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전야

독립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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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간부로 화성은 구행성으로부터의 완전 분리 독립을 선언한다.”

 

“우리는 역사적인… 인류 공영의….블라블라…”

 

 

“오… 결국 하는 건가.”

 

“정치하는 놈들 때문에 괜한 이주민만 피해보는 거 아니야?”

 

“이주민 뿐인가? 상관도 없는 젊은 지구 애들한테 총 들쳐메서 보내고 지들은 또 어디 숨어서 작당 모의나 하고 있겠지.”

 

70대 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녀의 혀 차는 소리가 자신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발길질처럼 느껴진 진은 얼른 고개를 숙인 채 은행을 빠져 나왔다. 서기 2190년, 지구의 인류는 자신의 별을 넘어서 달을 제외한 4개의 행성에 발자취를 남겼다.

화성은 인류가 달 이후 첫 번째로 관심을 가졌던 행성인데, 그래도 가 볼 만하다고 할 수 있는 별 중에서는 인류의 생존 가능성이 그나마 높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100년에 가까운 이주민들의 도전과 좌절의 역사는 이제 교과서에 나오는 무용담 정도의 이야기가 되었고, 화성은 1억800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하나의 거대한 위성 국가가 되어 있었다.

정치, 경제를 포함한 모든 국가 시스템이 자치화된 지 오래지만, 아직 지구령 화성 자치구라는 꼬리표는 떼지 못 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누구도 불만은 없었다. 자기들 일에 신경쓰기도 바쁜 지구인들은 화성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제 때 자원을 보내고 보고서만 잘 내면 되는 조그만 섬 마을의 우체국같은 곳이 화성이었다.

태양계 시대에 대한 음울한 전망을 쉴 새 없이 내놓던 비관론자들의 옹알이가 무색하게도 어머니 지구의 자원은 2200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석유를 내놓는 맷돌이라도 있는 건지 대기 오염의 주범이라던 화석 연료는 2050년이면 고갈될 거라던 과학자들의 예상을 껄껄 비웃으며 지금까지도 펑펑 쏟아져 나왔다.

이에 인류는 돈과 시간만 잡아먹는 대체 연료를 연구하는 대신 대기 오염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돈을 쓰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다. 행성 이주 계획도 그랬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에 대한 대비책으로 준비하기 시작한 원대한 우주 여행의 첫걸음이었는데, 의외로 지구의 인구는 넘을 듯 넘칠 듯 하면서도 70억을 넘지 않았다.

위대한 자연의 순환 고리는 자기가 우주 유일의 존재인 줄 아는 귀여운 인간들의 머리 위에 있었던 것이다. 괜한 호기심과 공명심으로 우리의 땅이 아닌 곳에 발을 들여놓은 개척민들은 우리 아닌 다른 아이들을 지키는 어머니들의 호된 텃세를 견뎌야만 했다. 결국 1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마저도 해내고야 말았다.

화성에 그들만의 정치와 사회, 문화가 갖춰지고 ‘화성인’이라고 할 만한 독립적 공동체의 기틀이 잡힌 건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결국 이 곳에도 모임이 생기고 모여서 파벌이 되고 집단들이 모여 국가가 되었다.

나름 거창한 이름을 가진 태양계 연합에서는 화성에서의 일탈 행위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괜히 건드렸다가 지구로 돌아오겠다고 하면 그게 더 큰 문제 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물처럼 보내오는 자원도 그것들을 받아오기 위해 보내는 우주선들의 수리와 유지 비용을 생각하면 남는 게 없었다. 이런 상황은 화성 뿐 아니라 제 2 위성인 목성이나 글리제667c도 마찬가지였다. 글리제에서는 아직도 부족한 시설 확충과 미 개척지 탐험, 연구를 위한 자원과 인력을 달라며 둥지 속 아기새처럼 삐약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굳이 쿠데타라도 벌이는 것처럼 기습적으로 독립 선언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최근에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진은 우유와 생크림으로 만든 슬러시를 쭈욱 빨았다.

 

‘비서 실장한테 연락을 해 봐야 하나… 나 말고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이 또 있었던가?’

 

진은 전용 통신망이 지구의 정보기관에 해킹을 당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연락은 해 봐야 했다. 진은 그럴 책임이 있었다. 지금 늠름한 얼굴로 화성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만약 정말로 해야 했다면) 화면에 나오는 상기된 얼굴의 군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달의 네 번째 탐사 기지 겸 휴양 시설인 안타라스에서 생크림 슬러시를 들고 있는 멍청한 얼굴의 남자가 바로 화성 민주 공화국의 5대 대통령, 류 진이었다.

 

‘내가 언제 저런 지시를 했던가? 전자 서명을 홀리한테 위임하고 왔나?’

 

비서 실장인 마가렛 홀리는 저승에 가도 일정대로 행동할 사람이었다. 쓸데없는 규칙에 목숨 거는 스타일은 내 위에 있으면 피곤하지만 바로 밑에 두면 이보다 편할 수 없다. 진이 그녀에게 군사적 행동을 포함한 모든 결정권을 갖는 군 통수권 서명을 위임했다 해도 그걸 바로 저렇게 사용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밖으로 나돌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한없이 충직한 비서 실장에게 저런 피곤한 일을 떠넘기고 올 리가 없었다.

책임감이 부족하고 약삭빠르지도 못한 지도자지만, 그래도 그 정도로 후레자식은 아니었다. 초고속 장거리 우주 비행 후엔 잠깐 동안 기억과 인지 능력에 약간의 문제가 생기곤 했다. 진은 지금 자신의 기억에 대한 믿음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보통 며칠간의 행적을 저장해 둔 메모리 칩을 가지고 다니는데, 지금은 프람의 방에 있었다.

일단은 장 보기를 중단하고 메모리를 확인해보는 수 밖에 없었다. 몇 분 째 열변을 토하고 있는 저 화성 독립 선언이 만약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면 그건 바로 쿠데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 빈손이에요?”

 

작은 체구의 프람이 진의 가슴팍에 달려들어서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렸다.

 

“밖에 왜 나갔는지 잊어버린 거에요? 아직 시차 적응이 덜 됐나…”

 

진은 말없이 TV를 켰다. 쉼없이 종알거리던 프람의 활기찬 음성이 독립을 천명하는 근엄한 목소리에 묻혀 점차 활기를 잃어갔다.

 

“어… 저게 무슨…”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여기 오기 전에 내가 무슨 말 한 거 있어?”

 

“아니요. 평소하고 똑같았는데…”

 

“화성으로 연락을 해야겠어. 너한테 피해가 갈 지도 모르니 밖으로 나갈게.”

 

프람이 뭔가 결심한 얼굴로 진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눈 빼곤 뭐든 작은 프람의 손은 일반인보다 체온이 4도나 낮아서 시원했다.

 

“아니, 그냥 여기서 해요. 요즘 밖에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요.”

 

진은 잠시 고민했지만 일 년에 한 번 쓸 수 있는 휴가에 겨우 만날 수 있는 연인과 이런 일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기에 프람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침실로 들어갔다.

대통령 전용 통신 장비에 본인 인식과 로그인을 마친 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얼굴을 내밀고 있는 홀리의 얼굴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챌 수 있었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비서 실장에 임명했을 때 봤던 표정이 화면에 나타났다. 당혹스러움과 그녀답지않은 긴장, 거기에 평소에 절대 흘리지 않는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방송을 보고 계시겠군요. 초안은 어제 비상 대책 위원회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어, 그런데 광속 비행 때문에 아직 기억이 완전치 않아. 이거 내가 계획한 건가?”

 

-아… 그렇다면 기억이 돌아오신 후에 다시 연락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는 제가 관여하기 힘든 부분이 많군요.

 

“관여라니… 그럼 하나만 알고 있으면 안 될까? 지금 저 이벤트는 내가 계획한 게 맞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대통령씩이나 되시는 분이…

 

홀리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구체적이고 심각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도청되고 있거나 누가 옆에서 듣고 있는 게 확실하다는 걸 느낀 진은 아무 말 없이 통신을 종료했다. 화성에서 달까지의 5천만km가 넘는 장거리 여행을 2시간 안에 끝낼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이 몇 년 전 개발되었다. 문제는 인간의 몸이 속도에 적응을 하지 못 해 이런저런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이었는데, 부분적인 기억 상실, 심한 두통, 감각 둔화 등의 증세가 있었다. 보통은 한 나절 쯤 지나면 대부분의 증세가 사라지니까 앞으로 여섯 시간에 화성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었다.

 

‘내가 여기에 온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겠지. 홀리는 제외하고, 위성의 수비대와 지역 방위군이 움직였을까?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낌새는 없었는데… 오래전부터 준비한 이벤트일 지도 모르겠네.’

 

기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진에게 프람이 커피를 건네주었다. 진이 질색하는 쓰디쓴 맛이 혀를 타고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프람은 생각에 잠겨있는 진의 무릎에 살짝 올라와 앉았다. 진의 다리 위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산책 나가자고 조르는 강아지 같았다. 진은 프람을 품에 안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프람의 초록색 눈 사이에 있는 갈색 눈동자가 좌우로 깜박거렸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수명 연장과 질병 정복을 위해 수 많은 의료적 실험을 스스로에게 해 왔는데, 그 결과가 프람과 같은 돌연변이 혹은 신인류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의학의 발전으로 질병의 정복이 어느 정도 가능해진 2100년 초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들은 초기엔 2차 대전 당시의 유대인 같은 박해를 받았지만, 그 수가 10억을 넘어가면서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통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적 능력과 조금 떨어지는 지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주 드물게 그와 반대되는 프람과 같은 경우도 있었다. 프람은 인간의 나이로 치면 20대 후반 정도의 나이인데 체격이나 운동 능력은 15살 인간의 수준을 넘기지 못 했다. 대신 그녀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공감력, 풍부한 감성을 가진 따뜻한 사람이었다. 신인류는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범지구적 인권 공동체 GHRC(A Global Human Rights Community)를 만들었는데 프람은 그 단체의 홍보팀 직원이었다.

진은 휴가를 위해 찾은 달 기지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는 화성의 행정부 수반이자 한 아이의 아빠고, 유부남이었지만, 그가 태양계 연방의 외교 정책 담당자인 아내 카트리나 예닐로바의 남편이며 오랫동안 별거중이라는 건 TV가 없는 목성의 이주 노동자들도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프람은 자신의 딸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그녀는 진이 만난 어떤 사람보다도 재미있고, 사려 깊으며 따뜻했다. 카트리나가 프람 반 만큼만 따뜻했어도… 진은 순간 머리에서 번뜩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아내 카트리나와 진은 둘만 연결이 가능한 비상 통신 회선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 지라 막혔을 수도 있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카트리나는 신호가 몇 초 울리기도 전에 홀로그램 영상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은 오늘따라 자신을 기다린 것처럼 바로 나타나주는 여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전히 사이가 좋네.

 

카트리나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프람이 카트리나의 진한 아이라인에 감춰진 적의를 눈치채고 진의 등 뒤로 숨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 이렇게 물어보는 게 예의도 아니고 좀 웃기기도 하는데 화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 좀 해줄 수 있어?”

 

카트리나는 잠시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다물고 진을 지켜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이 지금 나한테 장난을 걸 때는 아니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 어느 시점부터 얘기를 해줘야 할 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건 이틀 전 새벽, 화성에 파견된 연합의 실사단 인원들이 기습적으로 감금이 된 후부터야. 화성의 자원 채굴 현황과 근로자들의 복지 및 근무 만족도를 조사하던 중이었는데 연락이 끊겼지. 화성 정부에서는 우리의 공식적인 외교 채널과 당신하고 연결되는 핫라인을 어제 14시부로 모두 끊었어.

연합 정부는 지금 비상 대책 회의 중이야. 노인네들은 오랜만에 싸울 거리가 생겨서 신났어.

그래도 우리 같이 산 정이 있는데 나한테는 얘기 해줬어야지. 왜 그런 거야?

 

진은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시고 물로 입 안을 헹구었다. 목구멍에서는 계속 쓴 맛이 올라왔다.

 

“이미 다 알면서 시치미 떼지 말자.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 거라고 하길래 지니움으로 할까 고민중인데, 매장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모르고 대규모 채굴 시 화성의 지반에 어떤 영향을 줄 지도 더 연구를 해 봐야 돼.”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대뜸 독립 선언부터 한 거야?

 

“그게 말인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한 것 같아.”

 

가칭 지니움이 발견된 건 16일 전이었다. 정부 청사의 따분한 생활에 지쳐가던 진은 전공을 살려 화성의 지층과 지표 생물 연구를 위해 떠나는 탐사대와 동행하여 화성의 지하로 내려갔다가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광물을 발견했다.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별다른 촉매 반응도 없이 엄청난 빛과 열을 내뿜는 이 광석은 향후 인류의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석유를 대체하기에 충분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기에 진과 화성의 정부 요인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문제는 지구에서 파견된 실사단에서 새로운 광물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며 간섭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이 광물에 대한 권리를 독점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지구의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들의 과도한 간섭은 화성 정부 요인들, 특히 군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진은 정부 수반으로서 양측을 이해시키려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내가 여기로 출발하기 전까지는 전혀 이런 낌새가 없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아마도 내가 화성을 떠나고 나서 일사분란하게 일을 추진했겠지. 그런데 대체 누가…?”

 

-아직 아빠를 찾는 아이와 28년을 같이 산 옛정을 생각해서 조금 더 알려줄게. 지구에서는 화성과 동시에 지니움?(그 이름 맘에 드니까 그걸로 해) 아무튼 그 광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 귀찮은 짐이라 생각하면서도 눈을 떼지는 않는게 노땅들의 대단한 점이지. 정보원의 보고에 의하면 화성의 누군가가 지구측과의 협상을 원했던 것 같아. 정치적 야망을 가진 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대가를 바란 걸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던 간에 말이야.

 

카트리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의 뒷편으로 축구장 몇 배 넓이의 운동장과 공을 차며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카트리나와 진의 딸 류 연도 있었다. 빛을 받으면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딸의 충성한 검은 머리카락은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다.

 

-당신을 그냥 놔두려 하진 않을 거야. 당신이 쿠데타의 수괴던 코 앞에서 벌어지는 반란도 눈치채지 못 한 멍청한 지도자던 말이야.

 

진은 멍청한 지도자가 자신에게 꼭 맞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에 눈이 먼 멍청이라고 해도 해야 할 일은 있었다. 화성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 광물 때문에 화성 사람들을 전쟁에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화성의 개척민들은 다른 별의 이주민들과는 달리 대부분 스스로 선택해서 온 사람들이었다. 당시 지구인들은 늘어난 수명과 넘쳐나는 자원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두 가지를 한꺼번에 소모시키는 방법으로 폭력을 선택했다. 끝도 없는 혐오와 이념, 종교의 다름으로 인한 분쟁이 지구 곳곳에서 벌어졌다.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폭력에 지친 사람들에게 화성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순수함이 지나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긴 했지만, 지금도 화성인에게는 인종이나 종교로 사람을 구분짓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에겐 모두가 화성인일 뿐이다.

그리고, 화성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싸움을 원치 않는다.

 

“부탁이 있어. 2억에 가까운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당신이 위원회의 무력 사용 결의를 조금만 늦춰줘.”

 

-거기서 뭘 어쩌게? 그냥 어디 조용한 곳에 숨어있는 게 낫지 않겠어?

 

“나 화성의 대통령이야. 내가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연금도 받아야 되는데.”

 

카트리나의 코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기분이 좋을 때 내는 버릇이었다.

 

-내 편이라봐야 몇 명 안돼. 너무 기대는 하지마.

 

“고마워. 연이를 잘 부탁해.”

 

카트리나가 뭐라 하려는 걸 듣지 않고 통신을 종료한 진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에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진이 홀리에게 자신의 서명을 위임했다면 이제 대통령은 사라져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진이 타고 온 것보단 느리지만, 화성 방위군에도 고속 비행정이 있었다. 9시간 정도면 달까지 올 수 있으니 지금 쯤 진을 노리는 암살자들이 달에 도착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은 자신의 통신기가 아직 사용 가능한지 확인했다. 그 와중에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가는 완두콩만 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진이 장거리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