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책부록] 책 속에 빙의했더니 내 섭남이 개복치였던 건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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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본편과는 크게 연관이 없습니다만, 본편의 스포일러가 매우 많이 나옵니다.

-가벼운 개그. IF 시간선.

 

 

 

 

 

“너 때문에 몇 번이나 고생한 줄 알어, 이 배은망덕하고 가슴 크고 얼굴만 이쁜 새끼야!”

 

로바르토 롤피아, 방년 18세. 중앙 정계와는 연이 없으나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금전 감각 덕에 풍족한 부를 자랑한다는 로바르토 남작가의 외동딸이자 후계자.

 

그런 그녀가 난데없이 황궁 한가운데서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남자에게 폭언을 외치며 삿대질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길고 서러운 사연이 있었다.

 

발단 : 눈치 없는 트럭에 치여 단숨에 황천행.

 

전개 : 이후 죽기 직전 읽던 로판에 엑스트라로 빙의함.

 

근래 들어서는 그리 드문 이야기도 아니다. 비슷한 과정을 거쳐 책 속으로 들어가는 여주들만 꼽아도 한 트럭, 아니 트럭은 왠지 재수가 없으니 말을 바꾸자. 못해도 나라 하나 꾸릴 만큼은 될 테니.

 

꽃다운 스무 살, 대학생이란 명판을 달기가 무섭게 쏟아지는 과제의 홍수에 치여 살다 도피 삼아 클릭한 웹소설 하나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었다.

 

‘폭군을 갱생시키는 법.’

 

그 망작은 롤피아의 가슴 속에 바르카스 킬데언, 상체의 특정 부위가 무척 사랑스러운 섭남 하나만을 남겼다.

 

비록 롤피아의 가슴엔 그 남자 하나 달랑 남았고 그 남자에겐 모가지……, 아니 머리만 달랑 남았지만 말이다.

 

처음 빙의 사실을 알게 됐을 때만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건 기회다. 섭남을 최애로 두었던 수많은 빙의 여주들이 그런 꿈을 꾸곤 하지 않던가.

 

‘이 기회에……! 내 섭남을 남주로 만들고 말겠어……!’

 

결과부터 말하자면 아주 제대로 텄다.

 

부친을 조르고 졸라 여주의 시녀가 되는 데 성공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는 짓거리……, 아니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여주도 무사히 빙의에 성공한 듯했다. 이대로 착실히 시녀 역할을 수행하며 기회를 노려보자. 이 순간을 위해 현존하는 모든 로판을 읽어 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숱한 회귀물 빙의물 환생물을 독파해왔다. 빙의물의 클리셰 정도는 확실하게 꿰고 있다 이거다.

 

‘후후후……. 어이어이 기다리라구 여주쨩? 오늘부터 내 이름은 더 마담 뚜 롤퍄 썰틴 글로리어스 3세……. 한마디로 자비 없는 중매쟁이라고 할 수 있지……! 이 몸이 직접 네 인생의 가장 완벽한 남주를 점지해줄 테니……!’

 

라고 한껏 거들먹거렸던 것도 초반 3회차로 끝이었다.

 

어느덧 99회차.

 

“로바르토 영애. 지금 감히 신성한 일터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겁니까. 이쪽과 이쪽, 그리고 저쪽. 그 옆과 뒤와 앞과 밑. 덧붙여 이쪽 문틈과 저 안쪽의 창틀. 모두 단 한 톨의 먼지도 발견되어선 안 된다고 분명 누차 말씀드렸을 텐데요. 제대로 확인은 하고 있는 겁니까? 청소 상태가 심히 불량하지 않습니까!”

 

이따위로 위생 상태가 엉망인 곳에 시타라를 모시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그분의 시녀입니까! 원작의 히든 남주 어쩌고이자 선임 시녀인 페르피나가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어느덧 익숙해지다 못해 지겨워져 버린 구박 레퍼토리, 그 1번이다.

 

‘그럼 뭐 시녀가 아니면 시다바린가.’

 

하는 일로 따지자면 거기서 거기긴 했다. 그보다.

 

‘쟤 섭남 아니었나. 왜 하는 짓은 맨날 신데렐라 새언니지.’

 

신데렐라 새언니도 이것보단 참신한 레퍼토리로 사람을 괴롭힐 텐데.

 

‘요즘처럼 각박한 경쟁 사회에 구박 하나 똑바로 못하다니 떼이잉 쯧쯔. 그러다간 남주로 취직을 못 한다구, 어이.’

 

하기야 원작에서 이미 제대로 된 섭남 노릇 한번 못 해보고 엔딩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여기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그 미래가 뻔히 보였다. 자신처럼 비정한 중매쟁이도 가끔은 사람답게 동정을 베풀어야 할 때가 있는 법. 약속된 미래의 남주 실직자를 안타깝게 여겨주도록 하자. 롤피아는 흑흑 우는 시늉을 하며 열심히 먼지떨이를 휘둘렀다.

 

그러니까 맹세코, 그 어떤 소란 속에서도 꿋꿋이 (심지어) 깊게 잠들어 있던 여주를 먼지떨이로 용맹하게 내려친 것은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

 

청소하라며.

 

지난 이십 년 인생을 모조리 걸고 솔직히 고백건대 이 방 안에서 제일 더러운 게 여주인 걸 어쩌란 말인가.

 

“……롤빵 영애. 한 번만 더 내 낮잠을 방해하면 영애의 롤빵을 소보루빵으로 만들어주겠어요.”

 

“…….”

 

무슨 차인데, 그거!

 

물론 롤빵과 소보루빵에는 무척 큰 차이가 있다. 먹어보면 안다. 어쨌거나 예쁘게 잘만 말아 틀어 올린 남의 머리더러 툭하면 롤빵 타령이었다.

 

로바르토 롤피아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신비한 청람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다. 빙의 여주들이 흔히 그러하듯, 굉장한 미인이었다. 엑스트라지만. 대체 갈색 계열도 아닌 이 머리카락의 어딜 보고 롤빵을 떠올리는 건지 의문이었다.

 

“거기까지. 롤빵 영애는 오리가 아니고, 나는 사람이고. 오리로 전직할 게 아닌 이상 그 오리 주둥이 공손히 잘 간수하는 게 좋을 거야.”

 

“……밥 드려요? 메뉴는 오리고기?”

 

“정답. 눈치가 빠르군. 훌륭한 자세야. 아주 마음에 들어. 당장 대령하세요.”

 

정정.

 

알 것도 같다. 그냥, 여주는 세상의 모든 게 다 먹을 걸로 보이는 거다. 이쯤 되면 작가가 아니라 평범한 코리아의 가부장이 빙의한 거 아닌가요? 왜 삼시 세끼에 야식까지 챙겨 먹으면서 틈만 나면 밥 줘 타령이냐고. 새삼스럽게 원작 설정에 의문을 제기하며 롤피아는 주섬주섬 침대에서 내려왔다. 여주가 정확히, 그리고 가뿐히 막아내고 있던 먼지떨이를 고이 회수했음은 물론이다.

 

맨날 남주더러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냐고 욕하더니, 이건 어째 한 술 더 떴으면 더 떴지 절대 모자라지 않았다. 분명 코까지 골면서 잠들어 있었는데 눈도 안 뜨고 잡아내다니.

 

다시 말하지만, 고의로 내려친 건 아니다. 롤피아는 시녀로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로바르토 영애. 당신 방금……, 무슨 수작질이었습니까……?”

 

는 그딴 거 알게 뭐람. 저 밥 가지러 가요! 롤피아는 꽁지가 빠져라 날아났다.

 

도대체가, 이 망작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히든 남주는 사사건건 엑스트라 시녀에게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고 여주는 시간마다 밥 줘만 외쳐대는 중이며 롤피아의 섭남은…….

 

벌써 아흔여덟 번째 죽고 있었다.

 

 

 
* * *
 

 

 

[이보세요, 롤빵 영애.]

 

[……세계 최고의 롤빵, 당신의 부름을 받아 지금 여기 등☆장!]

 

데헷☆

 

1회차, 여주의 신뢰를 사 그 측근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고기를 종류별로 어찌나 구워 바쳤던지 이건 뭐 로판 엑스트라가 아니라 수라간 나인으로 빙의한 게 아닌가 싶었을 정도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내가 책 속에 빙의했더니 대장금?!’ 같은 타이틀이나 덧없이 되뇌며 밥상 갖다 바치기만 한 열흘쯤 부지런히 했을 때였다.

 

그녀를 가까이 부른 여주가 속삭였다.

 

[이 고기에……, 뭘 탄 거지?]

 

[고, 고기……. 고기를 고기로 구웠을 뿐이온데 뭘 탔냐고 하시면 그냥……, 고기를 고기 하게 구워서 고기가 된 것이온데.]

 

[과연……, 타고난 요리 천재는 따로 있었군. 그대를 지금부터 두근두근 요리왕 비룡으로 임명한다.]

 

뭔데, 그거! 그보다 뭔가 섞였잖아! 미묘하게 잘못된 콜라보레이션이잖아!

 

[요리왕 롤빵.]

 

여주가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왠지 그 고기에 독이나 탔어야 했다는 비뚤어진 결심을 하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그 맞은편에선 여유롭게 앉아 찻잔을 기울이던 킬데언이 훗 하는 미소와 함께 ‘사람을 보고 롤빵이라니……, 못 말리겠군.’ 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갖은 노력 끝에 가까스로 만들어낸 여주와 최애의 티타임이다. 실로 흐뭇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놈의 고기 타령만 아니라면.

 

다음 순간, 갑작스러운 벼락과 함께 킬데언이 사망했다.

 

앗 할 틈도 없이 눈을 뜨자 빙의 첫날로 되돌아가 있었다.

 

‘앗 시발 꿈……?’

 

이라고 하기엔 또다시 롤피아의 침대 위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회귀를 한 모양이다. 그간의 로판 독자 짬밥을 참고하여 침착하게 결론을 내린 롤피아는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한번 황궁으로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 뭐하나.

 

여차저차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뭘 해볼 틈도 없이 또 킬데언이 사망했다.

 

2회차.

 

3회차.

 

4회차…….

 

너무 황당해서 그 원인 같은 건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 망작에 일말의 기대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망작이……, 괜히 망작이 아니었구나……!’ 하는 정도밖에는.

 

원작도 심심하면 이승 탈출 넘버원이더니, 이게 요단강 투언지 로맨스 판타진지. 위화감은 10회차를 넘어가고 나서야 생겼다.

 

‘얼랄라?’

 

그러고 보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죽는 인물을 본, 아니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롤피아는 삐그덕대는 고개를 돌려 신나게 닭 다리를 뜯고 있는 여주를 쳐다보았다.

 

‘쟤 아냐.’

 

그건 바로 너……, 빰빰빰.

 

마지막 장을 덮고 지나치게 빡이 친 나머지 내용을 죄 까먹어 버리긴 했지만. 사인을 명확히 파악한 건 채 반도 되지 않지만. 어째 패턴이 익숙한 것이다. 우선, 마른하늘에 날벼락. 그다음, 호수에 풍덩.

 

[야! 너는 무슨 기사 남주가 호수에 빠져서 익사를 해!]

 

5회차쯤이었던가. 빙의 첫날로 되돌아와 깨어나기가 무섭게 허공에 삿대질을 해대며 씩씩거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아무리 망작이라도 엄연히 캐릭터 설정이란 것이 존재할진대, 제국 제일의 기사에 황제의 검 어쩌고 하는 화려한 수식어가 잔뜩 붙어 있는 서브 남주가 고작 호수에 풍덩 한 번 했다고 즉사할 리가 없는 것이다.

 

조상님이 물려주신 쎄함 레이더가 힘찬 적신호를 발하며 등골에서부터 섬뜩하게 소름이 내달렸다. 야, 설마……? 이거 설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범인이 허공을 가르고 나타나 여주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아 밥 먹던 사람 체하겠네!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 모! ……를 리가 없으시겠죠. 그럼요. 아무렴, 폐하신걸요.]

 

그렇다. 범인.

 

할아버지 이름 걸기 좋아하는 소년 탐정은 가는 곳마다 사건이 폭죽처럼 터지고, 이 망작에선 모든 사건의 범인이 단 한 명으로 귀결된다.

 

지나가는 날파리의 발가락 때만도 못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길로 롤피아의 존재를 스치듯 인지해낸 남주가 더없이 불길한 웃음을 머금었다.

 

‘마, 망했다.’

 

그 날, 킬데언은 정원에서 발이 걸려 넘어졌고 그대로 영영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 조절하기라도 한 듯 외견만은 이를 데 없이 깔끔한 죽음이었다. 어디선가 여주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 작품은 전체 관람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네놈을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깨끗하게만 죽이면 다 해결되는 줄 알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 망작의 최종 보스, 아니 남주는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정신 나간 싸이코패스의 손아귀에서 내 최애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 처음 시작은 내 최애를 남주로 만들어주겠어! 였는데 갈수록 킬데언 일병 구하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뭔가 꼬여도 대차게 꼬여버린 것이다. 안 되겠어, 이쯤에서 최애도 나도 탈출하지 않으면……!

 

그렇게 28, 9회차쯤 되었을 때였다.

 

[그러다 당신 뒤진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하고 있는지 알긴 알어?!]

 

참다 참다 못해 대놓고 설득을 시도한 롤피아에게 킬데언은 말했다.

 

[그것이 검의 길이라면, 그 또한 수긍할 뿐입니다.]

 

이런 벽창호 개복치 같으니…….

 

남이야 용을 쓰거나 말거나 정작 열심히 죽고 있는 당사자가 협조할 생각이 없으니 무슨 수를 내든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한 포기 김치를 담가내듯이……. 배추김치가 커피라면 선인장 김치는 T.O.P……. K국민의 소울을 발휘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고심하던 롤피아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원작을 비틀려고 해서 그런 건가……!

 

원작을 강제하는 어떤 힘이 있어서, 흐름이 틀어지자 그 원인을 제거하려고 남주를 움직인 게 아닐까?

 

[그딴 거……,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 멀리 어디선가 한 요정이 구슬픈 눈물을 찍어내고 있단 것도 모른 채, 롤피아는 신나게 계획에 착수했다. 이 방법이면 개복치, 아니 킬데언을 살릴 수 있다!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두 가지나 잊고 있었다.

 

첫째, 원작 내용대로 가더라도 킬데언은 어쨌든 한 번은 죽는다.

 

둘째, 위 가설대로라면 롤피아의 존재부터가 이레귤러다. 이미 원작대로 가긴 글렀단 소리다.

 

당연한 수순으로 롤피아의 계획은 실패했다.

 

원작대로 가기는커녕, 흐름을 되돌리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틀어지기만 하더라. 아예 원작에 끼어들지 않고 로바르토 성에 눌러앉는다는 선택지도 실행은 해보았다. 그러나 어김없이 킬데언은 죽었고, 시간은 되돌아갔다.

 

그렇게 버텨온 지도 어느덧 99회차. 이제는 사인도 궁금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방금 킬데언이 또 사망한 모양이다.

 

롤피아는 하도 자주 본 탓에 어느샌가 현실 세계의 방만큼이나 익숙해져 버린 로바르토 가문의 자기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 망한 로판…….”

 

이쯤 되면 100회차 기념 자축 파티라도 열어야 할 판이었다.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열지 못할 파티 대신 롤피아는 또다시 짐을 챙겨 황궁으로 향했다.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라, 이젠 부친을 설득한다는 절차조차 필요치 않게 되었다. 숙련된 솜씨로 커튼을 엮어 창틀에 매단 후 능숙하게 성벽을 타며 롤피아는 생각했다. 이게 대체 빙의 여주인지 닌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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