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일상은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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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슈츠를 입은 남자가 지문인식기에 왼쪽 검지를 가져갔다. 조금 비뚤어진 넥타이를 만지는 사이, 딱 하고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건물에 울렸다.

 

사무실은 어두웠고 출근한 사람은 없었다. 구 부장 책상이 밝지 않은 걸 보니 오늘은 다진이 먼저 온 모양이다. 자율 출퇴근제를 운용하는 회사라면 출근한 사람들이 제법 있을 시간이지만 탄강 건설은 9시 출근, 6시 퇴근을 고수하고 있다. 내년 전반기부터 자율 출퇴근제를 도입하겠다는 공지가 내려왔지만 확정된 사항은 아니었다.

 

다진은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열었다. 밤 사이 사무실에 고인 공기가 신선한 공기와 자리를 바꿨다. 다진은 자기 책상으로 갔다. 퇴근하면서 정리했을 터인데 무언가 흐트러진 느낌이다. 성난 고슴도치처럼 삐죽이는 볼펜들을 연필 꽂이에 하나로 모으고 물티슈 한 장을 뽑아 밤 사이 키보드와 마우스, 책상 전체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냈다. 그리고 곧바로 티슈로 한 번 더 닦았다. 물기가 마르기 전에 먼지가 내려앉으면 닦으나 마나 하기 때문이다. 다진은 컴퓨터의 전원을 눌렀다. 하드디스크가 웅웅 낮은 소리를 내며 책상을 흔들었다. 다진은 체크하지 못한 메일과 오늘 해야 할 업무를 확인했다. 숫자 ‘12’가 빨간 인장처럼 봉투 귀퉁이에 붙어있다. 새로운 메일의 대부분은 스팸 필터를 교묘하게 피한 광고 메일이었다.

 

[당신도 10억을 벌 수 있습니다.]

 

대가 없는 일은 없다.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그에 대한 업보는 돌아온다. 다진은 메일을 선별해 휴지통으로 보냈다.

 

일련의 아침 준비가 끝나면 손님 맞을 차례다. 딱, 걸쇠가 풀리는 둔탁한 소리가 공간을 흔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다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 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구 부장은 가벼운 목례와 손짓으로 인사에 답했다. 곧이어 김 차장, 송 과장, 강 대리가 줄줄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다진은 자동문 센서처럼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건넸다.

 

“아침부터 아주 활기차네. 좋은 꿈이라도 꿨어?”

 

김 차장은 지나치게 솟은 의자의 높이를 재조정했다.

 

“꿈꾸지 않고 푹 잤습니다.”

 

다진은 뻣뻣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컨디션이 좋은가 보네. 아침부터 큰 소리로 사람들 괴롭히는 걸 보면 말야. 전다진 씨.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이쑤시개로 귀를 쑤시는 거 같아. 정도를 몰라? 입사한지 1년도 넘은 사람이 눈치가 없어. 쯧.”

 

파티션 위로 송 과장의 불어터진 만두 같은 눈이 올라왔다.

 

“죄송합니다.”

 

송 과장은 만두 옆구리가 터질 정도로 인상을 구기고 사라졌다. 궁시렁 대는 소리가 칸막이 너머로 들렸다. 대체 누가 저런 목석 같은 놈을 뽑았냐 부터 시작해서 다른 데로 안 보내나 하는 기분 나쁜 소리였다.

 

“송 선배 저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해하지? 나는 다진 씨가 활기 차게 인사하는 거 들으면 기분 좋던데. 신입 때만 반짝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송 과장, 마누라한테 바가지 좀 긁혔나 본데. 그러려니 해.”

 

강 대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다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강 대리는 3년 선배로 다진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려주었다. 그것도 자기 기분 내킬 때만이었지만 그나마 팀에서 다진을 케어해주는 사람이었다. 강 대리는 후배의 어깨를 두드리곤 의자 바퀴를 질질 끌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침부터 다진에게 시비를 거는 건 송 과장의 프로세스다. 입사 때부터 당해온 일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송 과장 특유의 짜증을 유발하는 말투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만약 김 차장이나 강 대리까지 송 과장처럼 업무 이외에 사소한 일로 다진을 갈궜다면 이직 준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진은 첫 직장인만큼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자고 다짐했다. 조금 힘들다고 그만 두는 건 그의 신념에 반하는 일이다. 이 회사에 이력서를 넣은 것도, 이 회사에 입사한 것도, 설계 2팀에 배정받은 것도, 송 과장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도 전부 짊어져야 할 업보이다. 업보란 녀석은 지독한 성격이라 힘들다고 피하면 덩치를 불려서 다시 앞에 나타난다.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드시 돌아온다.

 

“안녕하세요. 탄강 건설 전다진 입니다. 메일로 도면 보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요구 사항위주로 확실하게 반영했으니 확인만 하시면 될 겁니다. 최종본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확인하시고 메일 보내주세요. 네, 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다진은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석 달간 그를 괴롭혔던 프로젝트가 일단락되었다. 야근이 없는 날이 없을 정도로 거래처의 요구와 회사의 사정을 절충하느라 머리털이 빠질 지경이었다. 다진은 각고의 노력으로 두 회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황금 비율을 찾아냈다. 아니, 만들어냈다. 다진은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하늘로 쭉 뻗고 딱딱하게 뭉친 근육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제야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번 주에는 크게 신경 쓸 업무가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긱한테 치맥이나 하자고 해야지.’

 

다진은 시원한 생맥주에 닭다리를 뜯을 생각에 벌써부터 퇴근 시간이 기다려졌다.

 

“전다진 씨.”

 

다진은 목덜미에 민달팽이가 달라붙은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송 과장이 상냥하게 다진을 불렀을 때 좋은 일이 없었다.

 

“네.”

 

다진은 목을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프로젝트 다 끝났나? 이번 주까지 끝내야 할 거 있다고 했잖아.”

 

“네 . 방금 전화로 컨펌을 부탁드렸습니다.”

 

다진은 즉답을 망설였지만 바른대로 말했다. 시간을 끌어봤자 프로젝트 진행 상황은 금방 탄로난다. 무엇보다 송 과장이 말을 건 타이밍으로 보아 전화를 엿듣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참 고생 많았다. 그거 가지고 한 달 넘게 밤새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축하해.”

 

“아…, 감사합니다.”

 

세 달이라 정정하고 싶었지만 송 과장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사실이었다.

 

“프로젝트 끝낸 참이라 미안하긴 한데. 하나만 부탁하자.”

 

송 과장은 에두를 것 없이 본론을 꺼냈다.

 

송 과장은 후배가 쉬는 꼴을 보지 못했다. 후배에게 여유가 생기면 당연하게 일을 떠밀었고 후배가 일을 마무리하면 당연하게 빼앗아 후배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이 때문에 도망친 사원이 한 둘이 아니었다. 송 과장은 사측에 업무 교육 트레이닝이라는 겉만 번지르르한 명목을 갖다 붙여 감사를 피했고 나간 사람들의 나약한 근성을 운운하며 험담했다. 사측에서도 송 과장의 헛소리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지만 확인할 타이밍이 나빴다. 마지막 기회였던 다진이 송 과장의 혹독한 ‘트레이닝’을 견디면서 사측은 송 과장의 주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송 과장의 트레이닝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한 신입들은 근성이 약한 사람들이었다.

 

“용월 현장 알지?”

 

“저번 주에 공사 들어간 곳 말씀하시는 거죠?”

 

부어 터진 만두가 옆구리가 터질 정도로 구부러졌다.

 

“알고 있다니까 다행이네. 설명할 수고를 덜었어.”

 

설명을 듣지 않았지만 다진은 직감했다. 송 과장 입에서 현장 얘기가 나왔다는 건 누군가 현장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걸 뜻했다.

 

“용월 현장에서 본사 직원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이네. 도면을 설명할 사람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내가 그린 도면이긴 한데, 다진 씨도 알다시피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야 말이지. 내일 모레까지 납품해야 할 도면도 두어 건 남아있고…. 자료는 내어줄 테니까 숙지하고 현장에서 원하는 거 다 들어줘. 너무 무리한 부탁이면 딱 잘라서 거절하고. 감독이 강성이긴 한데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은 또 아니라서 구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