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리조트 작동 매뉴얼 서문

  • 장르: SF | 태그: #가상현실 #미래 #혜성 #충돌 #공순이 #과학자 #유토피아 #멸망 #커피
  • 평점×20 | 분량: 200매 | 성향:
  • 소개: 혜성 충돌 후 가상현실을 살아가는 미래 인류의 이야기 (나폴리탄 괴담 아닙니다) * * * 당... 더보기

판타스틱 리조트 작동 매뉴얼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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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점점 희미해진다. 기억과 의식이 원자가 되어 우주 저편으로 흩어지기 전에 내 삶의 편린들을 기록해 보고자 한다. 먼 훗날 또 다른 지적생명체가 거대한 고철 덩어리와 다를 바 없는 우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었고 이렇게 살았노라고 들려주기 위함이다. 내가 이렇게 창조 정신을 발휘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때때로 의식이 깜빡깜빡한다. 전력 공급이 시원찮아서일 수도 있고, 여기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탓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린 오늘도 다툰다. 할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으니까.

 

뭘 할 수 있을까? 열심히 밭을 일궈봤자 양자화된 감각의 조합에 불과한 당근이며 시금치, 밤새워가며 그린 그림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연습한 피아노곡, 모두가 한낱 데이터일 뿐인데. 허상이다.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몰두하고 향유해왔던 것 아닌가. 우리 앞에 놓인 한 잔의 커피처럼.

 

테이블 맞은편에서 모리어티가 아드리앙과 커피 향을 놓고 옥신각신 중이다.

 

“시트러스한 향은 좋아. 근데 이것보다 조금 더 시큼해야 돼.”

 

“야, 그러다 오렌지주스 되겠다.”

 

그때 P가 모리어티를 거들고 나섰다.

 

“아니, 내 기억에도 모리어티 말이 맞아. 산미가 부족해.”

 

“얼마나?”

 

“음… 아주 약간?”

 

생전이라고 해야 할지 과거라고 해야 할지, 한때 유명 자산가의 상속녀였던 P(본명을 밝히지 말아 달란다)의 평가다.

 

이 곳, 판타스틱 리조트에 가장 늦게 입성했으니 그녀의 기억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몇 백 년 전인지 몇 천 년 전인지 본인도 잊어버렸다지만.

 

그래도 패션에 대한 열망은 여전해서 여기 오는 길에 문을 연 미용실, 의류 매장, 구두 매장은 모두 들렀다 온 모습이다. 한 번 입은 옷은 다시는 안 입기로 소문난 사람이니까. 품에는 곱슬곱슬한 하얀 털이 귀여운 강아지까지 안고 있다.

 

하나하나가 데이터인데 저런 식으로 품위 유지 하려면 메모리며 전력이 얼마나 소모될까? P는 그거 손톱만큼이나 되겠냐 하겠지. 그러고 보니 손톱이 핫 핑크네. 네일 숍도 들렀다 온 모양이다. 내버려두자. 어차피 망할 세상, 몇 초 더 빨리 망한다고 큰일 날까.

 

우리 언쟁을 듣고, 바리스타 톨킨이 다가온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백인 신사의 모습으로.

 

톨킨이란 우리가 붙인 이름이다. 원래 명칭은 T-5731. 매번 그렇게 부르기가 귀찮았다. 판타스틱 리조트를 관리하는 중앙 인공지능이 부리는 수많은 말단 인공지능 중 하나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카페 ‘실마릴리온’의 주인이기도 하고. 우리가 자길 톨킨이라 부르길 고집하니 외양도 카페 이름도 바꿔버렸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이 에티오피아 산 원두가 입맛에 안 맞으신가요?”

 

톨킨이 느릿하면서도 정중하게 묻는다. 질문은 모두를 향한 것이지만 시선은 나한테 박혀 있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공순이라고, 숫자를 써야 할 때면 다들 나를 찾는다. 그렇다면 이 ‘공순’님이 마무리를 지어 줘야지.

 

“난 잘 모르겠지만 얘들이 그렇다네. 산미를 조금 높여줘. 3% 정도.”

 

“알겠습니다.”

 

톨킨이 손을 한 번 휘젓자, 테이블 위에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새로운 커피 다섯 잔이 놓인다.

 

잔을 들어 호호 분다. 첫 모금을 마신다. 다들 ‘음’ 하는 감탄을 내보낸다. 모리어티의 말에 타박을 놓던 아드리앙까지도. 마리네뜨는 그저 새 커피를 한 잔 더 마시는 것에 만족하는 모습이다.

 

“딱 좋아. 딱 좋아.”

 

“고마워, 톨킨.”

 

사실 난 뭐가 바뀐 건지 잘 모르겠다. P가 ‘아주 약간’이라 할 때는 3%를 의미하는 거라 그리 알려줬을 뿐. 난 커피를 그저 구수한 맛의 각성제로 여겨온 사람이다.

 

아니, 정말 그랬나? 커피가 진짜 이런 향이었나?

 

모든 게 그렇다. 점심 때 먹은 김치찌개가 원래 그렇게 매콤했는지, 원래 그렇게 빨갰는지, 쥐포 볶음이란 게 원래 그렇게 질긴 것이었는지. 원래, 원래, 원래, 그 놈의 원래…….

 

일종의 기억상실증? 혹은 치매인 걸까? 내 의식 회로가 좀 먹고 있나 보다. 아니면 역시나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서일 수도. 그런데 다른 애들도 음식과 커피의 향미가 원래 그랬는지 잘 모르겠단다. 그렇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냔다.

 

“뭐가 중요한데?”

 

“살아 있는 거.”

 

그래, 그게 사실 제일 중요한데,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내가 살아 있는 건지. 나도 이 커피처럼 허상이 아닌지.

 

“야, 여기 온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런 걸로 고민해? 옛날에 데카르트가 그랬다잖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는 게 살아 있는 거랑 같은 개념은 아니잖아.”

 

“어우, 이 공순이, 또 시작이다.”

 

마리네뜨가 투덜거린다. 자기도 공순이면서.

 

그래. 나는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내가 생전의 나인지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지금쯤 심해에서 다 썩어 흔적 없이 녹아버렸을 내 몸이 떠올랐다.

 

괜스레 손을 움직여 커피 잔을 고쳐 쥐어 본다. 그런 내가 청승맞아 보였는지 마리네뜨가 내 어깨를 꾹꾹 주무른다.

 

“영서야, 봐봐, 내 손 느껴지지? 중요한 건 지금, 여기야. 혼자 멀리 가지 마라.”

 

마리네뜨는 오늘도 빨간 바탕에 검은 물방울 무늬의 레이디버그 복장이다. 카페를 나서면 옆에 앉은 블랙 캣 아드리앙과 함께, 에펠탑을 무너뜨리려는 악당을 물리치러 가리라.

 

나라고 다르지 않다. 여길 나서면 스노우 대통령을 잡으러 판엠의 캐피톨로 날아갈 거니까.

 

‘모킹제이’, 내가 여기 와서 푹 빠진 소설. 어느 디스토피아 멸망의 배후에는 또 다른 디스토피아가 있었다. 우리는 멸망을 피해 이곳에 왔지만 또 다른 멸망이 손을 내민다. 그 유사성이 멋지지 않은가?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커피가 유혹적인 향을 내뿜는다. 그 향이 허상일지라도 완전한 무(無)보다는 낫겠지.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하며 마지막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셨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판타스틱 리조트에 입주하기 몇 달 전이었다.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비주기 혜성 C/2025X1이 선명하고도 불길하게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으니까. 168년 전인 2025년에는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나 관찰 가능하던 것이 이제 맨눈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나는 그날도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 있었다. 인공지능 자바-WQ8960이 커피를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물에 카페인과 색소와 인공 커피 향을 첨가한 음료였다. 거기 들어가는 우유나 크림도 공장에서 합성된 단백질과 지방과 각종 비타민, 무기질을 유화제를 조금 첨가해 물에 섞은 제품이었다.

 

당시는 그런 카페가 흔했다. 진짜 커피와 진짜 우유는 지구 온난화와 환경오염으로 점점 자취를 감췄으니까. 진짜 커피는 리얼 로스팅(real roasting) 카페에서 이 합성 커피 가격의 열 배를 넘게 줘야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무심한 혜성이 꾸역꾸역 날아와 지구와 충돌하면 몇 안 남은 커피나무마저 멸종하고 말겠지. 인류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저 빌어먹을 혜성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앞두고 걱정 반 흥분 반 격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 중 가장 흥분한 사람은 작가 지망생 민규였다.

 

인공지능 소설들이 가을 길의 낙엽처럼 발에 차이는 세상이었다. 자연지능, 즉 사람이 쓴 것과 차이가 없었다. 외려 더 재밌고 창의적인 것도 많았다.

 

민규는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것도 억울한데 소설가로서의 지위까지 빼앗겨야겠냐며 과학자들을 욕해 왔었다. 그런데 이제 입장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훗날 모리어티로 이름을 날릴 민규가 침을 튀기며 떠들어댔다.

 

“생각해 봐. 진정한 유토피아라고. 일할 필요가 없잖아.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가 있지.”

 

“그래서 넌 뭘 할 건데?”

 

“지금 쓰는 거 계속 써야지. 머릿속에 있는 거 다 써 볼 거야. 싸구려 알바나 전전하던 삶은 이제 안녕이다.”

 

민규가 의연하고도 씁쓸하게 말한 뒤 합성 커피를 들이켰다.

 

그는 ‘셜록 홈즈와 모리어티 교수가 라이엔바흐 폭포에서 떨어진 뒤 살아남은 사람이 셜록 홈즈가 아니라 모리어티였다면?’ 이라는 상상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저런 이야기를 누가 읽을까. 그런데 민규는 떳떳하다. 자긴 비평가보다 창조적인 예술가가 좋다나.

 

훗날 레이디버그와 블랙 캣으로 활약할 혜나와 우진도 불안함과 설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다 조금은 설렘 쪽으로 추가 기우는 모습이었다. 아마추어 게임 개발자로서 아무데서도 받아주지 않는 게임을 판타스틱 리조트에 마음껏 론칭할 수 있다는 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니까.

 

“돈 보고 하는 거 아니라고, 한 명이라도 들어와서 게임해 보고 재밌다고 말해 주면 만족한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지. 대박 나고 통장 두둑해지면 ‘참 잘 했어요.’ 하고 칭찬 들은 것 같잖아?”

 

안 그래도 두 사람은 취미 겸 투 잡(two job) 삼아 하던 게임 개발을 그만두려던 참이었다. 세상에 그저 그런 게임은 넘쳐났다.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은 떨어진다는 경제 논리는 늘 유효했다. 게임 플랫폼마다 우후죽순 올라오는 제품들은 창작자들에게 고생한 만큼의 수익을 안겨주지 못 했다. 게다가 거대한 인공지능들이 빅 데이터 분석으로 만들어낸 게임을 일개 인간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기발하고 독특하고 참신하면서도 대중적이었다.

 

“거기서는 돈도 안 되고 시간만 잡아먹는 걸 내가 왜 하고 있나, 이런 생각할 필요 없으니까. 민규 말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면 되잖아.”

 

다 맞는 말인데, 그럼 나는 어쩌지? 재료공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고 이제 석사 생활을 시작한 나 말이야. 기똥찬 재료를 개발해서 인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내 꿈은? 이제 물질이라는 게 아무 의미가 없는 세상이 될 텐데.

 

하긴 그런 세상이 될 걸 알면서도 그 전공을 선택한 건 나잖아. 교수님들도 무슨 미련인지, 무엇에 쓰일지도 모를 재료 연구를 꿋꿋이 하고 있었다.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미대나 음대를 갈걸.

 

친구들과 달리 나는 전공 이외의 창조 활동에 관심이 없었다. 판타스틱 리조트에 들어가면 남들(사람+인공지능)이 만들어 놓은 것을 소비하는 일 말고는 할 게 없는 거다.

 

우진이 말했다.

 

“뭐 어때? 창조는 소비를 바라고 하는 거잖아. 읽히지 않는 소설과 플레이되지 않는 게임만큼 허무한 게 있겠어? 네가 열심히 소비해 주면 우리 같은 애들은 신나서 더 열심히 하게 될 거야.”

 

그래, 그렇다면 그것도 의미 없는 삶은 아니겠지. 어차피 우리에겐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주어질 테니까.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실험과 연구는 물질로만 하는 게 아니다. 머리로도 할 수 있다. 이론물리학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호킹 같은 학자들이 있지 않은가. 물리학은 너무 어려워서 손이 안 갔지만, 뭐 어때, 이제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카페를 나섰다. 해가 서산으로 내려가며 골목골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요즘 우리 가족은 함께하는 식사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아빠가 마침 저녁을 주문하려던 중이었다며 뭘 먹을 거냐고 물었다.

 

“난 오므라이스.”

 

허공에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수많은 식사 배달 서비스 중에 우리가 늘 이용하는 업체를 골랐다. 가상현실로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았다. 엄마는 된장찌개, 아빠는 제육볶음을 주문했다.

 

10분 뒤,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여니 드론이 엄마의 홍채를 스캔해 신분 인증을 끝낸 뒤 따뜻한 그릇 세 개를 놓고 갔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손에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렸다. 종교와는 관계없었다. 우리는 무신론자였으니까. 그저 몇 달 뒤에 벌어질 참상, 이 물질 세상과의 이별, 그로 인한 불안과 슬픔을 다독이는 행위였다.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뚜껑에 적힌 성분표시를 읽어봤다. 모두가 합성 물질이다. 주재료도 첨가물도. 나 같은 공순이 중에서도 재료 공학이나 화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그게 탄수화물인지 미네랄인지도 모르는.

 

인공 완두콩과 인공 당근의 질감을 음미하며 꼭꼭 씹어 먹었다. 누가 빼앗아 먹기라도 할 것처럼 두 손으로 그릇을 움켜쥐고는 탐욕스럽게. 엄마는 말없이 된장찌개 국물을 한 숟가락씩 떠먹고 있었다. 아빠도 인공 배양육으로 만든 제육볶음을 진짜 돼지고기라도 되는 양 소중히 그리고 천천히 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아빠가 돌아봤다. 엄마는 말도 못 하고, 기어코 튀어나오려는 눈물과 한숨을 애써 눌러 삼키고 있었다.

 

“우리 영서가 또 무서운 가 보네.”

 

“아빠, 나 너무 무서워. 이렇게 빨리 죽을 줄 알았으면 안 태어났을 거야.”

 

나는 또다시 엄마 아빠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두 분이 결혼할 당시 25년 뒤에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왜 나를 낳았을까. 그건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다들 그러한 원망이 한 자락씩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민규처럼 부모가 없는 사람은 때 이른 죽음을 탓할 대상조차 없었다.

 

“영서야, 죽는 거 아니야. 아빠가 오늘 경준이 삼촌 보고 온댔잖아.”

 

말없이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빠 스스로의 확신이 없는 위로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것이 만들어낼 얄팍한 위안이 필요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더라. 걱정 말고 들어오래. 파라다이스라고.”

 

“진짜 경준이 삼촌 맞아?”

 

“그래. 단순한 기억이 아니야. 정말 의식 그대로를 옮긴 거야. 살아 있을 때, 아니 옛날의 경준이랑 똑같았어. 말투, 표정, 몸짓, 전부 다. 기억만 옮긴 거면 새로운 일은 시작도 못 했겠지? 운동을 그렇게 싫어하던 인간이 골프에 푹 빠졌어. 하루 종일 골프만 친다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그럼, 다행이고.”

 

나는 다소 누그러진 기분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이따 너도 한 번 들어가 봐. 아빠 말이 이해될 거야.”

 

식사를 마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가상현실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판타스틱 리조트 체험판에 접속했다. 광활한 육지와 바다가 사방에 펼쳐졌다.

 

서울 근교의 한 도시를 선택해 줌 인(zoom in)했다. 주택, 식당, 카페, 놀이공원, 박물관들이 늘어서 있었다. 여느 가상현실과 다른 점이 없지만 이곳은 그 모든 것이 한 곳에, 그것도 상당히 다양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모여 있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지구인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다 어느 주택가에 들어섰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새 집들. 단정하게 잘 깎인 잔디밭. 어디선가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 어느새 나는 가상현실에 들어와 있음을 잊어버렸다.

 

누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2층짜리 저택 옆 개인수영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날 부른 사람은 썬 베드에 기대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젊은 여자였다.

 

“안녕? 지구에서 왔어요?”

 

“네. 리조트 체험 중이에요. 근데 제가 지구에서 온지 어떻게 아셨어요?”

 

“빛무리가 보여서요. 입주민과 방문객을 구분하는 표식이거든요.”

 

웃음이 나왔다. 이곳에서 나는 유령 같은 존재인가 보다.

 

“잘 됐네.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이리 와서 뭐 좀 마실래요? 다 얘기해 봐요. 여기선 뭐든 먹고 마실 수 있어요.”

 

“그럼 저도 아이스커피 한 잔만요.”

 

여자가 싱긋 웃더니 홀로그램 창을 띄워 커피를 주문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손이 차가워졌다. 내려다보니 커피와 얼음이 가득한 유리잔이 쥐어져 있었다.

 

맛은 음…… 튀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평균적인 맛이다. 민규가 마셔보면 개성이 없다고 툴툴댈 그런 맛. 상관있나, 살려고 오는 거지 커피 마시러 오는 것도 아닌데.

 

“여긴 언제 오셨어요?”

 

“흠, 몇 년 전인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내 나이 아흔 넷이었어요. 어차피 혜성 충돌하기 전에 죽을 팔자였죠.”

 

“왜요? 요즘은 120까지도 살잖아요.”

 

“암이 생겼거든요.”

 

“저런……. 증세가 심하셨나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만 하느라 아픈 것도 몰랐어요. 무시했다고 봐야 하나. 그때 고민에 빠졌어요. 남은 재산을 암 치료에 쏟아 붓다 빈털터리로 죽을 것이냐,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 태어날 것이냐. 전 두 번째를 택했어요. 암이 퍼진 몸은 미련 없이 버렸죠.”

 

“여기서 사는 게 만족스러우세요?”

 

“그럼요. 일단 안 아프잖아요. 그리고 여기서는 내 몸과 내 집 전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요.”

 

그녀는 30대 중반의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말하는 내내 홍조 어린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집과 수영장도 엄청나게 크고 깔끔했다. 수영장 옆 잔디밭에서는 조경사들이 꽃을 바꿔 심고 있었다. 인공지능도 있고, 가드닝을 취미로 하는 사람도 와서 도와준다고 했다.

 

“저, 그럼 하나만 여쭤 볼게요. 무섭진 않으셨어요? 의식이 옮겨질 때요.”

 

“안 무섭다면 거짓말이죠. 근데 진짜 찰나예요. 우리 피곤할 때 잠깐 꾸벅 졸잖아요? 그거랑 비슷해요. 그 잠깐 사이에 여기로 온 거예요.”

 

“그럼, 하나만 더요. 본인이 정말 본인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생전의 본인이요.”

 

내 말에 여자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한 거 아녜요? 아아,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저도 무서웠거든요. 그래서 알아봤는데, 의식이 옮겨지는 순간, 두 개의 의식이 동시에 생긴다더라고요. 내 몸속의 자아와, 판타스틱 리조트에 존재하는 자아. 그 두 개를 한꺼번에 느끼면 너무 혼란스럽겠죠? 실제로 미친 사람도 있대요. 그래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 거래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의식이 옮겨지는 순간에 의식을 잃게 만드는 거죠.”

 

두 방법 다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돼서 나는 도리질을 쳤다.

 

“지구로 돌아오고 싶진 않으세요?”

 

“전혀요. 여기가 지군데 왜……. 뭐, 가끔 친구들이나 가족들 만나러 가긴 해요.”

 

“안드로이드에 의식 연결해서요?”

 

“맞아요. 이제 혜성 충돌하면 그건 힘들어지겠지만.”

 

여자가 조경사 한 명을 돌아봤다.

 

“저기요, 하야테 상. 이 아가씨한테 하야테 상이 여기 올 때 얘기 좀 해 줘 봐요. 많이 불안한가 본데.”

 

안 그래도 남자 하나가 일하다 말고 돌아서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온몸과 손이 흙투성이여도 표정만은 환하게 빛났다.

 

“내가 바로 그 두 개의 의식을 한꺼번에 느낀 사람이에요. 완전 초창기 때 왔거든요.”

 

“왜 오신 거예요?”

 

“트랙터에 깔려서 온몸이 부서진 상태였거든요. 그 전에 미리 계약해 놓은 덕분에 죽기 직전에 여길 올 수가 있었죠.”

 

“으으, 정말 다행이네요. 근데 의식 두 개가 동시에 느껴지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아아, 그건 정말 말로 설명 못 해요. 병상에 누워서 뼈 하나하나가 안 아픈 데가 없는데, 그러면서도 난 이렇게 햇볕 아래에 멀쩡히 서 있었어요. 너무 이상해서 토할 뻔 했다니까요.”

 

내 표정을 본 하야테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급히 덧붙였다.

 

“다행히 의식은 금방 옮겨졌어요. 걱정 말아요. 아가씨는 아가씨 본인일 테니까.”

 

가상현실에서 외국인들과 얘기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묘한 기분이다. 저 아저씨는 분명히 일본어로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걸 다 이해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동시통역을 해 주고 있으니까.

 

“그럼 여기까지 오셔서 이렇게 힘들게 일하시는 건 왜 그런 거예요?”

 

하야테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힘들어 보여요? 난 엄청 재밌는데. 자, 봐요.”

 

그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뒤쪽 화단의 꽃들이 금세 다른 종류의 꽃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렇게도 할 수 있지만, 나는 과정을 즐기는 거예요.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잖아요?”

 

하야테가 여자를 돌아봤다.

 

“오현주 씨, 당신도 일 좀 해 봐요. 맨날 물장구만 치지 말고.”

 

“평생을 여행 한 번 못 가보고 일만 했는데 또 일을 하라고요?”

 

오현주 씨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일어나 물속에 뛰어 들었다. 사방에 물보라가 튀었다. 그녀가 물 밖으로 두 팔을 높이 뻗어 물을 튕겼다. 선명한 일곱 빛깔 무지개가 수영장을 가로질렀다.

 

“마법 같지 않아요?”

 

오현주 씨가 깔깔 웃더니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차나 한 잔 더 하자고.

 

“죄송해요. 저 이제 자야 돼서요.”

 

“저런, 내가 깜빡했네. 몸이 있는 사람은 자야 된다는 걸.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판타스틱 리조트를 빠져나왔다.

 

resort(리조트) 라는 단어는 ‘휴양지’라는 뜻도 있지만 ‘최후의 수단’이라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왜 환상적인 휴양지 혹은 환상적인 최후의 수단이 되었는가. 지구의 SF를 조사해 보면 필연적으로 아서 클라크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제시한 과학 3법칙 중, 세 번째 문장, ‘충분히 발달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내가 오늘 판타스틱 리조트에서 생생하게 겪은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판타스틱 리조트가 처음부터 환영받은 건 아니다. 리조트 건설 계획이 발표됐을 때, 그리고 그것만이 인류의 유일한 도피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을 때, 판타스틱 리조트의 베타 테스트로 옮겨진 일부 사람들의 의식이 소멸된 것이 발견됐을 때, 나는 매번 명치를 괴롭히는 뜨끔한 소용돌이를 느꼈다.

 

이후 기술이 발전했다. 의식이 판타스틱 리조트의 서버에 업로드 되는 중에 소멸되는 사고는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명치에서는 언제나 시커먼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먹어야 할 때다. 혜성이 충돌하면 지구는 죽음의 행성이 될 것이다. 불구덩이로 화한 지구는 불씨가 꺼진 후 기나긴 혹한을 맞이할 거고. 그 난장판 속에서 비참하게 죽을 것이냐, 평화로운 죽음 이후 판타스틱 리조트라는 의식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냐, 선택할 순간이 다가왔다. 뭘 선택해야 할지는 자명했다.

 

 

소설 체험 구역으로 순간 이동한다.

 

‘헝거 게임 시리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유려하게 휘갈긴 문구 아래에 문이 세 개가 서 있다. 각 문에 붙은 이름은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제이’. 나는 마지막 권인 ‘모킹제이’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또 다른 문 세 개가 앞을 가로막는다. ‘단순 관람’, ‘등장인물 체험’, ‘창조적 체험’.

 

단순 관람은 영화 보듯 소설책을 읽는 것, 등장인물 체험은 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어 스토리를 오감으로 체험하는 것, 창조적 체험은 내가 등장인물이 되는 동시에 내 의지와 아이디어로 이야기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처음엔 멋모르고 세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이 판을 치는 개고생 끝에 동생 프림로즈와 함께 포탄에 맞아 죽고 말았다. 사지가 갈가리 찢기는 통증이 실제 같아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

 

역시 나는 민규와 혜나와 우진 같은 애들처럼 창작에는 소질이 없다. 소설의 원래 스토리보다 더 재밌게 바꿀 자신도 없다. 손은 오늘도 두 번째 문을 향한다.

 

한 번 겪어봐서인지, 이곳에 오기 전에 마신 커피 덕분인지, 나는 민첩하고 정확했다. 며칠 전에 마지못해 끌려가듯 이야기 진행을 따라 움직이던 것과 달랐다. 거침없이 활을 쏘고 용감하게 골목을 내달렸다. 쓸데없이 성실한 인공지능이 카페인에 의한 각성 효과까지 덤으로 주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걸 요구한 게 누구더라?

 

베테랑 바리스타인 자바-WQ8960이 만들어주던 진짜 가짜 커피와 달리 여기 와서 처음 마신 커피는 조금 어설펐다. 인공지능이 그런 사소한 것까진 신경을 안 쓰는 건지, 우리 감각이 진짜가 아니라 양자적으로 날조돼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됐든, 향이야 그렇다 쳐도 커피의 기본이 안 돼 있었다. 그걸 눈치 챈 사람은 나뿐이었다.

 

T-5731은 우리의 판타스틱 입주에 맞춰 태어난 생 초짜였다. 우리는 그의 카페 개장일에 방문한 첫 손님들이었다. 나는 그가 만들어준 커피를 먹어보고 단번에 불평을 내뱉었다.

 

“우웩, 이게 뭐야?”

 

“왜? 나쁘지 않은데.”

 

“하나도 안 뜨겁잖아.”

 

“아아, 그러네.”

 

나는 T-5731를 불러 커피는 살을 델 정도로 뜨거워야 한다고 알려줬다. 물론 아이스커피의 경우는 머리끝까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워야 하고.

 

“미지근한 커피는 아무도 안 좋아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몇 도로 맞춰드릴까요?”

 

“난 90도. 아이스커피는 5도.”

 

각자 원하는 온도를 말해주니 T-5731이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했다. 이후 우리는 뜨거운 것만큼은 진짜 커피와 똑같은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카페인이 문제였다. 커피를 마신 뒤 피어오르는 활력, 각성, 집중력, T-5731의 커피에는 그게 없었다.

 

혜나와 우진이 말했다.

 

“그게 뭐가 필요해? 어차피 우린 진짜 뇌도 아니고, 서버 속의 전자 의식일 뿐인데. 잠도 안 자잖아.”

 

“그래, 맞아. 피곤한 거 느껴본 사람 있어?”

 

물론 없다. 뇌의 피로란 낮 동안에 뇌세포에 쌓인 노폐물 때문이니까. 잠을 자면 뇌척수액이 뇌혈관을 따라 흐르며 베타아밀로이드를 포함한 여러 노폐물을 제거한다. 하지만 판타스틱 리조트에 탑재된 우리 의식은 그런 과정이 없으니 피곤함도 못 느끼고 따라서 잠을 잘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카페인 없는 커피가 불만이었다. 지구에서의 삶과 이곳에서의 삶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러한 간극이 점점 눈에 띄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일부 의식들이 걸리는 신종 전자 정신병에 지배당할 지도 몰랐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부리는 마법에는 어찌 그리 금방 적응했을까. 참 희한한 일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본성이 그대로 옮겨져서인가.

 

어찌됐든 나는 T-5731에게 앞으로 내 커피에는 카페인 각성 효과를 넣어 달라고 했다. 옆에서 곰곰이 생각하던 민규도 자기 커피에 카페인을 넣어 달라 했다. 그 정신적 활력이 창작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거였다. 우리들의 충실한 바리스타는 톨킨이 된 뒤에도 꼼꼼하게 요구를 따라줬다.

 

향에 관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원두의 종류도 많은데다가 원산지에 따라 같은 원두라도 맛이 달라지기도 하고 같은 원두라도 로스팅 시간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났으니까. 하지만 그걸 일일이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제 아무리 생전에 일류 바리스타였다 해도.

 

톨킨이 서버를 돌아다니며 각종 레시피를 다운받았다. 커피 향은 조금씩 좋아졌다. 우리 같은 일반 고객들의 항의도 한 몫 했다.

 

매일 카페 실마릴리온에 몇 시간씩 죽치고 앉아 커피를 열 잔씩 마셔가며 이게 좋니, 뭐가 모자라니 하는 게 우리의 주요 일과 중 하나이다. 특히나 민규, 아니 모리어티가 그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나 카페인 민감증이었잖아. 그런 주제에 커피는 엄청 좋아하고 말이야. 내가 커피를 한 번에 스무 잔이나 마시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그는 여전히 커피와 인공지능과 판타스틱 리조트와 과학자들을 사랑하고 찬양한다.

 

카페는 잡스러운 수다만 떠는 곳이 아니다.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모여드는 창작과 토론의 장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피아노를 치고, 누군가는 거기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조금 전에 보고 온 영화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는다.

 

카페 한쪽 구석에 추리소설 작가들과 독자들이 모여 앉아 있다. 모리어티가 추리 단편을 하나 낭독한다. 최근 그가 쓴 작품이다. 줄거리는…….

 

판타스틱 리조트에서 전자 의식들이 줄줄이 소멸되는 연쇄 살인이 발생한다. 알고 보니 범인은 인공지능인 척 신분을 속여 카페 주인으로 일하는 전자 의식이다. 고객들이 마시는 커피에 해킹 코드를 심은 다음, 그것을 이용해 중앙 인공지능에게 소멸 의지를 전송하는 식으로 해당 고객의 의식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료하고 심심해서.

 

“결말 직전까진 정말 좋았어요. 근데 솔직히 살인 동기가 아쉽네요. 사는 게 지루해서 사람을 죽이다니, 공감이 안 돼요. 생전에 사이코패스였다던가 그런 설정은 어때요?”

 

누군가의 지적에 다른 이가 말했다.

 

“너무 전형적인 결론 아녜요? 사이코패스가 다 범죄자도 아니고요. 전 충분히 공감되는데요.”

 

“정말이세요?”

 

“소설 속 등장인물 체험을 선택하고 웬만한 캐릭터를 다 겪어 본 사람이 있다고 쳐요. 이젠 그게 그거 갖고 너무 따분해서 캐릭터를 형사가 아닌 범인으로 골랐다고 해 보죠. 새로운 자극을 맛보겠죠. 하지만 거기서 어떤 짜릿함을 느꼈다 해도 결국은 가상이잖아요?”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어떤 이는 자기가 마시던 커피와 톨킨을 번갈아보며 눈알을 굴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톨킨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실제의 자극을 원한단 말씀이세요? 허허, 이거 큰일 날 양반일세.”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이 소설의 주인공이 그렇다는 거죠.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전 모기 한 마리 못 죽이는 사람이라고요.”

 

“공감 능력이 너무 큰 것도 병입니다, 병.”

 

“공감이 아니라 이해라고 해 두죠.”

 

그 때 또 다른 이가 나섰다. 모리어티는 소파에 기대 앉아 이 모든 논쟁을 느긋하게 감상할 따름이었다.

 

“더 큰 음모가 있었다, 이건 어떨까요? SF스럽게요.”

 

“어떤 음모요?”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심심해서도 아니고, 실용적인 목적으로 그런 일을 저지르는 거죠. 예를 들면, 전기 공급이 시원찮아서 서버 일부를 폐쇄해야 된다, 사람들한테 그 사실을 알리면 큰 소동이 날 것 같아서, 무작위로 뽑은 사람을 하나씩 제거한다.”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우, 끔찍해. 완전 호러네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에요. 지구는 언제 회복된다는 기약도 없고, 태양 에너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까요.”

 

이번엔 톨킨이 나섰다.

 

“저희는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서버를 폐쇄해야 한다면 공지부터 띄울 거예요. 누가 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필요하고요.”

 

“너 자신이 사라진대도 그런 소리 할래?”

 

누군가가 농담을 던진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나. 톨킨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 자신이 사라진다, 라는 건 어떤 느낌일까.

 

 

카페 실마릴리온. 우리는 새로운 인류가 된 것 같다. 이야기하는 사람. 소설, 영화, 게임, 스포츠, 오페라, 모두가 이야기 아닌가.

 

이야기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모리어티가 배가 고프다고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실제로 배가 고프진 않지만 습관처럼 나오는 말이다.

 

모리어티가 식당 목록을 띄웠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세계 음식점. 우리는 매번 신중하게 식당을 고른다. 전 재산을 투자할 금광을 찾는 사람들처럼. 결정되면 그곳에 몰려가 요리에 대한 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오늘은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세 개를 받았다는 어느 특급 호텔 한식당. 살아생전에는 근처도 못 가 봤을 곳이다. 그런데 판타스틱 리조트에서는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정말 판타스틱하지 않은가?

 

우리는 늘 그렇듯 메뉴에 있는 모든 요리를 주문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주변 손님들 전부가 마찬가지다. 커다란 테이블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접시가 빽빽했다.

 

음식이 끝도 없이 들어갔다. 위가 커져서가 아니다. 배부름을 못 느끼게 설정해 놨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귀족보다 낫지 않아? 토하면서 먹을 필요가 없잖아.”

 

모리어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요리는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아마도 베타 시절부터 수많은 전문가들과 입맛 까다로운 고객들의 의견을 모아 품질을 높여놓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

 

홀로그램 창이 뜨며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우리 엄마 아빠였다.

 

“통화.”

 

창에 두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엄마 아빠는 눈만 겨우 보였다. 두껍디두꺼운 패딩 코트를 입고 모자를 덮어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으니까. 뒤에서는 황제펭귄들이 뒤뚱거리며 일렬로 행진하고 있었다.

 

“우와, 펭귄이다. 잘 도착했나 보네.”

 

두 분은 순간 이동 방식이 아니라, 남미까지 항공기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남극까지 배를 타고 가는 아주 전통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가는 내내 설렘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가 남극 대륙에 발을 디디는 순간 펑 터트리고 싶었다나.

 

“영서야, 얘들 너무 귀엽다. 너도 나중에 꼭 와 봐.”

 

“울 엄마 소원 성취했네.”

 

“그러니까. 오늘 저녁엔 눈 폭풍 체험 한 번 해 보려고.”

 

“재밌겠다. 그래도 안 날아가게 조심해.”

 

“그냥 한 번 날아가 보려고. 얘들이 알아서 주워 놓겠지.”

 

엄마가 옆에 선 인공지능 가이드들을 가리켰다.

 

“안 추워?”

 

“안 그래도 너무 추워서 온도를 조금만 높여 달라 했어. 아주 조금만. 그래도 명색이 남극인데 추운 맛은 보고 가야 하지 않겠어?”

 

마스크에 가려졌지만 엄마 아빠가 싱글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남극 여행은 두 분의 로망이었다. 남극에 가려면 시간과 돈이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운이 따라줘야 했다. 날씨가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곳이었으니까.

 

실제로 지구에 살 때 엄마 아빠는 적금을 깨서 아르헨티나까지 갔었다. 기술이 발전한 시대였어도 남극을 탐험하려는 이들은 일단 아르헨티나에서 대기하며 날씨가 좋아질 때를 기다려야 했다. 혜성 충돌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극복하지 못한 자연현상 중 하나가 날씨였으니까. 두 분은 언제 그칠지 모르는 기상악화로 발이 묶이고 말았다. 결국 고지를 눈앞에 둔 채 집으로 돌아오셔야 했다.

 

“아아, 나도 여행 가고 싶다. 얘들아, 우리 여행 갈래?”

 

오늘 혜나, 아니 마리네뜨는 레이디버그 복장이 아닌 평범한 차림이다. 역시나 블랙 캣 복장이 아닌 수수한 옷을 입은 우진, 아니 아드리앙이 대꾸했다.

 

“좋지. 어디 가 볼까?”

 

아드리앙이 관광지 목록을 띄웠다. 식당을 고를 때처럼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잠시 뒤, 만장일치로 선택된 곳은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

 

“순간 이동.”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바뀐다. 천장이 저 높이 올라가며 하늘로 바뀌고, 벽이 멀찍이 물러나며 형태를 바꿔 산이 된다. 각 테이블은 뜨거운 물줄기를 뿜어대는 간헐천으로 변신했다.

 

가이드로 보이는 인공지능이 다가왔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의 인공지능 가이드 존입니다. 온천 가까이 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물이 엄청나게 뜨거우니까요.”

 

“존, 우리 온천욕을 하고 싶은데, 온도 좀 낮춰줄래?”

 

“알겠습니다.”

 

물웅덩이는 펄펄 끓는 용광로에서 따끈따끈한 온천으로 바뀌었다. 우린 순식간에 수영복 차림이 되었다.

 

물속에 들어가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얀 구름이 흐르고 어디선가 새가 지저귄다. 이런 게 천국이구나. 지구에서 파란 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늘 미세먼지로 뿌옇던 하늘, 원래 그런 색인 줄로만 알았었다. 크레파스와 물감의 하늘색은 왜 회색이 아니라 옅은 파랑이었을까, 어릴 적에 항상 의문이었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갈증이 일었다.

 

“아아, 시원한 거 먹고 싶다. 존.”

 

“부르셨습니까?”

 

“아이스티 좀 부탁해. 레몬 맛으로.”

 

“난 복숭아 맛!”

 

마리네뜨와 아드리앙이 동시에 외쳤다. 모리어티도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난 아보카도 맛으로.”

 

“우웩. 이 이상식욕자.”

 

우리는 킬킬거리며 모리어티에게 물을 마구 튕겼다.

 

주변의 간헐천들이 알 수 없는 주기로 솟아올랐다. 꼭 두더지 잡기 오락기처럼. 우리는 바로 다음엔 어디에서 물기둥이 튀어 오를지 알아맞히는 게임을 했다. 어떤 것은 내내 얌전하더니 갑자기 백 미터를 솟구쳤다. 가짜인 걸 알면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모리어티가 이죽거렸다.

 

“과학자 아가씨, 얘네들 주기 좀 계산해 봐.”

 

“존한테 물어보면 금방 알려줄 텐데 내가 왜?”

 

“어휴, 저 귀차니스트.”

 

“난 그런 거 말고도 할 게 많거든.”

 

“박사 학위를 도대체 몇 개를 따냐? 옛날 누구 말대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이곳에 와서 공부는 의무가 아니라 취미가 되었다. 물리학, 수학, 지질학, 대기학, 철학 등등. 쉽진 않지만 재미있다. 하야테 상 말대로 나는 과정을 즐기는 거다.

 

하야테 상과 오현주 씨,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미 의식이 리조트로 옮겨온 뒤라 사실 의미 없는 의문이긴 하지만. 내가 거듭해서 묻는 건 이거다. 몸과 리조트에 동일한 의식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이 온다. 그 즉시, 뇌와 리조트의 연결을 끊는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뇌인가 리조트의 전자 의식인가?

 

“뭘 고민해? 그냥 사람이 두 명 되는 거지.”

 

모리어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나는 그의 단순함이 부럽다. 소설가가 그렇게 단순해도 되는 거냐.

 

“내 정신세계는 정확히 둘로 나뉘어져 있으니까. 너도 좀 그렇게 해 봐, 이 공순이야.”

 

“이 세상과 우리의 존재 자체가 과학이야, 지킬 앤 하이드 씨.”

 

지구에서처럼 우리는 티격태격 다툰다. 여기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다. 상대도 나도 허상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으니까. 왜냐고? 다툰다는 건 의견, 즉 생각이 있다는 거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궁금하다면 한 번 검색해 보길. 과거 지구의 유명한 철학자가 한 말이다.

 

 

판타스틱 리조트 입주 하루 전이자 혜성 충돌 한 달 전. 우리는 어느 리얼 로스팅 카페에 앉아 있었다. 리조트 입주비를 이미 입금한 상태라, 남은 돈으로 시내를 돌아다니며 진짜 커피를 마시고 진짜 음식을 먹던 날 중 하루였다. 한 시간도 넘게 줄을 선 뒤에야 테이블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와, 진짜 커피란 이런 맛이구나.”

 

민규가 두 눈을 감고 감탄했다. 우진과 혜나가 입을 쩝쩝거렸다.

 

“뭐, 좀 다르긴 하네. 이걸 왜 이 돈 주고 마시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만.”

 

“돈지랄이지 뭐.”

 

나도 두 사람의 의견에 한 표를 던졌다. 인공적인 향, 자연적인 향, 그런 거 잘 모르겠다. 민규는 초콜릿 향, 견과류 향, 어쩌고 하면서 하나씩 짚어냈다. 우리는 뻥 치지 말라고 놀렸다.

 

내가 감동한 부분은 커피를 다 마신 뒤에도 입술과 이가 갈색으로 물들지 않았다는 거다. 선조들은 이런 걸 마셨다니.

 

그들이 지구를 망쳐버린 바람에, 이 한 모금의 가격이 가짜 커피 한 잔의 가격과 맞먹는다. 욕이 나오다가도, 리조트 입주비가 없어 한 달 뒤 생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들이 떠올라 숙연히 커피만 들이켰다.

 

사람은 역시 이기적인 존재인가 보다. 입주비를 제하고 남은 재산을, 입주비를 마련 못 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이들은 소수였으니까. 다들 우리친구들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이 물질 세계의 파편 하나라도 더 느껴보려고 이렇게 돈을 흥청망청 쓰고 있었다.

 

“영서는 오늘도 쓸데없는 걱정이 많네.”

 

“그래, 걱정 마. 정부가 있잖아. 국가 재정으로 어려운 사람들 입주비 지원해 준다던데. 몰랐어?”

 

“나 요즘 물리 공부하느라고 뉴스 안 봐. 그럼 혜성에 맞아 죽는 사람은 없는 거네?”

 

“그래. 다만 우리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미리 입주하느냐, 조마조마하게 충돌 직전에 입주하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야.”

 

하지만 신체 동결비까지 해결해주진 않는다. 내 친구들 몇몇도 그렇고, 우리 세 식구는 판타스틱 리조트 입주를 계약하면서 신체 동결 계약까지 맺었다. 대양 곳곳의 암흑 층에 마련된 냉동고에 신체를 동결시켜 놓는 서비스다. 언젠가 생태계가 회복되면 이 땅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과연 그런 날이 올까. 그때까지 신체가 멀쩡할까. 멀쩡하더라도, 그 신체에 전자 의식을 도로 욱여넣을 수 있을까. 아무도 장담하지 못 한다. 다만 티끌 같은 가능성을 바라보며 하는 일이다. 혜나의 말대로 돈지랄이다.

 

민규는 신체 동결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았다. 못 한 건지 안 한 건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난 그냥 판타스틱 리조트에서 평생 아니 영생 살 거야. 현실로 돌아와 봤자 뭐해? 또 일하느라 허리가 휠 텐데.”

 

“그때가면 판타스틱 리조트에서도 일해야 될 걸? 서버 사용비를 내야 되잖아.”

 

“그래도 현실에서 살 때 필요한 돈보다는 훨씬 적게 들 거 아냐. 그리고 중요한 거 한 가지. 거기서는 안 죽는다고.”

 

내가 끼어들었다.

 

“영원은 없어. 판타스틱 리조트가 태양 궤도 도는 거 알지? 태양광으로 발전해서 서버를 운용하지만 태양이 영원히 불타는 건 아니야.”

 

“아직 몇 십 억년은 남았다며? 그 정도면 영원이지 뭐.”

 

“정확히 말하면, 영원은 아니야.”

 

“공순이. 깐깐하기는.”

 

“소설 쓰다가 모르는 거 생기면 나한테 물어보는 인간이.”

 

“어차피 너도 위키피디아 검색해서 알려주는 거잖아. 공순이가 그런 것도 모르냐.”

 

“인터넷도 쓸 줄 모르는 원시인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혜나와 우진이 일어섰다.

 

“잘 싸워라. 우린 예약 시간 다 돼서 가야겠어.”

 

커피숍은 모 특급호텔 3층이었다. 로비로 내려간 혜나와 우진은 데스크에서 카드 키를 받아 객실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졌다.

 

호텔 로비는 커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무한한 가상섹스를 앞둔 사람들이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