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울과 기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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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색은 없다. 슬픈 날은 항상 이렇다. 픽션에서도. 현실에서도.

 

 

날이 많이 어두웠다. 스마트폰에서 흐르는 영상에서는 정갈한 양복 차림의 남녀가 뉴스를 전달하고 있다. 날마다 오르는 집값과 새로운 투자처, 새로 만들어진 법령, 사건 사고. 특히 이번에 일어난 해외의 사고가 특종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끔찍한 집중력과 체력을 필요로 한다. 조각가는 사람들이 우러러볼 명품을 만들기 위해 전신의 근육을 쥐어 짜 돌을 깎아내고, 화가는 머릿속에 그려진 풍경과 존재를 그려내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 붓 끝을 꺾는다. 소설가는 세상을 자연스러우면서도 기발하게 만들기 위해 언제나 뇌를 한계까지 가동한다. 소설가 김 우연(憂緣)도 그랬다.

 

차분한 레드 와인색 셔츠 옷깃은 구겨져 있었다. 우연은 전완 중간에 딱 맞게 셔츠를 걷어 올린 채,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나지막하고 불규칙적인, 그러나 리듬감이 있는 소리였다. 태풍으로 어두운 바깥에서는 빗방울이 자꾸만 창에 부딪치고 있다. 안경 너머로 피로감에 젖은 우연의 눈동자는 빼곡하게 쓰여진 글을 몇 번이고 훑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두 사람은 이곳과는 정반대로 따스하고 상쾌한 열대지방의 해변을 거닐고 있을 것이다. 우연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의 움직임이 경쾌해지고, 그 손끝에서 자아내는 글 또한 밝고 가벼워졌다. 아차 싶어 정신을 차린 우연은 방금까지 써 놓은 부분을 읽고는 지워버렸다. 아쉽게도 지금 쓰려하는 글은 그런 작풍이 아닌 것이다.

 

‘선생님. 지금 괜찮으세요?’

 

우측 구석에 메신저가 떠올랐다. 담당 편집자의 연락이었다. 우연은 메신저를 클릭해 대화방에 들어간 뒤, 잠시 뜸을 들인 뒤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지금 괜찮습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태풍 때문에 큰일인데, 선생님 댁은 괜찮으신가요? 물론 저는 괜찮습니다! 퇴근할 때만 비가 그쳤으면 좋겠네요…’

 

‘이쪽도 괜찮습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연락하신 건지요?’

 

아직 원고를 건네기로 한 날은 한참 남아있었다. 이번 작은 우연 스스로 시간과 공을 들여 쓰기로 전달한 차였고, 이제 막 회의를 마친 뒤 작업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태풍이 심하니 선생님은 괜찮으신가 해서요. 사모님이랑 따님도 안 계셔서 혼자시라고 들었거든요.’

 

담당 편집자 유 가을은 이 일을 시작한 지 아직 오래 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베스트셀러 작가인 우연에게 유난히 깍듯함과 동시에 적극적이기도 했다. 때때로 그 태도에 편집자로서 공적인 영역을 넘어 사적인 감정이 섞여있다는 것을 본인은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연은 그것을 어느 정도 간파했지만 구태여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때로는 배려나 충고가 마음을 자극하여 원하지 않는 결과를 자아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 괜찮습니다. 동생과 살 때는 가사 분담도 했었고요. 집에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에요! 혹시 작업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되니 제가 도울 일이 있나 싶었거든요.’

 

‘항상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전 혼자 있을 때 집중이 잘 되는 편이라서요. 가족이 있을 때도 작업은 방에 틀어박혀서 합니다. 작업에 문제가 생기면 연락 드리죠.’

 

‘알겠습니다~ 그럼 선생님, 몸조심 하시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 주세요.’

 

‘네.’

 

우연이 답장을 보낸 뒤, 대화는 끊어졌다. 한창 집필 중인 작가를 오래 붙잡아두면 안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우연은 몸을 쭉 펴며 하품을 내뱉은 뒤, 아직 대부분이 백지인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항상 있는 일이었다. 어느 때는 모든 작업이 술술 풀리다가도, 한 순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손이 멈춘다. 그와 동시에 뇌의 회전도 멈춰버려서, 우연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경험을 통해 얻은 인내심으로 화면 앞에는 앉아 있지만, 그렇다고 안 되는 일이 되는 법은 없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갑작스런 정체는 희귀한 일이 아니다.

 

“여보… 희망아…”

 

그럴 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여인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 지금 우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자, 동시에 가장 걱정스러운 둘이었다.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금방 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은 과보호라고 했다. 우연은 그저 사랑하는 만큼 지켜주고 싶다고 대답했다. 집착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연이 두 사람을 끔찍이 아끼는 것은, 그의 유년 시절 속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생명의 죽음은 검다. 여러 색을 갖고 있던 생물들은 죽어서 썩어, 시꺼먼 색으로 물들어 간다. 인생에서 가장 처음 겪은 장례식도 검었다. 온통 검게 차려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식장을 왕래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인들이었다. 그들에게 조부모와 친척은 없었다.

 

우연과 동생 수연도 검은 상복을 입었다. 평소 입어본 적 없는 낯선 상복의 감촉은 앞으로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부모님의 갑작스런 죽음은 우연을 당황케 했다. 울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옆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수연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젖은 눈으로 바라보며 두 사람에게 위로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은 친구가 많았다. 사람에게서 거리감을 느끼는 우연과는 달리, 주변에는 항상 친구가 북적이는 사람들이었다. 동생도 부모님과 닮아 항상 밝은 아이였다. 그런 수연이 이렇게 우는 것도 처음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두 사람을 위해서, 부모님의 친구들은 앞장서 장례식을 도와주었다. 어른들은 우연과 수연 남매를 안타깝게 여기며 여러 절차를 대신 밟아주었다. 묘지를 관리할 사람이 없었기에, 부모님은 화장되었다. 두 사람의 육체가 거뭇한 연기가 되어 하늘로 솟아 올랐다. 우연은 수연을 꼭 끌어안은 채, 화장터 앞에서 두 사람이 바뀌어가는 모습을 쭉 지켜보았다.

 

이제는 재가 된 부모님을 담은 옥빛 항아리가 공동 납골당 안에 비치되었다. 네 가족이 활짝 웃는 사진이 그 앞에 붙었다. 그것이 없다면 안에 누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수연은 갈라진 목소리로 엄마 아빠를 외치며 울었다. 우연은 아직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그를 기억에서 끌어냈다. 빗방울은 아까보다도 거세진 탓에 기관총을 쏟아붓는 양 큰 소리가 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연은 천천히 걸어 창가 앞에 멈췄다. 작은 정원에 심어둔 수풀과 몇 그루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귀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 자연의 마찰음이었다. 해가 뜬 날에는 그렇게도 밝고 아름다웠던 정원은 지금, 사무치게 쓸쓸한 비극 속 한 장면처럼 보였다. 우연은 살짝 찌푸려진 눈길로 그것을 계속 바라보았다. 어차피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이 광경이 자기 대신 슬퍼해주길 바라며, 세차게 흔들리는 창 위에 손을 얹었다.

 

 

“엄마!”

 

앳된 목소리. 날개죽지까지 닿는 검은 머리카락이 맑은 태양을 한껏 받아 빛났다. 옅은 파랑색이 섞인 흰 원피스가 소녀의 발걸음에 맞춰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