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너는 창문 너머에

투명한 너는 창문 너머에

— 본 작품은 무료이지만, 로그인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0.

 

밖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이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건너 편 아파트의 불이 꽤 켜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드문드문 몇 개의 불빛이 보일 뿐이다. 저 멀리, 시내에도 어둠이 깔려 어느덧 한창 환하던 건물들의 모습에 어슴푸레한 형체만 남았다.

 

도진은 창문 앞에 바짝 얼굴을 대고 투명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눈물 자국은 지워지고 없었지만, 퉁퉁 부은 눈은 가라앉지 않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3월, 이른 봄의 차가운 밤공기가 조금씩 서려 입김으로 데워진 창문 표면을 뿌옇게 만들었다. 행여 잊을까봐, 도진은 입술을 오므렸다 뗐다 하며 아까 외운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안 돼.

 

괜히 가슴이 조여 왔다.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일 뿐이었는데. 스스로 이렇게 다짐하자 중요한 일이 된 기분이었다. 생소한 글자의 나열이라 입에 안 붙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 십 분 정도 중얼거리다 보니 그대로 붙고 말았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이미 잠든 지 한참이다. 일찍 자는 건 집안 규칙이기도 했기에, 초저녁에 한바탕 집안을 뒤집어놓은 자신이 또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또 듣기 싫은 잔소리를 부모님은 내일 온종일 하게 될 터였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조금 몸이 움츠러들었다.

 

컴퓨터 모니터를 켜고 다시 한 번 문서를 확인해 보았다. 방법이라고도 할 것 없는 간단한 절차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걸 제대로 실행 못할 리는 없어. 그 때 삐빅, 하고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밤 열두 시다. 숨을 들이킨 도진은 바닥에 동그라미를 두 번 그린 후, 자세를 가다듬고 그 한가운데 의자를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가만히 앉았다.

 

문서의 지시 내용을 떠올렸다. 문서에서는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있다고 믿어야 효과가 있다고 했다. 자신의 앞에 어떤 것이 있다고 상상하며 도진은 서서히 손가락을 뻗어 커다랗게 사각형을 그렸다. 생각의 힘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정말 손가락 끝으로 무언가를 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케이크 조각을 자르는 것처럼 뭉근한 촉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이내 도진은 손가락으로 사각형 안에 ‘열 십’자를 그렸다. 이것은 창문이다. 나만이 볼 수 있는 창문이 완성되고 있다. 조금씩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는 생각을 구체화시키려 애를 썼다. 그러자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희끄무레하게 허공에서 무언가가 뭉쳐지고 있었다. 하얀 실처럼 타래를 이루며 조금씩 모양을 갖추던 그것은 이내 덩어리가 되어 그럴싸한 형체를 이루었다. 그것은 창문이었다. 하얀 창틀에 말간 유리. 여느 가정집 벽 한쪽에 나 있을 법한 정교한 창문이 허공에 떠 있었다.

 

“뭐야, 진짜였어?”

 

도진은 순간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날 뻔 했다. 그 손가락 자취를 따라 생겨난 창문에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이 비춰 보였다. 투명한 재질이었지만, 유리창 안쪽은 캄캄해서 보이지 않았다. 그 매혹적인 모습에 당장이라도 그 문을 열어보고 싶었다. 그는 호기심을 가까스로 참으며 문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섣불리 행동하면 전부 그르칠 수 있어.’

 

창문을 열기 전에 필요한 절차가 있었다. 자정이 되기 전까지 계속 연습해왔기에 그 생소한 말은 어느새 도진의 입에 익어 있었다. 그는 눈앞의 창문을 보며 또렷하게 음성을 높여, 방금 전까지 속삭이듯 중얼거리던 그 소리를 냈다.

 

“이만잘아는테릿…”

 

낯선 기운이 몸을 스쳐갔다. 순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가 몸속에서 자신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혹은 누군가가 맞은편에서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팔이 스르르 창문 쪽으로 올라갔다. 하얀 창틀의 딱딱한 재질이 손끝에 닿았다. 그 선득한 감각을 느끼며, 도진은 스르르 창문을 열었다.

 

 

 

1.

 

창문 안쪽으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오전 내내 끼어있던 먹구름이 확 걷힌 것 같았다. 갑작스레 밝아진 시야에 윤주는 살짝 눈을 찡그렸다. 고개를 돌려 잠깐 창밖을 보았다. 4월의 햇살을 받아, 교실 옆 연못이 빛나고 있었다. 그 눈부신 잔상이 아른거리며 눈가에 남아, 칠판 위의 글씨가 더욱 보이지 않았다. 역시 창가는 좋지 않아. 여기 앉아 있으니까 공부가 안 되잖아. 창 쪽에 배정된 이번 주 내내 윤주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은 자리 탓이 아닌데. 그렇게 모든 것에 책임을 돌리고 싶었다.

 

열심히 수업 내용을 받아쓰고 있었지만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지금이 마지막 시간이니까, 오늘 내내 그랬다. 사실은 어제도, 그저께도. 일주일 내내 마찬가지였다. 지난주부터 윤주는 수업을 거의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과정과 양상에 대해 기계적으로 필기를 하는 동안, 윤주는 노트 아래 살짝 삐져나온 하늘색 종이가 신경 쓰였다. 성의 없다고 여기지 않을까. 그동안 쭉 보낸 편지들과 같은 종이라서, 서희가 오히려 기분나빠할지도 몰랐다. 필기를 멈추고 윤주는 노트 아래 하늘색 종이를 가만히 끄집어냈다. 하늘색 편지지 위에 정성스런 필체로 빼곡하게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밤, 잠을 설쳐가며 윤주가 써내려간 편지였다.

 

 

 

서희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 것 같아. 열흘 만이었던가? 얼마나 그동안 네 생각을 했는지 몰라.

 

 

 

첫 문장을 읽자마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몇 번이나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공을 들인 내용이었으나, 역시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날마다 붙어 다니며 편지를 몇 통씩 주고받을 때는 이게 이렇게 낯부끄러운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내가 읽기에도 이렇게 억지로 꾸민 것 같은 글을 과연 서희가 좋아할까.

 

필통에서 손거울을 꺼내 뒤쪽으로 비춰 보았다. 교실 문가에 앉아 수업에 열중하고 있는 서희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스스로 집중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며, 항상 하소연하던 예전과는 달리 며칠 전부터 서희는 수업 시간 내내 선생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서희의 모습은 일부에 불과했다.

 

어느덧 수업이 끝나고 종례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이 알려주는 그 날의 과제와 지시 사항을 받아 적으며, 윤주는 서희 쪽을 슬쩍 살폈다. 지난밤 머릿속에 그려볼 때는 무척 쉬운 상황이었다. 자신이 정성스레 쓴 편지를 서희가 선뜻 받고, 다음 날 화해를 하고, 원래의 사이로 돌아가는. 하지만 그 시간이 닥쳐오자 자신이 없어졌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서희가 일어나는 걸 보며 윤주는 편지를 들고 서희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는 찰나, 서희는 가방을 들고 교실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저, 저기…”

 

서희야. 하고 작게 불러 보았다. 처음부터 이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용기를 내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그 상황을 부정했을 뿐.

 

복도를 지나고 교사를 나와, 너른 운동장을 혼자 걸었다. 학교 안쪽을 가득 메운 향나무에 꽃봉오리가 올라와, 울긋불긋 새 얼굴로 피어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예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광경도 아름답지 않았다.

 

“이윤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윤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이었다. 이내 밝은 표정을 하며 윤주는 알은 체를 했다.

 

버스 타고 갈 거면 같이 가자, 하고 아이들은 윤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운동장 안쪽에 서 있는 통학 버스로 들어서며 윤주는 버스 창밖으로 비치는 교문 앞 풍경을 보았다. 노란 학원 승합차들이 일렬로 늘어서 집으로 가는 아이들을 태우고 있었다. 그 사이로, 자신을 데리러 온 어머니의 승용차에 올라타는 서희의 모습이 보였다.

 

“윤주야, 너 혹시 서희랑 싸웠어?”

 

옆 자리에 앉은 같은 반 여자아이가 말을 걸었다. “아니.” 윤주는 별 일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눈치 챘는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그 아이는 이내 시선을 돌려 건너편에 앉은 아이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버스가 천천히 출발했다. 옆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지만 윤주에게는 마치 그 공간이 마치 빈자리처럼 느껴졌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는 서희가 있었다. 시가지로 접어드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봄을 맞아 화사하게 단장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진정으로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 잊지 못할 초등학교의 마지막 1년을 보낼 거라 생각했다. 어른거리는 서희의 모습을 애써 지우며, 윤주는 눈을 감았다.

 

 

 

2.

 

서희를 처음 만난 건 한 달하고도 열흘 전이었다.

 

학기 초, 새 학년이 시작된 지 보름 정도 지난 시기였다. 5학년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헤어져, 윤주는 딱히 친한 친구가 없었다. 굳이 같이 다닐 친구를 무리해서 만들지 않는 성격상 윤주는 적극적으로 다른 아이들의 집단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는 편이었다. 어차피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3월 셋째 주의 월요일이었다. 그 날 오후, 윤주는 머리가 아파 보건실에서 쉬었다. 잠깐 눈만 붙였다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깊이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오후 세 시 반이었다. 교실로 올라가 보니 이미 아이들이 전부 집에 가고 선생님 혼자 잡무를 보고 있었다. 방과 후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고 인사를 한 뒤에 교실을 나왔다.

 

대부분의 교실에서는 수업이 끝나, 특별 활동을 하는 학생들 일부만 남아 있었다. 윤주는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직장 일이 바쁜지 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학원 차들도 대부분 빠져, 교문 앞도 한산한 상태였다.

 

‘어떡하지.’

 

윤주는 학교를 마치면 피아노 학원에서 한 시간 이상을 보냈기에 항상 학원 차를 타고 하교를 했다. 여의치 않을 때는 공용 통학 버스를 이용했지만 지금은 학원 차와 통학 버스, 양쪽 모두 떠나고 없었다. 택시를 타야 하나, 아니면 시내버스를 탈까. 걸어서 가려면 이삼십 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갈등이 되었다.

 

그 때, 교문 앞에 서 있는 여자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푸른색 반코트에 흰색 티셔츠, 청바지를 입은 긴 생머리의 그 아이는 매일 보는 얼굴이었다. 윤주는 그 이름을 기억해 냈다. 최서희. 윤주와 같은 6학년 3반이었지만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윤주와 눈이 마주치자 서희는 먼저 알은체를 했다.

 

“아직 집에 안 갔어?”

 

“어.” 윤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엄마 기다리고 있었는데, 엄마가 오늘 못 오신대. 택시 타라고 하셔서, 어떡할까 생각 중이었어.”

 

“그렇구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윤주는 이런 순간이 달갑지 않았다.

 

“참, 너는 괜찮아?”

 

“무슨 말이야?”

 

윤주가 되묻자 서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아파서 보건실 갔었잖아. 5교시 때 가는 거 분명히 봤는데, 종례할 때 보니까 없더라고. 가방은 있는데 애가 사라져서 어디 갔나 했지.”

 

“나 계속 누워 있었어. 눈 뜨니까 세시 반이더라고.”

 

윤주가 상황 설명을 하자 서희는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너무한다. 왜 아무도 안 챙겨줘?”

 

진심으로 서운한 듯한 감정이 서희의 목소리에 어려 있었다. 그 반응에 윤주는 살짝 놀랐다. 자신은 이름조차 간신히 알고 있는 아이가 순간이나마 그렇게까지 걱정해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럼 이제 괜찮은 거지, 하며 서희는 윤주의 얼굴을 살폈다. 고개를 끄덕이는 윤주를 보며 서희는 물었다.

 

“너희 집은 어디야?”

 

자신이 사는 아파트 위치를 알려주자 서희는 같은 방향이라며 반가워하는 기색을 했다.

 

“우리 같이 택시타고 갈까?”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윤주를 보며 서희는 멀리 시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그냥 집까지 걸을까? 날씨도 좋은데.”

 

윤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 분간 함께 걸으며,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색한 대화로 시작했지만 친해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서희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취미나 관심사에서도 윤주와 은근히 공통점이 많았다. 특히 반가웠던 건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남들에게 거의 하지 않는 얘기였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호감이 생겨 넌지시 말했을 뿐이었는데, 서희는 자기도 부모님 몰래 만화를 그리고 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수업을 마치고 피아노 학원을 먼저 들르는 것 역시 같았다. 가까운 곳에 살면서 왜 그동안 서로의 존재를 몰랐나 싶었다.

 

다음 날부터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학교에서도 계속 붙어 다녔으며, 점심도 함께 먹었다. 집에 갈 때 윤주가 따로 학원 승합차를 타고 가는 걸 서로 아쉬워할 정도였다. 주말에 분식집에서 튀김을 먹으며, 서희는 이런 제안을 했다.

 

“나 피아노 학원 옮길까?”

 

“학원을?”

 

“지금 아는 분한테 배우는데, 거기서 별로 해주는 것도 없어. 어차피 소질도 없거든.”

 

“그래? 그냥 그렇게 쉽게 옮겨도 되나?”

 

“내가 엄마한테 고집 좀 부리지 뭐.”

 

이내 다음 주부터 서희와 윤주는 같은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원 승합차에 올라 둘은 피아노 학원에서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소질이 없다는 말과는 달리 서희의 진도는 초등학교 내내 피아노를 배운 윤주보다도 월등히 앞서 있어 크게 배울 게 없었다. 잠깐 피아노를 배우는 시늉을 한 뒤에 휴게실에서 수다를 떨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갔다. 윤주는 이 시기를 떠올리며 매번 후회를 하곤 했다.

 

그 때 멈췄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3.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완전히 개어 있었다. 시리도록 파란 빛깔 사이로 새털 같은 구름이 점점이 떠다녔다. 윤주는 아파트 앞 이팝나무 길을 혼자 걸었다. 어머니께 말씀드려 학원은 잠시 쉬는 상태였다. 별다른 문제없이 지금껏 부모님의 말을 잘 따랐기에,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도 오히려 부모님은 윤주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처음에는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별다른 꾸중을 하지 않는 어머니를 보며, 어쩌면 자신들이 크게 잘못한 게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걷다가 대로변 건물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 3층 건물 앞에서 윤주는 멈춰 섰다. 지난 한 달 가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던 건물이었다. 이런 곳에 용케도 매일 왔구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빈 건물인 그곳은 역시 윤주 같은 어린아이가 오갈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건물의 출입문을 한참 바라보던 윤주는 주위를 살피고, 왼편으로 가 아래쪽 벽에 있는 머릿돌 아래에 손을 넣었다. 열쇠 꾸러미의 딱딱한 재질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살그머니 열쇠를 꺼낸 뒤 건물의 유리문 쪽으로 가 손잡이 자물쇠에 열쇠를 맞추고 문을 열었다. 직접 이걸 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 건물의 열쇠 위치를 아는 사람도, 날마다 문을 열었던 사람도 모두 서희였으니까.

 

한 달 전이었다. 피아노 학원의 휴게실에서 잡담을 하던 서희가 윤주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우리 밖에 나갈까?”

“지금? 연습 안하고?”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고 하지 뭐.”

 

서희는 다른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피아노 선생님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천연덕스레 말을 꾸며냈다. 다음 일정인 수학 학원의 시간표가 바뀌어, 빨리 가 봐야 한다는 얘기였다. 선생님의 승낙이 떨어지자, 두 사람이 같은 학원에 다니고 있다며 서희는 윤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학원을 나서는 윤주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거짓말은 해 본적이 없었다.

 

“대체 어떡하려고 그래?”

 

책망하듯 눈을 흘기는 윤주를 보며 서희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벌써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학원에서 두어 블록 떨어진 교차로 언저리를 지나고 있었다. 왠지 길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윤주는 움츠러들었다. 서희의 걸음이 점점 빨라져, 그 속도를 따라잡기도 쉽지 않았다.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길을 건넌 서희는 교차로 반대편에 있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대로변에 있지 않고 주차 공간마냥 쑥 들어간 앞마당이 있는 건물이었다. 그 앞에서 서희는 윤주에게 손짓을 했다. 윤주는 가까이 다가가서 건물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보기에 아무도 쓰지 않는 건물 같았다.

 

“잠시만.”

 

서희는 건물 왼편으로 가 아래쪽 벽에 있는 머릿돌 안쪽에 손을 넣었다. 자그마한 열쇠 꾸러미가 딸려 나왔다. 그걸 들고 건물의 유리문으로 다가가 열쇠구멍에 집어넣으니 딸깍 하고 문이 열렸다. 윤주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뭐야, 너 이런 거 어떻게 알아?”

 

“아버지 친구 건물이야. 돈을 못 막아서 얼마 전에 부도났어.”

 

서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뒤따라 올라가자, 2층의 철문이 나왔다. 서희는 꾸러미에 있는 열쇠를 하나씩 맞추어 그 문을 열었다. 그 안의 환하고 너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다 뭐야?”

 

마치 부동산 전단에서나 볼 법한 그림 같은 사무실이었다. 급하게 건물을 비웠는지, 내부의 집기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통유리 바깥쪽 두세 개의 책상과, 벽걸이 텔레비전, 손님 접객용 탁자. 한쪽에는 대형 소파도 비치되어 있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화분이 말라죽어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들어와 업무를 이어갈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뭇결무늬로 발라져 있는 매끈한 벽 위로 ‘ㅇㅇ물산’이라는 명패가 보였다.

 

소파 쪽으로 다가간 서희는 그 위를 손으로 털더니 털썩 하고 앉았다. 몇 번이나 와 본 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리 와, 앉아.”

 

윤주가 쭈뼛거리며 그 옆에 앉자 서희는 피식 웃었다. 왠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데 들어와도 돼?”

 

“상관없어. 아마 일 년 동안은 안 쓸걸?”

 

 

 

그렇게 말하며 웃는 서희의 얼굴이 눈앞에 선하게 겹쳐 보였다. 그 생생한 모습을 떠올리며 윤주는 2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의 모습은 열흘 전 그대로였다. 그 날 사무실 문을 따고 들어간 이후 그 곳은 두 사람만의 비밀 공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이곳을 ‘작업실’이라고 불렀다. 둘의 공통된 취미인 만화를 이곳에서 많이 그렸기 때문이었다.

 

윤주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은 수강생이 많았고, 현실적으로 거기 있는 두 명의 선생님이 모든 아이들의 연습을 체계적으로 돌봐주기는 불가능했기에, 사실상 그 곳은 매일 두어 시간씩 인근 아파트의 부모들이 하교 시간에 아이들을 맡기는 공간에 가까웠다. 수업이 늦어져 못 가게 되었다거나, 다음 일정이 겹쳐 일찍 가야 한다는 식의 거짓말이 지난달에 한 달 가까이 먹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6학년이 되어 바빠졌다는 핑계를 대며 서희와 윤주는 피아노 학원을 빼먹고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놀았다.

 

“너는 그림도 잘 그리면서 왜 미술 학원은 안 다녀?”

 

서희가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윤주는 사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미술 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그린 그림을 남에게 보여주기가 왠지 부끄러워져 언제부턴가 관심이 없는 척 하고 말았다. 그 관심사가 만화 그리기로 옮겨가면서 더욱 그런 경향은 심해졌다.

 

하지만 서희와 같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텅 빈 작업실의 통유리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비쳐 내렸다. 윤주와 서희, 두 사람만이 있던 자리였지만 언제나 그곳은 꽉 찬 느낌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빈 건물에 드나들며 두 사람은 ‘작업실’을 자기들만의 공간으로 꾸몄다. 그 안에 잔뜩 비치된 서류나 일반 사무용품들의 자리에는 두 사람의 집에 있던 만화책이나 아이돌 음반, 인형 같은 것들이 놓였다. 그 전 사무실 이름이었던 ‘ㅇㅇ물산’ 명패 위에는 윤주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포스터가 붙었다.

 

윤주는 책상으로 다가가 그 위에 놓여 있는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정성스레 그린 그림 위에 열흘 동안 조금씩 내려앉은 먼지가 하얗게 부서졌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를 틀어올린 소녀가 녹색 천을 덧댄 가죽옷을 입고, 단검을 차고 있는 그 그림은 두 사람의 합작품이었다. 서희는 그림 속 소녀를 제인이라고 불렀다.

 

 

 

4.

 

“제인은 도둑이야.”

 

머리를 붉은색으로 칠하며 서희가 말했다. 겉모양만 있는 상태에서 급조해낸 설정이었다. 윤주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둑이라고?”

 

“응. 제인은 숲 속에서 도둑질을 하면서 살고 있어. 주특기는 보석을 훔치는 거야.”

 

금세 서희의 이야기에는 살이 붙었다. 서희의 설명에 따르면 제인은 유명한 여도적으로, 그녀에게는 본인조차 모르는 비밀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이웃나라 왕의 숨겨진 딸이라는 사실이었다. 왕가의 핏줄이 어쩌다 도적이 되었냐고 묻자 서희는 총리대신이 왕을 조종하고, 그녀를 몰래 죽이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의 암살 시도를 피해 유모는 갓난아기 제인을 데리고 궁을 탈출했고 도적 무리에서 아이를 기르게 되었다.

 

“그러면 유모는 어쩌다가 도적들을 알게 된 거야? 계속 궁에서 일하던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평범한 유모가 아니었던 거지. 그 사람부터가 원래 도적떼의 일원이었어.”

 

그렇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으면서도 예상치 못한 전개가 이어졌다. 두 사람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도적 제인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며칠에 걸쳐 등장인물들이 점차 늘어났고, 결국은 이야기의 도입부까지 직접 그려 몇 장의 만화 원고까지 쌓이게 되었다. 그걸 붙여놓고 읽으니 정말로 그럴싸해 보였다.

 

“우리 이거 나중에 웹툰 사이트에 올리자.”

 

말 칸에 대사를 그려 넣으며 서희가 말했다. ‘진심이야?’하고 윤주가 묻자 서희는 당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서희의 의욕은 항상 윤주를 앞서가고 있었다. 그런 점이 윤주는 좋았다. 막연하게 둘이서만 보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서희가 이끌어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정식 연재되면 이 길로 나가면 되잖아. 돈 벌면 더 이상 학교 안 다녀도 되고, 아, 학교 다니기 싫다….”

 

그림을 그리다 말고 서희는 의자에 앉아 쭉 하고 기지개를 폈다.

 

 

 

그 모습이 마치 지금도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어른거리는 서희의 얼굴을 애써 지워내며, 작업실을 둘러보다 윤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창하게 주위를 속여 가며 일을 꾸미던 비밀 장소치고는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적어, 주말에 운 좋게 약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질 때를 제외하면 많아봐야 하루에 한 시간 정도밖에 두 사람은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윤주는 다섯 시부터 영어 학원에 가야 했고 그건 개인 과외를 여러 건 받고 있었던 서희도 마찬가지였다.

 

건물의 문을 닫고 열쇠를 숨겨두며 윤주는 그 때 느끼던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불안감이었다. 이 순간이 금방이라도 끝날 것만 같은. 서희가 머릿돌 아래에 열쇠를 숨길 때마다 윤주는 마치 영원히 이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교차로가 있는 곳까지 함께 걸으며, 그곳에서 서희를 보내는 순간마다 내일 다시는 못 보게 될 것 같은 마음에 한쪽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어쩌면 그 간절한 직감으로 미래를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그런 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벚꽃이 점차 지고 있던 사월 중순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인 이야기는 꽤 많이 만들어져, 상인 출신인 남자 주인공과의 러브 라인이 한창 전개되는 중이었다. 그가 빼낸 정보들을 통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고, 제인은 이내 총리대신에게 복수를 할 예정이었다. 그 날 만드는 에피소드는 제인이 자신의 출생을 서서히 의심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앞에 만들어놨던 왕가의 표식을 사용하는 거야.” 서희가 말했다.

 

왕가의 표식은 앞부분에만 잠깐 등장하던 복선이었다. 그것은 왕의 핏줄에만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제인의 귀 뒤쪽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점이었다. 시종으로 변장해 궁에 잠입했던 제인은 실성한 왕을 부축하다 그의 귀에 같은 똑같은 초승달 모양의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점은 숨겨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유모의 말을 떠올린다.

 

“근데 귀 뒤쪽이면 원래 안 보이는 자리 아니야? 머리카락이 기니까, 굳이 그렇게 주의를 줄 필요까진 없잖아.”

 

“그럼 어떡하지? 목 언저리로 할까?”

 

점을 어디다 놓을지, 그걸 어떻게 발견해야 충격적일지에 대해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윤주는 직접 그 사람이 되었다고 상상하며, 제인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려 애썼다. 지금 생각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더한 혼란이 닥칠 예정이었으니까.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도적 제인의 이야기는 그 날로 끝이었다.

 

 

 

5.

 

빈 건물의 앞마당에 서서, 윤주는 교차로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를 어림잡아 보았다. 백 미터 정도 될까. 그 짧은 거리가 서희와 함께 걸을 때면 무척 길게 느껴졌었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고 하지만 윤주에겐 그 반대였다. 그 순간이 소중했기에, 오히려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았다.

 

그 날, 건물을 나서며 두 사람은 도적 제인에 관해 열렬히 의견을 주고받았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더욱 내용에 불이 붙을까 하는. 이야기에 반전이 있으려면 도적떼에 스파이가 몇 명은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며 웃다가 서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래?”

 

서희의 시선을 따라 거리 한가운데를 보며 윤주는 함께 얼어붙었다.

 

누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큰 키, 감색 원피스. 적당히 볼륨을 준 갈색 머리의 그 세련된 아줌마가 누구일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엄마” 서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확 사그라들었다.

 

“서희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왜 전화는 안 받아?” 황급해 보이는 그 모습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그, 그게…”

 

“지금 어디서 뭐를 하고 있었던 거야?”

 

서희의 어머니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딸을 쳐다보다 이내 윤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윤주는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그녀는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 학원에 있다가, 친구랑 책 사느라 잠깐 나왔어.”

 

“무슨 핑계를 대는 거야, 지금 내가 모르고 온 것 같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엄마, 내가 설명할게. 내가 친구랑 말이야…”

 

어떻게든 해명을 하려는 서희의 목소리 사이로 ‘그만’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서희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엄마, 있잖아…”

 

“그만!”

 

찢어질 듯 높아진 어머니의 목소리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윤주는 어쩔 줄 모른 채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입을 다문 서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게 보였다.

 

“가자, 가서 얘기해.”

 

어머니는 서희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 손에 이끌린 채 차에 오르며, 서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게 윤주가 친구로 기억하는 서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월의 따스한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윤주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교정에 핀 칠엽수 꽃을 보고 있었다. 하얀 이파리 위로, 팔랑거리는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그 옆에 나비 하나가 더 앉자, 이내 두 마리는 함께 꽃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 때 윤주 쪽으로 툭하고 공이 날아들었다. 윤주는 고개를 돌렸다.

 

“이윤주! 거기 공 좀.”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아이가 손짓을 했다. 윤주는 그 쪽으로 공을 던져 주었다. 4교시 체육 시간, 아이들은 팀을 짜서 해파리 야구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반 구성원 전체가 함께하는 시간이었지만 자유 참여에 가까워, 윤주는 운동을 하지 않고 스탠드에서 쉬었다. 아이들 사이에 섞여 뛰어다닐만한 기운이 없기도 했다.

 

편지를 전해주지 못한지도 사흘이 지났다. 자연스레 건네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서희에게 윤주는 제대로 말도 붙이지 못했다. 그 어색함이 겹겹이 쌓이고 하루가 갈수록 멀어져, 같은 반의 다른 친구들보다도 못한 사이 같았다.

 

두 사람의 일탈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건 역시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듣자하니 윤주와 서희가 처음 수업을 빠졌을 때부터 선생님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학원의 입장에서 적극적인 재제를 하기 어려워 속아주는 척 했고, 두 사람의 거짓말이 점점 커져 한 달 가까운 태업이 되는 걸 보며 결국 부모님께 연락을 했던 것이다. 윤주는 그 사실을 서희와 헤어진 후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전화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 공부 열심히 하는 애를 꼬드겨 냈다며, 서희 어머니가 윤주 어머니에게 항의 전화까지 한 모양이었다.

 

서희와 친하게 지낸지 얼마 뒤에 안 사실이지만 서희는 유명한 동네 개인 병원의 외동딸이었다. 몇 가지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이 나서, 어른들이 많이 다니는 통에 윤주도 그 병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름난 집안인만큼 딸의 그런 일탈은 용납되지 않을 터였다.

 

그날 밤, 메신저로 애타게 서희의 안부를 확인하던 윤주는 단 한 줄의 답장 문자를 받았다.

 

-내가 너무 못나서 그런가 봐.

 

그 말이 윤주를 더욱 아프게 했다. 어떻게든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어른들에게 들킨 건 당장의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다음 날 아침 시간이었다. 밤새도록 걱정을 했던 윤주는 서희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다가가 말을 걸었다.

 

“왔어? 어떻게 됐어?”

 

“응, 별일 없었어.”

 

서희는 짧게 대답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 무심한 태도에 윤주는 살짝 당황했다. 많이 꾸중을 들어 기분이 좋지 않은 건가 했다.

 

“어머니께 많이 혼난 거 아니야? 괜찮아?”

 

걱정스런 마음으로 윤주는 무심결에 서희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는 서희의 냉담한 시선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손을 뗐다.

 

“괜찮다니까? 별일 없었어.”

 

그렇구나, 하며 윤주는 물러섰다. 그런 서희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왠지 더 이상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아 윤주는 자리로 돌아왔다.

 

수업시간 내내 윤주는 서희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분명 큰 일이 있었을 텐데도, 서희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전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수업을 듣고, 필기를 하며 칠판과 책에서 눈 한번 떼지 않는 게 오히려 평소의 학습 태도 이상이었다. 윤주는 쉬는 시간마다 서희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렇게 굴고 있으니 더욱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서희는 윤주에게 인사 한번 건네지 않고 자리를 떴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윤주는 깨닫게 되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6.

 

운동장에서 ‘와아’하는 함성이 들렸다. 득점이 크게 난 모양이었다. 수업을 시작할 때 선생님이 어떻게 해야 해파리 야구에서 점수가 나는지를 알려주었지만 제대로 듣지 않았기에 윤주는 무슨 상황인지도 몰랐다.

 

그 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체육복을 입은 남자아이 하나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응. 안녕?“

 

어색한 인사에 서희는 같은 말투로 답해 주었다. 그는 잠시 쭈뼛거리다 민주의 옆에 앉았다. 그 모습이 민주에게는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수많은 학생들과 부대끼는 학교생활이지만, 누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나 알지?”

 

“응, 알아.”

 

개인적으로 말을 나눠본 적은 별로 없어도 같은 반 아이의 이름을 모를 리는 없었다. 송도현. 뒷자리에 앉는, 뿔테안경을 쓴 키가 큰 아이였다. 곱상한 얼굴이라 여자애들끼리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기도 했다.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무슨 말?”

 

“그, 그게…” 그는 살짝 말을 더듬었다.

 

“여기서 하기에는 약간 곤란한 얘기인데. 그래서 집에 갈 때 잠깐 만나주거나 시간 좀 내줬으면 하고.”

 

“무슨 소리야?”

 

윤주는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혹시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건가. 설령 그렇더라도 전혀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 호감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이런 접근은 질색이었다.

 

윤주는 도현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곧장 얼어붙고 말았다.

 

“최서희 말이야.”

 

윤주는 홀린 사람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길로, 잠시 윤주를 바라보던 도현은 이내 운동장에 있는 서희를 천천히 가리켰다.

 

“저기 있는 서희는 말이야, 니가 아는 최서희가 아니야.”

 

순간 주위의 모든 소리가 확 멈추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마치 영상이 느리게 재생되는 것처럼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또렷한 입모양으로,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기 있는 최서희는.

 

“다른 사람이야.”

 

 

 

7.

 

오후 세 시 반이 넘었다.

 

목조 현관 앞에 흰 색으로 붙어있는, ‘공작실’이라는 간판이 유난히 커 보였다. 6년이나 다닌 학교였지만 이쪽으로 올 일은 거의 없었다. 공작실은 학교 뒷편에 지어진 신축 건물로, 작년에 전문 공작 도구를 다루는 법을 배울 때 두세 번 와 본 것이 전부였다. 선생님이 정해진 시간에 바로 끝을 내주는 윤주의 방과 후 컴퓨터 수업과는 달리 공작 수업은 정해진 종료 시간이 없는 것 같았다. 익숙하지 않는 장소에 서서, 친하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건 어색한 일이었다.

 

4교시 체육 시간 때, 윤주는 도현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멀쩡한 모습으로 출석을 하고, 별다른 문제없이 지내고 있는 누군가를 두고 다른 사람이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윤주가 워낙 크게 화를 내는 바람에 도현이 어쩔 줄 몰라 할 정도였다 쩔쩔매는 그 모습을 뒤로 하고, 그대로 교실로 들어와 버렸다.

 

하지만 확신에 찬 눈길로 서희를 두고 다른 사람이라고 하던 그 모습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윤주는 도현에 대해 잘 몰랐지만, 평소에 그렇게 얼빠진 아이 같아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도현은 성적도 우수하고 운동도 잘 하는데다 발표 능력도 좋아서, 두루 호감을 사는 편이었다. 대놓고 그런 황당한 망상을 하고 다녔다면 진작 소문이 났을 것이다.

 

오후 수업시간 내내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다.

 

그 때, 공작실의 문이 열렸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하나씩 나오고 있었다. 윤주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그 사이에 섞여, 가방을 맨 도현이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쳐다보는 도현의 얼굴을 보자 왠지 민망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화를 내고 몇 시간 만에 다시 찾아오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은 일이었다.

 

“윤주야, 왔어? 빨리 끝났네. 너 지금 나 기다리는 거 맞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도현은 스스럼없는 얼굴로 반색을 했다. 그런 태도가 윤주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생각 좀 해봤어?”

 

윤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육 시간과 사뭇 다른 말투로 윤주는 물었다.

 

“아까 낮에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어, 잠깐만.”

 

도현은 가방을 고쳐 매면서 뒤를 돌아보고선 누군가에게 ‘빨리 와’ 하며 손짓을 했다. 남자 아이 하나가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며 엉거주춤 공작실 현관을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가까워지자, 윤주는 그의 얼굴을 복도에서 여러 번 봤던 기억이 났다. 짧은 머리에 통통한 체격의 그 아이는 바로 옆 반이었다.

 

“얘는 송도우. 내 사촌이야. 반은 2반이고. 본 적 있지?”

 

윤주는 그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세 사람은 교문까지 꽤 먼 거리를 말없이 함께 걸었다. 원래 도현과 만나자마자 이것저것 물어 볼 생각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누군가와 갑작스레 같이 있게 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을 도현이 먼저 깼다.

 

“어디라도 갈까? 나 지금 시간 많거든?”

 

윤주는 도현 옆에서 따라오고 있는 도우를 힐끗 보았다. 제 3자가 끼어있는 건 역시 별로였다. 그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도현은 빙그레 웃었다.

 

“아, 괜찮아. 우리가 무슨 얘기 하려는지 도우도 알아. 얘는 나랑 같이 살거든.”

 

 

 

세 사람 앞에 오렌지색 과일 빙수가 하나씩 놓였다. 가게 앞 포스터에 붙어 있는 신상품이었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윤주가 눈에 보이는 대로 시킨 메뉴였다. 빙수에 숟가락을 꽂아 넣으며 도현이 입을 뗐다.

 

“그래도 생각이 바뀌어서 다행이네.”

 

“대체 그 얘기는 뭐야?”

 

“아, 서희가 다른 사람 같다는 거?”

 

“너무 얼토당토 않은 얘기잖아. 나보고 그거 믿으라는 거야?”

 

“근데 너도, 약간은 그런 생각이 있으니까 나 따라온 거 아니야?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면 여기 올 이유가 없잖아.”

 

윤주는 갑갑해졌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고.”

 

얼음 조각을 씹으며 오물거리던 도현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게 말이야. 최서희가 우리 형이랑 비슷하거든.”

 

“너희 형?”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도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형 도진은 중학교 2학년으로, 작년까지 거의 학업에 관심이 없었으며 성적 역시 바닥이었으나 올 들어 계속 공부만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열의가 얼마나 대단한지 집과 학교, 공부방만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철이 든 거지,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니지 않나? 가고 싶은 학교가 있거나 갖고 싶은 직업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 한번 공부를 시작한다 싶으면, 진짜로 뭐가 필요할 때 아니고서는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아.”

 

자신의 형이 얼마나 공부를 하는 걸 싫어했는지 몰라서 그런다며, 도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평소에 즐겨 했던 게임도 한 달에 두어 번밖에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걸로 나 부른 거야?”

 

어이가 없어진 윤주는 도현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 옆에 있는 도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어때?”

 

빙수를 먹는데 열중하던 도우는 이름이 불린 데 화들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너 도현이랑 같이 산다며. 너도 느끼는 게 있을 거잖아.”

 

아버지가 외국에 일하러 나간 동안 도우는 사촌인 도현의 집에서 함께 지낸다고 했다. 도현이 그렇게 수상한 기운을 느꼈다면 같이 사는 아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솔직히 나는…” 도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도현이처럼은 생각을 안 하는데, 형이 진짜로 달라지긴 했어. 생긴 거만 똑같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그 말에 도현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니까 얘기할 수 있는 거야. 같이 사는 사람 아니면 알 수 없는 거니까.“

 

평소의 윤주라면 적극적인 반박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도현이 워낙 열의를 갖고 말하고 있어서, 말을 자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 사람이 아니라 둘이서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게 왠지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너도 서희를 보면 알 거 아니냐고. 걔가 완전히 다른 사람인거.”

 

서희의 이름이 나오자 문득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려 왔다. 과일 빙수의 달콤한 맛이 갑자기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냥 사람이 약간 변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맨 뒤에 앉아 있잖아. 거기서는 반 전체가 보이니까, 누가 어떤지, 뭘 하는지 나는 조금은 알아.”

 

어떤 반에 들어가든 키가 제일 컸던 도현은 1학년 때부터 6년 내내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원치 않게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겨, 동급생들의 특성을 웬만큼은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가 누구와 친한지, 어떤 습관을 갖고 있는지. 몇 시 몇 분부터 몇 분까지 자리를 비우는지도.

 

“최서희는 한 달 넘게 너랑 진짜 친했거든? 근데 거의 열흘 전부터 말을 안 하는 거야. 내가 너희를 계속 봤는데, 서희 쪽에서 말을 안 하는 것 같더라고.”

 

“….”

 

“윤주 너는, 니가 서희를 수업시간에 얼마나 쳐다보는지 모르지?”

 

윤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동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낱낱이 읽히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최서희가 요즘 자리도 안 비우고 하루 종일 공부만 하잖아? 걔가 머리도 좋고, 성적이 괜찮은 편이긴 해도 그렇게까지 열심히는 안 했단 말이야. 저러니까 우리 형이 갑자기 생각나는 거야. 사람이 확 바뀌었는데, 공부만 하고 있고. 주위 사람한테 이상하게 대하고. 우리 형은 서희가 너한테 그러는 것처럼 나한테 아예 말을 안 하진 않아. 근데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 이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안경을 추켜세우는 도현의 얼굴이 한결 진지해졌다.

 

“냄새가 나. 최서희한테서 우리 형이랑 같은 냄새가.“

 

 

 

8.

 

열쇠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윤주는 계단을 올라 빈 건물 2층, 작업실의 문을 열었다. 깨끗한 사무실이 눈앞에 펼쳐지자, 등 뒤에서 감탄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과 서희만이 알고 있던 공간에 다른 사람들을 불러들이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와, 이게 다 뭐야? 여기 뭐하는 데야?”

 

신기한 듯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는 도현을 보니 무언가 쑥스러움이 일었다. 왠지 거창한 비밀을 알려준 것만 같았다. 윤주는 우쭐한 기분을 억누르려 애를 썼다. 대화를 이어갈 공간이 필요해 데려왔을 뿐, 자랑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너무 알려고 하지 마. 어제 하던 얘기나 마저 해 봐.”

 

“무슨 얘기부터 하지?”

 

“너희 형이 그렇게 됐으면, 계기가 있지 않았겠어?”

 

도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형 도진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됐다고 했다.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게 언제였지? 6학년 올라오고 얼마 안 됐을 때니까. 3월 초인가?”

 

“아마 둘째 주?” 윤주가 그리던 그림 원고를 훑어보던 도우가 대답했다.

 

“맞아. 둘째 주 토요일이야. 우리 둘이 진짜 좋아하는 만화가 있거든? 여기 팬카페가 부산에서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도현은 만화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 만화는 윤주도 익히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유명한 작품이었다. 부산에서 열렸던 그 전시회는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대형 행사였는데, 두 사람은 그 곳을 무척 가고 싶어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초등학생 둘이서 두 시간씩 KTX를 타고 부산을 가는 걸 허락해 줄 부모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폭력 수위가 꽤나 높은 내용이라, 보호자가 없는 어린이는 입장이 안 되어 그 행사는 두 사람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근데 도진이 형이 우리를 데리고 가줬단 말이야. 형은 키가 커서, 정말 어른 같거든.” 도우가 말했다.

 

“갈 때까지는 괜찮았어. 덕분에 잘 보고 왔으니까. 형이랑 같이 가니까 아무도 의심을 안 하더라고.”

 

순탄한 하루였으나 결국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오는 길에 지하철을 잘못 타는 바람에 기차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 기차까지는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결국 세 사람이 집에 왔을 때는 밤 아홉 시를 넘기고 말았다.

 

“우리 부모님은 하루 종일 가게에 계셔서, 일곱 시 안에만 들어가면 안 걸리거든? 근데 애들이 아홉 시가 넘어가지고 들어오니까 난리가 난 거지.”

 

“우리 둘이 갖고 들어간 굿즈 다 뺏기고 하나도 못 챙겼잖아.”

 

그 때가 생각난다는 듯 도우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형이 우리가 아니라 자기가 데리고 간 거라고 거짓말을 해 준거야.”

 

“감싸 준거지. 그래서 난리가 났지.”

 

도현은 그 때의 기억이 선하다는 듯 살짝 몸서리를 쳤다.

 

“나는 부모님이 형한테 그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어. 얼마나 심한 말을 하시는지 내가 도우 데리고 방에 들어가서 얘 귀를 막았다니까.”

 

부모님은 거의 한 시간 넘게 도진을 나무랐다고 했다. 그 동안 꾸중을 자주 들어 왔지만, 그건 그가 겪었던 것 중에서도 최악의 수위에 속했다. 도현은 문틈으로 형이 언제 나오는지를 계속 지켜보았다. 꾸지람이 끝났을 때는, 어찌나 시달렸는지 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엄두가 안 나더라고.”

 

도진은 부모님 방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듣고 있는 도현의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서러운 울음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리고 다음 날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야.”

 

윤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찌나 그 내용이 심각한지,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미안함이 밀려올 지경이었다. 문득 얼마 전에 서희와 함께 피아노 학원을 빼먹고 어른들을 속이다 들켰던 기억이 났다. 그 때 어쩌면 자신도 도현의 형처럼 부모님께 심한 꾸지람을 들을 수도 있었다. 집에서 별다른 문제를 삼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서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서희.

 

서희는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 속에 고개를 푹 숙이고 차에 오르던 서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날 서희는 분명 심한 취급을 당했을 터였다. 서희 어머니의 성격상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윤주는 도현에게 자신과 서희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둘만 아는 비밀들이 포함돼 있었지만, 이야기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부터야. 우리가 말 안하게 된 게.”

 

“그런 거면 진짜로 좀 비슷하지 않나?”

 

도현은 두 사람의 공통점을 짚었다. 도진과 서희는 어떤 잘못으로 부모님에게 엄청난 꾸지람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그 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닐까?”

 

윤주는 곰곰이 서희와의 마지막 날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도현에게 물었다.

 

“형이 부모님 방에 나와서 곧장 자기 방에 들어간 거야? 너한테 아무 말도 안하고?”

 

“사실 한마디 하긴 했어. 나를 보면서 말이야.”

 

도현은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공부를 못해서 이렇게 됐나보다, 이러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주의 머릿속에 한 줄기 기억이 스쳐갔다. 분명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윤주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신저를 열고 목록을 확인해 대화 내용을 찾았다. 그날 밤, 서희에게 보냈던 수십 통의 문자에는 단 한 번만 답장이 왔다. 서희가 보낸 마지막 한 줄. 윤주가 잊고 있었던 그 문자.

 

그건 다음과 같았다.

 

-내가 너무 못나서 그런가 봐.

 

 

 

9.

 

“여기 있어,”

 

윤주는 도현이 내미는 스마트폰 화면을 받아들었다. 도진이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던 3월 17일의 인터넷 접속 기록이었다. 두 사람과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이상, 그 날 밤의 자취를 알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었다. 다행히 방문을 잠그지 않았기에 도진의 컴퓨터에서 이용 내역을 빼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형이 생각보다 인터넷을 별로 안 하네?”

 

“게임하는 건 좋아하는데, 아마 인터넷 사이트에는 별로 안 들어갈 거야.”

 

윤주는 문서를 훑으며 사이트 방문 내역을 확인했다. 도진은 오전 여덟 시부터 여덟시 반 사이에 30분간 인터넷을 했고, 나머지 낮 시간동안은 동생들을 데리고 부산에 다녀오느라 인터넷 접속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밤 열시까지 부모님께 꾸중을 듣고, 삼십 분간 혼자서 울다가 열시 반에 컴퓨터를 켰다.

 

 

 

오후 10:30 search.ne***.com

 

오후 10:35 search.ne***com

 

오후 10:45 http://www.you***e.com

 

오후 10:50 search.ne***.com

 

오후 11:00 G***le http://www.g***le.com

 

 

 

평범한 접속 기록이었다. 그렇게 마음고생을 한 것 치고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다음 날 수업 준비물이나, 게임 공략법 같은 무난한 내용들을 검색엔진에서 찾아본 것 같았다. 그러다 마지막 페이지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오후 11:35 Make Your Wishes http://www.MakeMakeWishes.com

 

 

 

“이건 뭐야? 이런 사이트도 있었나?”

 

도진의 마지막 접속 기록은 Make Make Wishes라는, 해외 사이트에서 끊겨 있었다. 윤주는 인터넷을 꽤 하는 편이었지만 저런 사이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도메인만 봐도 왠지 평범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윤주는 스마트폰으로 그 주소를 입력해 보았다. 2개월 전의 접속 기록이었지만 아직 그 페이지가 살아 있었다. 새카만 화면에 하얀 글씨로 ‘Make Your Wish’이라고 쓰여 있는 그 사이트의 메인 화면을 누르자, 한글로 된 페이지가 하나 더 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머리가 좋아지는 법

 

나는 왜 이렇게 공부가 안 될까?

어째서 나는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없을까?

왜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을까?

 

세상 모든 학생들이 이런 고민을 할 겁니다.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데도 능률이 오르지 않거나, 좋은 결과를 원하는데도 의욕이 생기지 않거나. 부모님들은 책상에만 오래 앉아있으면 점수가 나오는 줄 알지만 사실 공부도 재능이거든요. 타고난 학생들은 아주 적은 효율만으로 큰 성과를 올립니다. 오히려 공부처럼 불공평한 항목이 없지요.

천재들의 뇌는 일반인들과 구조부터 다르거든요.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뉴런인데요. 뇌세포를 구성하는 작은 돌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에 자극을 주게 되면 시냅스가 발생해, 돌기들을 연결하게 되고 뇌의 기능이 뛰어나지는 거예요. 천재들의 뇌는 이 시냅스가 조밀해서 일반인들보다 방대한 정보량이 저장이 됩니다.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죠.

이것은 반복 학습을 통한 자기 계발로도 만들 수가 있는데요. 그래서 습관이 중요한 것이고, 시냅스를 많이 만들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냅스를 약으로도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신비하고 은밀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만 알려 드릴게요.

 

우선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있어야 합니다. 바닥 한가운데에 동그라미를 겹쳐서(◎) 그려 보세요, 그리고 그 위에 의자를 놓으세요. 이어서 검지손가락으로 눈앞에 크게, 사각형을 그려보세요.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뇌의 시냅스가 활성화되니까요. 그리고 열십(十)자 모양으로 그 안에 창틀을 그리세요. 눈앞에 무언가가 계속 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해요. 그러면 눈앞에 그려놓은 창문이 진짜 창문으로 변할 거예요. 그걸 보고 놀라시면 안 됩니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그 창문을 보고 이렇게 말하세요.

 

이만잘아는테릿

말듣속로야머태

줘줄을내를

망니나

 

물론 머릿속에 그 내용이 진심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쪽지를 보고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외울 수 있겠죠? 그리고 눈앞의 창문을 밀어 보세요. 그 안에 공부 잘하는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제대로 하셨으면 그 안에 선반이 보일 겁니다. 아마 거기 여러 개의 약병이 놓여있을 텐데요. 맨 위쪽 칸 세 번째에 있는 파란 약병을 집으세요. 그리고 꺼내세요. 바로 그 약병이 시냅스를 활성화시켜주는 약, 그러니까 머리가 좋아지는 약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그 약을 단숨에 마시세요.   

아, 그리고 그 안의 다른 약들은 절대 건드리지 마세요.

참고로 이 방법은 하루에 네 번만 할 수 있습니다. 오전, 오후 여섯시와 열두시인데요. 한번 실패하면 오래 기다려야 하니까,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게 좋겠죠? 제대로만 하시면 머리가 비약적으로 좋아져, 다음날부터 원하는 만큼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거예요. 자, 그럼 성공을 빕니다.

 

 

 

10.

 

“대체 이게 뭐야?”

 

해괴한 내용이었다. 윤주는 독서량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책장에서 한 번씩 책을 꺼내 읽을 때가 있어서 어른들이 보는 책도 꽤 읽은 상태였다. 뉴런이니 시냅스니 하는 얘기는 자기계발서에도 자주 나오지만 저런 식의 결론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너무 허무맹랑한 얘기 같은데 되게 찜찜하더라고.”

 

“너는 이런 얘기 혹시 들어봤어?”

 

“아니, 나는 처음 듣는데. 무슨 과학 용어 같은걸 얘기하다가 주문으로 가는 건 이상하잖아? 이러면 꼭…”

 

“뒤쪽 얘기가 목적이고 앞은 거짓말 같지.”

 

“그러니까 앞의 얘기는 그냥 낚시인거고, 뒷얘기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인 거네.”

 

“아마 그럴걸?”

 

윤주는 화면에 떠 있는 문서 내용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러니까, 이 글대로라면 성적을 올리기 위해선 이대로 실행을 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창문 안에 약병이 나오고. 이걸 마시면 머리가 좋아지는… 이거 계속 읽어야 돼?”

 

아무래도 황당한 대화를 이어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 어떡하지?”

 

도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경테를 매만졌다. 그 때 어깨너머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해보자.”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 윤주는 고개를 돌렸다. 도우였다.

 

“해보자고.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니야?”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생각해보면 그런 걸 한다고 해서 당장 잃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긴, 지금 바로 할 수 있잖아?”

 

윤주는 작업실 벽에 있는 시계를 가리켰다. 오후 5시30분이라 30분만 기다리면 그 내용을 당장 실행할 수 있었다.

 

“앞 내용들은 어차피 의미 없고, 중요한 건 여기부터야.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서 의자를 가운데에 놓고…”

 

윤주는 문서를 읽으며 그 지시들을 하나씩 따랐다.

 

“눈앞에 사각형을 그려 넣고 안에다 열십자 창틀을… 잠깐만, 이거 몇 분은 외워야 할 것 같아.”

 

의외로 곧장 실행하기는 어려운 내용이었다. 문서에 있는 주문 비슷한 문장은 너무 생소한 글자의 조합이라 아예 입에 붙지 않았다.

 

“나 연습 좀 할게.”

 

윤주는 입술을 움직여 가며 그 내용을 열심히 외웠다. 대강 틀리지 않게 그 문장을 구사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 분이 걸렸다. 오후 5시 55분이 되자, 나머지 두 사람에게 윤주는 밖으로 나가라며 손짓을 했다.

 

“아무도 없어야 된다고 하잖아?”

 

두 사람을 작업실 문 밖으로 내보내고서 윤주는 의자를 한가운데에 놓았다. 그리고 바닥에 동그라미를 겹쳐 그린 후 그 위에 앉았다. 여섯 시가 되자 긴장된 마음으로 윤주는 눈앞 허공에다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려 보았다. 물론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안 되네.”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작업실 문틈으로 훔쳐보고 있던 도현이 실망한 듯한 얼굴로 다가왔다. 괜한 일을 했다 싶어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이딴 게 될 리가 없잖아. 지금 대체 뭐하는 거야.”

 

“근데 제대로 한 거 맞나?”

 

도현의 뒤를 따라 문을 열고 들어오던 도우가 말했다.

 

“아무도 없어야 된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둘이서 문틈으로 계속 보고 있었잖아. 동그라미 그리는 순서도 틀리고. 솔직히 간절한 마음으로 하지도 않았잖아. 설마 이게 되겠어, 하는 마음으로 한 거 아니야?”

 

윤주의 말문이 막혔다. 뭔가 찔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볼 때는 제대로 안했어.”

 

작업실 한쪽 책상에 놓여 있던 가방을 들쳐 매고서, 먼저 걸어 나가며 도우는 말을 이었다.

 

“내일 다시 하자. 어차피 뭐, 오늘만 날인 거 아니잖아?”

 

 

 

11.

 

다음 날, 작업실에 세 사람은 다시 모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아이들까지 끌어들여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