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편에서 건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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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엄청나게 넓어서 인간이 감히 판단을 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밖에, 인간들이 알아낼 수 있는 공간을 제외한 그 너머에는 과연 어떤 공간이 펼쳐져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동시에 동일한 조건으로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정서는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를 보면서 처음 알았다. 평행우주 혹은 평행세계라고 부르는 그 개념에 흥미를 느낀 정서는 인터넷에서 대강 의미를 검색해 보고 난 다음에도, 그리고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가 끝이 나고 난 다음에도 그것을 잊을 수 없었다.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갈라질 수 있는 미래, 이 우주 어딘가에 나와 똑같은 생김새와 이름과 조건을 가진 존재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지금 정서가 한창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심지어 그 드라마 속의 주인공은 살인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다른 세계로 건너가 여러 사건을 맞닥뜨린다. 한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사건의 진실이 주인공이 다른 세계로 건너가면서도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주인공이 만난다. 한 세계의 주인공은 정의롭고 올곧지만 다른 세계의 주인공은 타락했고 위태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두 주인공의 목적은 같았다. 사람들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악독한 살인범을 잡아야 한다. 과연 이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정서는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보고, 또 같은 소재의 드라마를 보면서 상상했다.

연달아 또 다른 우주, 사람의 선택에 의해 똑같지만 미래가 갈리는 세상이 있고 그 두 세계가 교차하는 일은 너무 매력적인 일이다. 다른 세계에 있는 자신은 또 다른 자신의 자아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 만약 두 사람이 만나면 그 둘은 서로를 어떤 식으로 느끼게 될까? 설마 차원을 넘어 의식을 교류하는 이야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데자뷔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어딘가 한 번은 겪어봤을 것 같은 익숙함을.

그런 데자뷔 현상이 다른 세계에서 이미 자신이 겪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봤다. 만약 다른 선택을 하면서 달라진 인생을 살고 있는 똑같은 두 사람이 어떤 계기를 통해 만나게 된다면 그들은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게 될까? 똑같은 유전자, 똑같은 이름, 똑같은 생김새를 가졌지만 다른 인생을 살고 있어 인격이 다르다면 마치 어릴 적에 헤어진 쌍둥이처럼 여기게 될까, 아니면 서로 만나면 한쪽이 죽는다는 도플갱어처럼 위험하게 여기게 되는 걸까?

정서는 망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마 현재의 정서가 누리지 못한 세상, 지금은 구직활동도 다 실패하고 무기력하게 지내던 정서에게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일이었다. 만약 지금의 나처럼 무기력하고 못난 자신 말고도 좀 더 진취적이고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그런 자신이 어딘가에 있지 않겠냐고 정서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자신의 이번 생은 틀렸다, 노력을 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자신은 이런 식으로 산소만 축내며 공간을 차지하다가 어딘가에 버려진 폐가구처럼 취급되어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살던 정서에게 또 다른 우주에서 성공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위안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정서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행복한 세상을 그리다가 문득 어떤 현실을 자각하고 만다.

다른 선택으로 상황이 바뀌고 미래가 바뀐다 한들 바뀌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어이없게도 정서는 자신의 생김새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가장 먼저 자각하고 만다. 만약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지금보다 더 일찍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외모를 관리한다 한들 기본적인 외형이 크게 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형수술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외모가 평타나 그 이하 수준을 유지하는 건 똑같을 것이다. 정서는 객관적으로 봐도 미인은 아니었고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면서도 그곳의 자신 또한 미인은 커녕 그다지 사랑받을 외형은 아니라는 것을 인지했다. 환경이 변화한다 한들 타고난 기본적인 것은 똑같지 않은가.

평행세계를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잘 빠졌고 유능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도 문제없이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정서는 그럴 수 있을까? 성격은 환경의 변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재능은? 정서에게 뭔가 숨겨진 재능 같은 게 있기는 한 걸까? 가끔 어떤 계기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여 마치 금맥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성공하기도 한다지만 정서는 자신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정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선택을 그르쳐왔다고 그렇게밖에 생각해 왔었다. 자신이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혹은 다른 선택을 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지금 자신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정서는 타고난 자신은 그대로 둔 채 만약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시도하여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만드는 방법도 상상해 보았다.

지금 시점이 아니라 좀 더 과거로 회귀해서 현재는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선택권이 쥐어진다면 정서는 과연 무엇부터 하게 될까? 정서는 문득 로또 번호를 기억하고 미리 로또를 사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했다. 왜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면 로또부터 한다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지 정서는 알 것도 같았다.

어떤 차원이든 그곳에 존재하는 자신은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조건을 타고났다는 사실이며 그 타고난 조건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 그렇다면 바꿔야 하는 것은 외부적인 조건인 셈이다. 하지만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 외부적인 조건을 크게 바꿀만한 능력은 정서에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정서가 타고난 조건은 극복할 수 없어도 외부적인 조건이 충족되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있다고 한들 정서는 결코 그곳으로 갈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기술로는 그런 우주를 감지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또 다른 차원에, 또 다른 우주에 사랑받고 행복하고 원하는 것을 하고 사는 정서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여기 있는 정서의 삶이 아닌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정서의 삶은 그 차원의 정서의 소유인 셈이다. 정서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정서와 다른 차원의 정서에게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차원이든 자신은 달라지지 않는다. 똑같은 외모와 똑같은 성격, 똑같은 재능을 타고났는데도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작용하는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행복이 갈리는 경우가 있다 한다면 그건 뭔가 불공평하다고.

그렇게 느끼는 순간 정서는 점차 다른 세계를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서서히 접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는 생각할수록 바보 같은 망상이라고, 자신을 한심하게 탓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가본 적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외국에 선망을 가지는 게 낫겠다고 정서는 판단했다. 지금 상황에서 정서가 사람들이 동경하는 외국의 어느 휴양지 같은 곳으로 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만 그곳이 실재한다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설령 다른 선택으로 인해 바뀐 우주가 있다 한들 거기가 여기보다 더 행복하다 한들 확인조차 할 수 없는 그곳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애초에 그런 우주가 있다고 하는 것도 일종의 가설이 아니던가.

차라리 여기서 자신과 차이가 나는 사람들은, 정서가 금수저라고 외모나 재능이 탁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정서와 아예 같지 않으니까 처음부터 출발선이 다른 것이라 여기며 납득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다른 차원의 정서는 지금의 정서와 다른 게 없는데 외부적인 조건만 변했다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니. 아니 생각해보면 이것도 정말 바보 같은 노릇이다. 도대체 있지도 않은 곳을 상상하면서 거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부러워한다니,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고 정서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런 식으로 정서는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다른 우주, 다른 차원에 거리감을 느껴 서서히 흥미를 잃어갔고 조만간 시간이 지나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지도 않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구직에는 실패하고 (주변 사람들은 애초에 그녀에게 기대를 하지도 않았던 것 같지만) 더 이상의 신망도 잃어버린 채 마치 죽어가는 식물처럼 그녀는 조용히 집안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서가 악몽을 꾸게 된 것도 그때쯤이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