지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응.”

“같이 간 베타들은 어떻게 됐고?”

“다들 많이 다쳤지만 죽은 사람은 없어. 아미쿠스 쪽 사람 한 명은 전신화상을 심하게 입었다는데 살 수는 있을 거래.”

“그래도 주호를 죽인 거잖아요.”

“맞아. 라스푸틴이 주호를 죽였어.”

몇 시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직접 말하고 나니 이상했다. 지금 라스푸틴은 무슨 일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호를 죽이다니. 그건 그냥 초현실적이었다.

지나는 지금까지 코트 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연습용 고무공을 꺼내 집어던졌다. 공은 휘청거리는 곡선을 그리며 튕겨 다니다가 다시 지나의 왼손 안으로 들어왔다. 공은 손과 함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고 지나는 말을 이었다.

“수진 언니가 접근전에 대비하라고 문자를 보냈어요. 그 말이 맞아요. 주호를 죽였다면 아퀼라를 작정하고 도발하는 거잖아요. 함정이에요.”

“아니면 함정이라고 생각하게 하거나. 어느 쪽이건 사정은 달라지지 않아. 어차피 세 회사가 모두 나서야 하는 전쟁이야. 누가 선두에 서건 큰 차이는 없어. 잊지 마. 어느 전쟁이건 3분의 2는 그림자 몫이야.”

지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선두에 서서 죽고 다치는 건 여전히 우리예요. 벌써 잊었어요?”

3

김영천을 처음 만난 날은 19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대구 지하철 4호선 공사 중 지하에 묻혀 있던 프로스페로 생태계가 발견된 지 376일째, 이후 발생한 적사병으로 제주도와 몇몇 섬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영토가 전 세계로부터 격리된 지 362일째, 살아남은 보균자들 중 첫 번째 알파가 발견된 지 353일째 되던 날이었다.

남한 인구의 3분의 1이 진홍색 반점으로 물든 채 피를 토하며 죽었고, 고삐 풀린 알파들이 대통령을 포함한 선출직 공무원과 언론인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바람에 민주주의는 붕괴된 지 오래였다.

서초 경찰서 안의 창 없는 방이었다. 노약자석에 뿌리를 박고 불타버린 늙은 남자 시체 둘, 성경책을 쥐고 문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늙은 여자 하나, 온 몸의 뼈가 부러진 채 비명을 지르고 있던 세 알파들 사이에서 기절해 있던 나를 승객 하나가 연기가 가득 찬 객차에서 끄집어냈고 양재역으로 달려온 경찰들이 나를 거기로 데려왔다.

방 안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지만 소화불량 때문에 속이 안 좋았고 현기증이 났다. 알파가 된 지 석 달 가까이 되었지만 내 소화기관은 아직도 내 몸에 성인남자의 3배에서 7배 사이의 열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나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못생긴 중년남자의 시선을 피하면서 그가 내민 단맛 줄인 고칼로리 주스를 억지로 마셨다. 연예계 가십에 관심이 없던 나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경찰서에 있으니 그냥 형사려니 했다.

“사람을 죽여본 적 있니?”

그것이 김영천 회장이 나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해도 됐다. 알파들은 치외법권 지대에 있었다. 죽였다고 한들, 시체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고 자랑한들, 어떻게 입증하고 처벌하겠는가.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서울 시내는 길 가던 노인들의 목을 자르고 불을 지르는 살인중독자 알파들로 부글거렸지만 난 살인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남부터미널역과 양재역 사이를 질주하던 수도권 3호선 지하철 객차 안에서 윤리체계에 따라 행동했던 건 내가 아니라 노약자석에 앉은 영감들을 불 질렀던 망나니들이었다.

“늙은이들을 죽여라.”

이것은 우후죽순처럼 튀어나오는 알파 살인중독자들의 윤리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처음에 노인은 그냥 쉬운 표적이었다. 하지만 살인이 반복되자 노인살해는 순식간에 “죽이려면 기왕이면 늙은이를 죽여라”라는 의미가 되었고 그것은 곧 “늙은이들은 죽여도 좋다”를 거쳐 “늙은이들을 죽여라”로 변형되었다.

여전히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것은 같았지만 이제 그것들은 암묵적인 윤리체계에 따라 용납되었고 지지되었다.

나의 행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윤리 따위와 아무 상관없었다. 앞 칸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불타는 사람 몸에서 나는 역겨운 연기가 흘러들어왔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드디어 내 힘을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알파가 되어 염력이 생기자, 나는 길거리로 나와 노인들을 죽이는 대신 힘을 최대한 정교하게 쓰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를 통해 스스로를 훈련시켰다. 염력은 피아노 선율과 같았다. 그냥 건반을 주먹으로 내리쳐 큰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음악을 연주할 수 있어야만 했다.

영감들을 불 지르던 망나니들은 내가 쇼팽을 연주하길 기다리는 피아노 건반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런 부류의 인간들은 내가 알아서 피했겠지만 그 때는 달랐다. 두 명은 쉽게 해치울 수 있었고 세 명도 넉넉하게 가능했다. 등 뒤에서 성경을 벽돌처럼 휘두르며 시편 23편을 암송하던 할머니의 방해가 없었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그들을 죽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죄의식 때문이 아니었다. 산 채로 온 몸의 뼈를 부러뜨리고 근육을 찢고 내장을 매듭지어 무력화시키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고 그렇기 때문에 더 재미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계산하지 못했던 것은 에너지 소모량이었다. 세 번째 녀석을 쓰러뜨리고 정신을 잃어갈 때 난 많이 창피했다.

“아뇨.”

내가 대답했다.

“네 말을 믿어.”

김영천이 대답했다. 잠시 주스 팩을 쥐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기게스의 반지에 대해 알고 있니?”

헛웃음이 나왔다. 만화책으로 그리스 신화 배운 세대 티를 내시나? 난 대답하지 않았고 그 침묵을 “아뇨”로 읽은 그는 말을 이었다.

“기게스는 전설에 나오는 리디아의 목동이야. 우연히 투명인간이 되는 반지를 주워서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지……”

“플라톤이 『국가』에서 그 이야기를 했지요. 만약 사람들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 거냐면서요.”

“맞아. 경찰은 속수무책이야. 무력으로 막을 수도 없고 체포한다고 해도 처벌할 수 없어. 이 나라는 지옥이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는 미소를 지었다.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비슷한 상황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었음이 분명한 그런 미소.

“아저씨가 막나요?”

“아니, 너희들이 막아. 아까 같은 상황에서도 불쌍한 할머니를 도와주러 나서는 너 같은 알파들이. 알파들이 무너뜨린 사법체계의 빈틈을 다른 알파들이 채우는 거지. 아무런 능력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그냥 뒤에서 지원이나 해 주고.”

마지막 말은 반쯤 농담이었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고 그는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가 1년 전에 붕괴되어버린 한국 연예계의 큰손이라는 걸 몰랐고, 그는 내가 그 정도로 무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김영천의 계획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가 방을 나가기 직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찾아왔냐고 내가 순진하게 물었을 때였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CCTV에 걸린 알파들 중 네가 가장 예뻤어.”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