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장면

  • 장르: 일반
  • 분량: 90매
  • 소개: 아직도 난 자꾸만 뭔가를 놓치고 흘러가는 것들을 흘러가는 대로 두는 그런 사람이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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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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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좀 떨어지나 싶더니 급기야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던 난 다급히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눈에 들어온 거라곤 그곳뿐이었다. 옷이 비에 폭삭 젖어 몸이 무거웠다. 거센 빗줄기가 부스의 천장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난 쪼그려 앉았다. 나란히 두 개가 붙어있던 공중전화 부스의 옆 칸에는 누군가가 수화기를 붙든 채 기대어 서 있었다. 모두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세상에 공중전화까지 와서 할 통화가 뭔가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빗소리에 가려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기에 난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옆 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얼른 사라졌으면 했다. 이대로 날 보지 못한 채로 지나쳐가길, 그리고 이곳에 혼자 남겨지길 빌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을 것 같았다. 비에 젖은 지면을 디디는 발걸음 소리가 내 앞을 지나치나 싶더니 이내 멈추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심코 올려다보았다. 전소연, 그곳엔 네가 있었다.

 

“이재경?”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도 난 널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설마 그게 너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검은 우산 아래 짧은 머리를 단정히 정리한 너. 몇 년이 지났어도 네 올곧은 눈매는 그대로였다. 그제야 네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전소연.”

 

내 이름을 나지막이 말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본격적으로 차오르기 시작했고 참을 순 없었다. 이런 날, 이런 곳에서 너를 만난 것 때문에 난 단숨에 약해졌다. 약해졌기에 무너졌고,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야만 했다.

 

 

 
*
 

 

 

십 년 전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언제나 네가 함께 따라왔다. 2학년 가을, 지방에서 전학을 온 첫날부터 난 내가 그곳에 그다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반 사립고등학교였음에도 어째선지 예체능 전공의 학생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중 내가 속했던 교실만이 예체능을 전공하지 않는 일반 학생들이 모인 곳이었다. 같은 교실의 아이들 모두 상당히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곳에서 난 눈에 띌 정도로 평범했고 초라했다. 딱히 내세울 것 없었던 난 쉽게 반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했다. 그건 단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의 반이 넘어간 어정쩡한 시기에 불쑥 전학을 온 나와는 달리 전공 별로 반을 구성하는 학교 특성상 대체로 입학부터 함께해왔던 그들에겐 내가 끼어들 수 없는 강한 연대가 있었다. 그건 일종의 전우애와도 같은 것이라 나는 느꼈는데, 그들이 마치 전쟁터에 내던져진 병사들처럼 부단히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부모님이 이사까지 해 가며 그다지 공부에 의욕을 느껴본 적 없던 나를 데리고 이곳으로 전학시키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만 부모님은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날 고립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과 어울리려 노력해봐도 교문을 나서는 순간이 되면 나와 그 아이들 사이에 놓인 투명한 벽을 느끼곤 했다. 그들이 큰길 너머의 아파트 단지로 하나가 되어 사라지면 난 학교 뒤쪽 골목을 지나면 나오는 주택가로 혼자 힘없이 걸어와야 했다. 어찌해도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를 괴롭혔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날 소외시키는 나쁜 아이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들이 어쩔 수 없는 하나의 맥락이고,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나니 내가 느끼는 외로움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한결 편해졌다.

 

 

 

더는 반 아이들과 나 사이의 관계에 연연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난 누구보다도 느긋이 교실을 지키다 학교를 나섰고, 종종 학교 도서실의 책장 사이를 서성이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아이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는 사실을 의식해야만 했고, 그건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것이라 가능하면 아무도 없는 시간에 집으로 향하고 싶었다.

 

그날은 중간고사가 끝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날이었다. 어김없이 교내에 남아있던 난 우연히 너의 연주를 들었다. 소리에 이끌려 도착한 곳에서 널 발견했다. 방음 처리가 잘되지 않는 음악실 안에서 넌 턱에 바이올린을 괴곤 신중하게 현을 그어 나갔다. 차분하고도 깊었던 네 연주에 뭔가에 홀린 듯 널 지켜보았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연주가 고조되려나 싶더니 돌연 연주를 멈추곤 다시 처음부터 연주해나갔다. 그런 네 모습을 음악실의 작은 창문 너머로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몇 번이고 연주를 멈추고 처음으로 돌아가고를 반복하던 넌 마치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고, 난 기억한다.

 

그날을 시작으로 난 네 연주를 듣기 위해 몰래 음악실 앞에 쪼그려 앉아있곤 했다.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연습에 집중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바이올린을 손에 쥔 채로 멍하니 악보를 바라보는 날도 있었다. 네 연주를 듣지 못하는 날도 많아 애가 타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게 네 음악의 일부라는 생각으로 널 응원하려 했다. 그랬기에 네가 바이올린 전공을 관두고 우리 반으로 왔을 땐 반가운 마음보단 서운한 마음이 더 컸다.

 

난 네가 나와 닮아있다고 느꼈다. 좀처럼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자신만의 단단한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먼저 섞이지 않으려 하는 네 모습을 보며 난 네가 차가운 사람일 거라 생각했고, 그건 네 연주를 몰래 들었던 그 날부터 내가 그렸던 너의 이미지와 같았다. 난 매일 네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때를 기대했다. 너와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했지만, 그 무렵의 난 스스로가 만든 뭔가에 묶여있었다. 주변 관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 것, 흘러가는 것들은 흘러가는 대로 둘 것. 이것은 내게 일종의 규칙으로써 작용하며 나를 외롭게 했지만, 동시에 나를 둘러싼 것들에게서 지나치게 상처받지 않게 해주기도 했다. 이런 규칙들은 전학 이후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예전엔 학년이 올라가면서 반이 바뀌는 게 싫었다. 그때까지 같은 반에서 사이가 좋았던 아이가 반이 바뀌고 나면 갑자기 서먹해지거나 멀어지곤 하는 일이 내겐 심각하게 다가왔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난 부단히 상처받아왔다.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는 것도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문득 깨달았다. 아무도,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게 요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전학 이후의 일들은 그저 내가 그런 규칙을 세우고 그 틀 안에서 안전할 수 있게 해준 계기에 불과했다. 그러니 내가 애써 마음을 숨긴 채로 너를 향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그때를 떠올리면, 난 그저 참아내고 있었던 것 같다. 너와 마주했던 날, 난 멍하니 네가 없는 음악실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텅 빈 그곳을 보며 딱히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진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건 단지 습관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그런 날 발견하곤 말을 걸어왔다.

 

“거기서 뭐 해?”

 

난 너무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숨어서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나쁜 행동을 한 건 아니었지만 부끄러울 만한 일이었다. 혹여나 이런 날 누가 볼까 봐 항상 누구보다도 늦게 교실을 나왔던 것이다. 너도 나처럼 최대한 교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일어서긴 했지만, 마지막에 교실 문을 닫고 나가는 건 어김없이 나였다. 그랬으니 난 네가 다른 아이들처럼 진작 학교를 떠났으리라 생각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곧 바이올린 반 애들이 올 거야.”

 

그러니 괜히 이상한 눈초리 받지 않으려면 가는 게 좋아. 네가 그때 내게 전달하고 싶었던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난 네 말을 곧바로 이해하기엔 아직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였다. 그러자 네가 날 잡아끌었다. 그제야 조금 차분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분명 그 무엇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난 내 손목을 가볍게 쥔 채로 앞서가는 너를 따라가면서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교문을 나서기 직전에 넌 잠시 멈추곤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을 슬쩍 풀었다. 그리곤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다물어진 네 입술에는 약간 힘이 들어가 있는 듯했다.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네 표정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이내 난 너의 시선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제 곧 가을 정기 연주회가 있을 거라 한동안 음악반 애들이 음악실을 사용할 거야. 그쪽 애들은 프라이드랄까, 암튼 그런 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 근처를 기웃거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넌 그렇게 말하며 나보다 다섯 발자국 정도 앞서 걸어갔다. 난 네가 분명 여타 아이들처럼 아파트 단지 방향으로 향하리라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넌 그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다 보니 난 졸지에 널 계속 따라가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그 순간 난 의미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네가 나와 반대편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우리가 수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난 티 나지 않은 정도로만 속도를 올려 너의 뒤가 아닌 옆에서 걸었다.

 

“넌 가을 연주회에 안 나가?”

 

그때 네게 던진 질문은 너에게 있어 무척이나 무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넌 그게 무슨 바보 같은 말이냐는 피식하고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당시의 내겐 어찌나 어른스러워 보이던지. 네가 속한 세계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 보였고 내 생각 따윈 그 안에선 아무 가치도 갖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감상으로 머릿속을 채우다 보니 난 결국 너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우리집 앞에 먼저 도착했고, 넌 조금 더 가야 한다고 했다. 네게 잘 가라고 인사하자 넌 말 없이 오른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보일 듯 말 듯 흔들어주었다. 날 등지고 걸어가는 네 뒷모습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가을의 선선하고 맑은 공기 때문이었을까, 난 불현듯 네가 굉장히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날부터 우린 누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인 양 나란히 하교했다. 여전히 넌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나 또한 그런 너를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 집 앞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 동안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 사이에 맴도는 단단한 침묵이야말로 뭔가를 증명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매일같이 우리집 앞에서 멀어지는 네 뒷모습을 바라볼 때면 난 희미한 불안에 발을 담갔다. 너와 내가 친구라고 믿는 것도, 너와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나뿐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서글퍼졌고 불쑥 숨어있던 외로움이 찾아오는 듯했다. 언젠가 너도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저 멀리고 흘러가 버리고 또다시 혼자 남을까 봐.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그런 날이 오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전까지 그래왔듯 감정을 눌러내려 해도 쉽진 않았다. 역시 혼자가 되는 걸 언젠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날도 우린 아무도 없는 교정을 지나 함께 걸었고 조금 추워진 날씨에 관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을 제외하곤 조용히 가을바람을 맞았다. 우리집 앞에 도착했고 난 어김없이 네게 안녕을 말했지만 넌 여느 때처럼 손을 흔들어주지 않았다. 가만히 날 바라보는 네 눈을, 그날의 난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괜찮아?”

 

네가 물었다. 그와 동시에 난 이런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응, 괜찮은데, 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네게서 봤던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말도, 동작도 생각처럼 할 수 없었다. 대신 눈물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웃는 표정을 위해 입꼬리를 올리려다 나도 모르게 쏟아지는 눈물을 막지 못한 내 표정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머릿속이 단숨에 엉망진창으로 꼬이는 느낌이었다.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이라도 막고 싶어 눈을 꼭 감아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때 괜찮냐는 너의 질문에 괜찮지 않다고 답했더라면 그 정도로 울진 않았을 것 같다.

 

넌 우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나를 데리고 근처의 자그만 놀이터로 갔다. 놀이터에 도착할 즈음엔 내 울음이 거의 그친 상태였고 우린 기다란 나무 벤치에 앉아 멍하니 앞을 응시한 채로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널 보았다.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넌 내 시선을 알아채곤 내 쪽을 돌아보았다.

 

“이젠 좀 진정이 돼?” 네 질문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젠 좀 괜찮아진 것 같아.”

 

“내 눈엔 지금도 괜찮지는 않아 보여.”

 

네 그 말에 난 가슴에 무거운 것이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내 감정의 중심을 관통하는 듯했던 네 한마디에 나 자신이 훌렁 뒤집힌 것 같았다. 난 네 눈을 들여다보았다. 너무도 반듯한 눈매, 흔들림 없이 정확히 나를 향하던 시선. 누구에게도 내 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네 눈을 본 순간, 너에게만큼은 그 무엇도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학해 오기 전에 친했던 친구가 있었어. 여기로 전학을 오면서 대부분 연락이 뜸해졌지만, 그 애만큼은 내게 먼저 연락해준 친구였거든. 정말 소중한 친구인데, 얼마 전에 싸우고 말았어. 사실 이유는 잘 모르겠어. 내가 한 말에 마음이 상했나 보더라고. 내게 갑자기 화를 내길래 나도 소리를 질렀어. 그리곤 해선 안 될 말을 했지. 다신 연락하지 말라고. 그렇게 얼마간 연락을 끊고 지냈어. 그렇지만 널 만나게 되어 많이 아프진 않았던 것 같아.”

 

“많이 친했나 보네.”

 

“응……. 그랬지. 싸우고 연락이 끊어진 건 참을 만했어. 다 이런 거구나, 싶었거든. 근데 어제 걔한테서 문자가 왔어. 아버지 일 때문에 해외로 가게 되었다고. 중국이라고 하던데 짧으면 사 년, 길면 그 이상도 있을 거라고 하더라. 그게 끝이었어. 중국 어디로 가는지도, 몇 시 비행기인지도 알려주지 않고 딱 그 정도만 문자로 적어서 보낸 거야. 그걸 보는데 뭔가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더라. 그 애와의 마지막은 싸웠던 그 날이라고 정해뒀는데, 갑자기 그 애가 외국으로 가버리는 식의 결말로 바뀌는 것 같아 너무 혼란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어떤 끝은 괜찮고 어떤 끝은 왜 괜찮지 않은지…… 난 잘 모르겠더라.”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넌 다소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넌 여전히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날 보고 있었지만, 네가 애써 화를 가라앉히고 있다는 것쯤은 금방 눈치챘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어봐야지, 뭐 하는 거야.”

 

“지금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그보다 연락처는 서로 알고 있으니까 지금 당장 할 필요는 없어.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고 나면…….”

 

“이재경.”

 

네가 내 손목을 붙잡고는 꾹꾹 눌러내는 목소리를 나를 불렀다. 음악실 앞에서 나를 이끌었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전화번호 같은 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고 금세 사라질 수도 있는 거야. 지금이 아니면 분명 다시 연락하지도, 만나지도 못해. 장담할 수 있어.”

 

“그건 너무 비약이야.”

 

난 작은 목소리로 항변해보았지만 네 말이 지닌 기세에 눌리고 말았다. 어째서 네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넌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네게 저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난 그대로 네게 끌려가며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넌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며 무언가를 찾을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얼마를 걸었을까, 네가 멈춘 곳은 상가 건물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공중전화 부스였다. 그리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내게 주머니를 뒤져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를 쥐여 주었다.

 

“이게 뭐야?”

 

“지금 그 애한테 연락해야 해. 근데 넌 네가 가진 핸드폰으로는 전화를 걸기 싫은 거잖아, 맞지?”

 

네가 옳았다. 나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감정이었다. 문자가 도착했던 그 핸드폰으로는 도저히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에 띄워진 내 번호를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난 두려웠다. 그 애에게서 온 문자에선 왜인지 나와 통화하는 건 피하고 싶다는 마음을 읽었다. 그런 짧은 문자만을 남긴 건 그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난 늘 그래왔듯 내가 정한 방식대로 그 애를 흘려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네 단호한 태도에 문득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애와의 관계가 없던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간신히 디디고 있던 땅이 사라질 것만 같은 막연한 공포가 서렸다. 난 힘겹게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었고 번호를 눌렀다.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번호를 눌러본 적이 없었음에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긴 연결음을 들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차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나야, 그런 이상한 말로 나라는 걸 밝히자 그럴 줄 알았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애써 참았지만, 기어이 다시 울고 말았다. 시간이 다 되어 네가 동전을 더 넣어줄 정도로 오랜 시간 수화기를 통해 대화했고 가능하면 모든 걸 말하려 했다. 통화가 끝난 후에도 뭔가 자꾸 마음에 남아 움직일 수 없었다. 넌 그런 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몇 시간은 그러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부스를 나서니 하늘의 파랑이 조금 진해진 정도였다.

 

우린 아주 천천히 걸어서 다시 놀이터로 돌아왔다. 벤치에 앉아 그곳엔 우리 둘 외엔 아무도 없음을 실감하고 나서야 조금씩 이야기를 나눴다. 난 지금껏 네게서 받은 느낌이랄까, 감정들을 전부 전했다. 그러자 넌 여태껏 보지 못했던 쓸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곤 자신의 이야기를 일부 들려주었다. 몇 달 전 작은 사고로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