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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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멤버들은 자기 몫의 실험이 끝나면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말없이 실험실을 떠나는 그들을 닥터도 말리지 않았다. 다진만이 동료들을 기다렸지만(일찍 실험이 끝난 날에만) 그에게 눈길을 주는 이는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다진은 8인용 테이블에 홀로 앉아 식사 인사를 했다. 아무도 없는 8인용 테이블은 망망대해처럼 넓고 고요했다. 주위 소음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다진은 묵묵히 음식을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진은 수저질을 멈추지 않았다. 움직이기 위해선 연료 공급이 필요하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후, 후, 후, 후, 후.”

 

재익이가 ‘MIRROR-ONE’에 기대 짧고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T가 죽은 뒤 닥터의 엄포대로 관대했던 ‘MIRROR-ONE’은 사라졌다. ‘MIRROR-ONE’은 선을 밟은 이에게 철퇴를 내렸다. 조정하기 전이라면 넘어갔을 실수에도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 오랜 경험을 가진 멤버들에게 ‘탑승’은 숨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처음 탑승했을 때처럼 호스트 움직임 하나하나에 조심해야 했다. 실수로 조금만 움직여도, 움직이고 싶다고 찰나의 생각만 해도 몰려드는 두통과 고막을 찢는 경고음은 피험자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피험자들은 누구처럼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 의식만 높아졌다.

 

정신적인 피로는 육체적인 피로로 이어졌다. 현실로 착륙하면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끊어져 쉬고 싶다는 생각이 피험자들을 지배했다. 대화할 여력이 없어 의견 교류 따위 기대할 수 없었다.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쳐도 눈인사만 할 뿐 가벼운 안부도 묻지 않았다. 닥터가 요구한 대로 움직이면 돼. 피험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힘들 때 주위를 챙기며 파이팅을 불어넣었던 진경마저 임무에만 몰두했다. T가 세상을 등진 날, 다진이 알던 그녀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오늘은 어땠어요?”

 

다진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MIRROR-ONE’을 나오는 재익에게 말을 걸었다.

 

“뭐, 똑같죠.”

 

재익은 건성으로 답하고 연구실을 떠났다.

 

다진은 머리를 양손으로 헝클어뜨렸다. T의 죽음의 상당한 지분이 있다는 죄책감에 다진은 T를 대신해 멤버 간의 윤활제 역할을 맡으려 했지만 그에게 버거운 역할이었다.

 

다진은 가지 못한 수많은 갈래길을 상상했다. 닥터에게 미리 알렸다면 T는 징계를 받았겠지만 목숨을 잃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T를 완강하게 말렸다면 T는 마음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진경의 과거를 바꾸는 대신 현재의 진경을 위로하며 그녀가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전부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인간을 항목화해서 분류한다면 다진은 주어진 임무 처리에 특화된 인간이었다. 가능성이 열린 길을 탐색하고 그곳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은 지니지 못했다. 다진의 중심에 말뚝을 박은 카르마가 다른 생각은 못하도록 그를 단단히 묶어 놓았다.

 

이런 다진에게 T가 계획을 들려주었을 때, 다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참견은 업보를 쌓는다. 카르마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하물며 다진에게는 T의 선택을 막을 권리도 없었다. 지금은 T를 말리지 않은 행동을 후회하지만 막상 T의 계획을 막았을 때 생겨날 업보가 다진은 두려웠다. 계획대로 밀고 나갔어야 했다며 다진을 원망하는 T의 모습을 상상하면 그것대로 후회하고 카르마가 쌓일 일이다.

 

다진이 다른 멤버들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보였다면 오해다. 멤버들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진도 멤버들과 다른 점이 없었다. 다진의 최우선 행동 지침은 ‘MIRROR-ONE’에게 경고를 받지 않고 현실로 무사착륙하기였다. 다진은 그저 자신에게 답답했을 뿐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닥터의 명령에 충실했다.

 
*
 

“나 숙제 좀 보여주라.”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얼굴이 통통한 아이가 다가왔다. 훗날 탈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눈썹이 짙고 머리숱도 빽빽하다.

 

“저번에 빌려간 공책 늦게 줘서 선생님한테 혼날 뻔 했어. 이번에는 바로 줘. 인혁아.”

 

호스트는 빌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인혁에게는 빚이 있었다. 지난 번 하굣길에 버스카드를 대신 찍어주었다. 호스트는 쭈뼛쭈뼛 공책을 책상서랍에서 꺼냈다.

 

“땡큐.”

 

인혁은 공책을 낚아챘다. 2시간 동안 머리를 싸맸던 숙제가 5분 만에 해결된다. 호스트는 날로 먹으려는 친구에게 짜증이 났지만 결국 업보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이 단원은 시험에 나온다고 선생님이 칠판에 구멍이 날 정도로 강조했다. 업보는 ‘점수’로 돌아올 거다.

 

“칼마, 체육복 윗도리 빌려줘.”

 

뒷줄에 앉은 동식이가 다가왔다. 같은 중학교에서 함께 고등학교로 온 몇 안되는 동창이다. 중학생 때는 키가 작았었는데 겨울 방학 동안 복싱을 배워 살도 빠지고 키도 커졌다.

 

“오늘 베리가 복장 검사한다고 했잖아.”

 

‘베리’는 숙취 때문에 항상 코가 빨간 체육 선생이다. 전기포트처럼 뿜어내는 술냄새와 독한 체취 탓에 학생들은 그를 피했다. 그 사실을 베리가 모를 리 없었다. 베리는 꼬투리가 생기면 학생들을 물어뜯었다.

 

“아래는 빌렸는데 위를 못 빌렸어.”

 

동식은 흙으로 누런 엉덩이를 털었다.

 

“그럼 나는 위에 뭐 입어?”

 

“속에 검정색 입었네.”

 

듣기 싫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베리가 면 티셔츠는 봐준다고 했어. 민소매는 안 되고. 색깔도 블랙이면 통과지.”

 

학교에서 지정한 체육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최석태와 회색 민소매를 입은 동식이 호스트를 사이에 두고 섰다. 최석태의 체육복 밑에 검은 면 티셔츠가 보였다. 니가 빌려주면 되잖아. 다진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마이너스가 없는 부탁을 단순히 싫다고 거절하는 것은 업보를 크게 쌓는 일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최석태 말대로 베리는 면 티셔츠를 운동복으로 허용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동식에게 빚을 하나 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동식이가 필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진은 왼쪽 팔을 소매에서 빼냈다.

 

“오케이~”

 

동식은 최석태와 주먹 인사를 하고 다진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다진은 옷을 입지도 벗지도 않은 채로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최석태의 말대로 움직이는 모양새가 되어 기분이 구렸지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오늘 복장 검사한다고 했냐 안 했냐.”

 

“했습니다.”

 

“그런데도 안 입고 온 놈들이 있어. 교복인 놈들은 말할 것도 없어. 내가 한 바꾸 돌기 전에 빨리 튀나와. 위에 나시만 입고 나온 놈들도 나와. 빨리 빨리 시간 없다. 자수해서 광명 찾아라.”

 

베리는 5열 종대로 줄을 맞춘 학생들 사이를 핀볼처럼 돌아다녔다. 큐대만 남은 당구채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때렸다. 제 기준에 맞지 않은 복장이 있으면 그 앞에 가만히 섰다. 따가운 눈총을 이기지 못한 학생들이 열에서 이탈했다.

 

“해병대야?”

 

베리는 빨간 색 면 티셔츠를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