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6화 -“제가 잡혀가면 됩니다! 까짓것 영국 감옥에서 견문 좀 넓혀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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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이도 저리 해맑게 웃고 있었을 테지.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죄다 내려놓은 채 울며불며 매달리던 수진의 부모 얼굴이 겹쳐 떠올라 독 소장은 더 이상 그림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얇은 엽서 한 장이 독 소장과 승주의 마음을 천근만근 짓눌러 버렸다.
 

3

 

승주는 다시 스미스 집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자료 수집 차원에서 용의자 얼굴 사진 정도는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후드티에 헤드폰 패션으로 동네 청소년인 양 위장하긴 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후들거렸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스미스를 향해 들킬세라 후다닥 셔터를 누른 후 곧장 발길을 돌렸다. 본머스에서의 탐정 행각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독 소장과 승주는 본머스 민박을 정리하고 런던으로 올라왔다. 경비 절감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리슨 박에게 연락해 숙소를 부탁했다. 해리슨 박은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면서 반갑게 맞아줬지만 독 소장은 런던에 온 진짜 목적은 여전히 숨긴 채 세미나 타령으로 눙쳤다.

 

두 사람은 짐만 내려놓고 곧장 레스터 스퀘어로 향했다. 점점 시간싸움이 돼가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덮쳐올수록 독 소장과 승주는 몸을 더 혹사시켰다. 비통한 잡념이 끼어들 틈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레스터 광장을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길거리 화가들마다 투명케이스에 담긴 그림엽서를 보여주었다. 수제엽서기 때문에 판매한 사람은 바로 알아볼 터였다. 서너 번째에 만난 화가가 그림을 알아봤는데, 자기가 그린 건 아니고 아는 사람의 작품이라고 확인해 줬다. 트라팔가 광장으로 옮겨갔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도 그쪽으로 이동했다. 주변을 다급히 살피던 중에 당사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림엽서를 좌판에 잔뜩 깔아놓은 채 엠피쓰리를 듣고 있는 아가씨였다. 승주가 그림엽서를 보여주며 본인 작품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좌판 속에서 엽서 하나를 들어올렸다. 발랄하게 웃고 있는 빨강머리 소녀 얼굴. 수제품이라 구도는 약간 달랐지만 수진의 엽서와 분명 똑같은 그림체였다.

 

그림엽서 하단에 찍힌 화가의 인장도 동일했다. 독 소장과 승주는 반사적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뒤죽박죽 감정이 염통 언저리에서 부글거렸다. 뭔가 물꼬가 트이는 것 같은 예감이 들자, 엽서를 갖고 나왔다는 자책감은 아득히 증발해 버렸다.

 

승주가 사진 한 장을 꺼내며 화가 아가씨에게 물었다.

 

“이 엽서가 동양 여자 분이 사간 건데요, 여기 그 사람 사진인데, 혹시 기억나세요?”

 

승주는 물어보면서도 스스로 한심했다. 몇 달 전 일을 어찌 기억하랴.

 

“모르죠. 한두 개 파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여기 아시아 관광객 엄청 많아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얼굴까지 기억한다면야 금상첨화겠지만, 런던에 와서 엽서를 구매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런 건 왜 묻는데요?”

 

“이 엽서 사간 동양인 학생이 실종됐거든요. 저희는 지금 조사 중이고요.”

 

“오마이갓.”

 

화가 아가씨는 친구의 비보를 들은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는 애달피 인상을 구겼다. 증언해 줄 수 있냐고 부탁하자 당연하다며 자기 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묻기도 전에 먼저 알려줬다.

 

유력한 증언자도 확보했으니 더 빨리 서둘러야 했다. 독과 강은 화가 아가씨의 연락처만 챙겨 넣고는 곧장 대사관으로 찾아갔다. 사안이 중대한 터라 영사를 직접 만날 생각이었지만, 영사는 한국에서 외유 나온 국회의원들을 접대하러 나가고 없었다. 내일이고 모레고 대면할 수 있는 날이 불투명했다. 서기관도 일개 한국인이 만나 뵐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영사과 직원은 상사들의 외부 스케줄이 얼마나 빠듯한지에 대해서만 무미건조하게 읊어댔다.

 

독 소장은 초조했지만 애써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수진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얻었다며 뭔가 실력행사를 할 만한 위치에 있는 높으신 양반이 필요하다고 애걸하듯 호소했다. 직원은 10초 간 허공을 바라보더니 사건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 사건 종결된 걸로 아는데. 살인자가 영국인 남편으로 밝혀졌잖아요.”

 

독 소장은 부아가 치밀었다. 사태 파악이 부실한 것 때문이 아니라 무성의한 말투 때문이었다. 승주가 표독스런 어조로 사건 개요를 나열해 주었다. 그제야 알아차린 직원은 조금은 민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실룩였다.

 

“제인 리 사건하고 헷갈렸나 보네요.”

 

승주도 입술을 실룩였다.

 

“이름이 전혀 다른데 왜 헷갈리셨을까나.”

 

직원은 승주를 슬쩍 흘겨보고는 책상에 앉아 이것저것 서류를 들추며 바쁜 척했다.

 

독 소장과 승주는 고민됐다. 이 사람한테라도 내막을 털어놔야 하나. 아니다. 저 비호감 몰골에다 대고 증거품을 발견했다는 중대뉴스를 털어놓고 싶지 않다. 그건 중대뉴스에 대한 모독이다.

 

독 소장은 협박하는 쪽을 택했다.

 

“이봐요∼!”

 

돌발적인 고함소리에 직원도 승주도 놀랐다. 직원이 뒤적거리던 서류 몇 장이 덜덜덜 날아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독 소장의 협박은 속사포로 이어졌다.

 

“나는 이수진 실종 사건을 의뢰받은 변호사 독고잉걸이오. 오늘 목도한 이 비협조적 직무 태만에 대해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며 국민안녕과 직결된 문제이므로 여론에 적극 알려 국민혈세가 허비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고발해 준엄히 경계코자 할 것이오!”

 

직원은 자동인형처럼 벌떡 일어섰다. 친절과 원망이 섞인 말투로 더듬거렸다.

 

“벼, 변호사란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

 

“이수진 씨 가족이 고용한 변호삽니다, 라고 기껏 말했건만. 그땐 너무 정중하게 말해서 알아듣지 못했나 보군요. 어쨌거나 댁이 가는귀가 먹어서 못 들은 건 내 잘못이 아니오.”

 

승주가 키득거리며 맞장구쳤다.

 

“그럼요. 저는 확실히 들었어요.”

 

독 소장은 직원을 다시 쏘아보았다.

 

“한시가 급하니까 영사님이든 대사님이든 당장 호출해요.”

 

하지만 일개 변호사의 협박 정도로는 출타 중인 영사를 불러오지는 못했다. 직원 역시 아예 시도조차 안 했다. 그저 서기관과 경찰주재원을 마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