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 라즈베리 초콜릿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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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별 일 없었어?”

 

하늘색 점프수트를 입은 호랭이가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기린부터 찾았다. 어젯밤에 그 난리통을 치르고도 기린을 이 집에 그냥 두고 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칸자에게 물릴 뻔한 위기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실이 마음을 뒤흔든 것일까. 기린의 얼굴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기린도 길쭉한 호랭이가 테트리스의 일자 블록처럼 반가웠다.

 

“저것이, 나는 보이지도 않냐?”

 

“마고야 항상 잘 지내잖아. 하하!”

 

마고는 콧방귀를 뀌고는 소파 옆 흔들의자에 앉아 티비를 켰다. 호랭이가 큼직한 종이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마고를 달랬다.

 

“에이, 삐지지 말고 이거 함께 먹자.”

 

호랭이가 상자에서 꺼낸 것을 본 기린은 눈이 돌아가고 침샘이 폭발했다. 나이테가 도드라진 원목 테이블 위에서 영롱한 자태를 드러낸 그것은 라즈베리가 잔뜩 올라간 초콜릿 케이크였다. 비원에서 이런 걸 보게 될 줄이야! 사과, 고구마, 눈알떡, 바나나에서 너무 비약적으로 수준이 올라간 것 아닌가 싶긴 했지만, 먹는 행위가 생존이 아닌 유희를 위한 것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내 생일을 오늘로 바꿔야겠다. 기린은 서둘러 접시와 포크를 챙겨 테이블 앞에 앉았다.

 

“웬 케이크냐? 요즘 과소비가 심하네?”

 

마고도 놀란 표정이었다.

 

“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호랭이가 거들먹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타보네 빵집 있잖아. 13지구하고 12지구 경계에 있는. 어제 그집 출입문 바로 앞에 사낭이 생겼거든. 그래서 손님들이 드나들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지, 뭐야. 평소에 고깝게 굴었던 게 짜증났던 참에 잘 됐다 싶었지. 나한테 사낭을 옆으로 좀 옮겨주면 안 되겠냐고 하길래, 이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다, 삼일만 참아라, 라고 했지. 웃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는데 조금은 웃었을지도 모르겠어.”

 

호랭이는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고소한 기분이 들었는지 마음 놓고 낄낄 웃었다. 이럴 때면 산파 외에 다른 사자는 사낭에 손을 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근데 오늘 노준이 놈이, 아, 노준이는 태준이가 부리는 조수 중에 한 놈이야. 고준이랑 노준이. 셋이 바보 트리오지. 조수가 하나 더 들어오면 도준이라고 부르려나? 그래봐야 여전히 바보 콰르텟이겠지만. 아무튼, 노준이 놈이 그 사낭을 12지구로 끌고 가려다가 나한테 딱 걸린 거야.”

 

태준은 기린이 비원에 도착한 첫날에 만났던 빨간 두건 근육남인데, 호랭이의 옆 지역인 12지구를 담당하는 산파였다.

 

“빵 사러 왔다가 출입문이 막혀 있어서 옆으로 치우기만 하려 했다고 우겼지만, 그놈 모터바이크에 캐리어까지 달고 있는 폼이 누가 봐도 사낭을 싣고 옮기려고 한 거였단 말이지. 물어보나 마나 빵집 사장 타보가 태준이한테 부탁을 한 거였을 테고.”

 

호랭이가 신이 나서 계속 떠드는 바람에 기린은 접시를 든 채 케이크를 바라보며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간절한 눈빛을 보내 봤지만, 호랭이는 자기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집중하는 초롱초롱한 표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남의 구역에 있는 사낭을 훔치려고 한 놈이나 그걸 의뢰한 놈이나 내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는 것쯤은 짐작했겠지. 둘 다 스트레스로 몸이 점점 밝아져서는 보호 고글을 써야 할 지경이었어. 가만 두면 진짜로 광화(光化)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내가 합의안을 제시했지.”

 

“광화가 뭐야?”

 

기린은 오늘따라 갑자기 수다쟁이가 된 호랭이의 이야기가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득했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케이크를 먹는 시간이 몇 초 정도 더 늦어지게 되었다.

 

“아, 우리 사자들은 보통 죽으면 빛을 내뿜고 소멸하거든. 그걸 광화한다고 해. 조금 전에 한 말은 농담이야. 스트레스 좀 받는다고 진짜로 광화하는 사자는 없을걸. 사자가 죽는 방식은 광화 외에…”

 

“그래서 제시한 합의안이 이 케이크인 거야?”

 

괜한 질문에 대한 답이 길어질 조짐이 보여서 기린이 얼른 말을 자르고 케이크로 화제를 돌렸다.

 

“타보한테는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이 케이크를 받는 걸로 합의를 봤지.”

 

“뭐가 또 있어?”

 

“태준이도 그냥은 못 봐주지. 이거 내가 산파국에 문제 삼으면, 그놈 산파 자격까지 위태롭다고.”

 

“그 근육남한테는 뭘 받았는데?”

 

“아직 받은 건 아니지만,”

 

생각만 해도 기대가 벅찬 듯이 호랭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모터바이크 두 대를 요구했어.”

 

기린은 물론, 별 관심 없는 척 티비를 보던 마고까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거 엄청 비싼 거 아니었어? 여섯달 산파 일등 해야 살 수 있다며?”

 

“태준이는 부자니까 괜찮아. 바보 조수들도 턱턱 사주는데, 산파 자격 심의에 불려가는 것보다는 사실상 싸게 먹히는 거지.”

 

“근데 왜 두 대야?”

 

“내 것 하나, 네 것 하나.”

 

호랭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기린은 갑작스런 고백이라도 받은 기분이 들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빵집 주인과 근육남을 협박해서 뭔가를 뜯어내는 와중에 기린에 대한 생각이 호랭이의 마음 한켠을 차지했다는 뜻이 아닌가. 기린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모터바이크를 타고 호랭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비원의 방방곡곡을 라이딩 중이었다.

 

“내 생각은 안 났냐?”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