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사코프 증후군

  • 장르: SF | 태그: #SF #단편선 #한국SF단편선 #코르사코프증후군 #정해복 #냉동수면 #냉동인간
  • 평점×5 | 분량: 102매
  • 소개: 치명적인 병 때문에 긴 시간 수면에 들었다가 깨어난 남자. 새로운 미래 사회에 적응하던 그에게 죽은 아이들이 보이는 환각이 나타난다. 더보기

코르사코프 증후군

미리보기

1

남자는 서른세 살이다. 그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 좀 전까진 그것을 의심했었다. 그의 기억은 열세 살쯤 어디선가에서 멈췄지만, 직감적으로 자신이 열세 살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 속 상대는 너무 낯설고 늙었다. 깡마른 편이였지만 키는 생각보다 훨씬 커서 몸집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 사실들이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20년을 점프한 것 같았다.

“제가 20년간 잤나요? 남자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냉동수면 상태에선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의사는 서랍을 열어 서류를 하나 찾아냈다. “냉동수면에 동의하셨죠. 이걸 보시면 생각이…….”

의사는 서류를 내밀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가 서류에 사인한 것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다시 서랍을 열어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빨간 팬으로 서류의 하단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유두체 이상으로 심각한 기억장애. 건망증후군(코르사코프 증후군)으로 판단됨.
정신 착란, 흥분, 치매, 기억장애 증상이 보임.’

의사는 남자가 지난 20년간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종양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긴 기억 장애 증상이고 냉동수면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단 몇 초 전 일도 기억을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고 했다.

다양한 치료법도 전부 통하지 않았고 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완벽한 치료법이 나올 때까지 냉동수면 후에 치료하는 것을 결정했다. 남자가 사인을 했고 지난 8년간 그는 긴 잠을 잤다.

남자는 의사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지난 20년간 자신은 어떤 존재였을까? 기억이 없어진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에게 삶이란 게 있었을까? 마치 녹음기능이 고장 난 음성리코더 같았다.

“제가 종양 제거 수술은 언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하지 못하시군요.”

의사는 다시 책상 서랍의 서류뭉치를 뒤졌다.

남자는 열세 살 때 뇌종양 판정을 받았고 그해에 종양 제거 수술을 했다. 남자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은 작은아버지와 병원에 왔던 일이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열 살 때 친부모와 두 살 어린 동생을 교통사고로 모두 잃었다. 그 후에 유일한 친족인 작은아버지에게 입양됐다.

의사는 그에게 어린 시절의 일들에 대해서 물어봤고 남자는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했다. 평탄치 못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부모님도 작은아버지도 그의 기억에 한없이 따뜻한 존재였다.

“지금은 제 병이 나은 건가요?”

“물론이죠,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의사는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남자는 어떤 확신도 없었다.

“그럼 제가 기억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

“어제 뭘 하셨죠?”

“하루 종일이요?”

“네 온종일 하신 일을 얘기해 보세요.”

“별다른 일은 안 했습니다. 피곤해서요. 종일 누워 있었죠. 저녁때쯤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서서 복도를 걸었던 것 빼곤 계속 잤어요.”

“어제 일을 기억하시는군요. 현기증, 구토, 빈혈 증상은 냉동수면 후에 일반적으로 겪는 후유증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주일 정도 더 쉬시면 퇴원하셔도 될 것 같네요.”

남자는 의사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이해했다. 고장 난 음성리코더가 이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는 어제 일을 기억했다. 오늘 일도 잊지 않을 것이고 내일 일들도 모조리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의사는 한번 지워진 기억은 소생이 안 된다고 했다. 치료는 기억을 기록하는 기능에 대한 것이지 사라진 기억을 찾아주는 게 아니었다.

남자는 병원에서 나온 직후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가 가진 거라곤 입은 옷과 커다란 천가방이 전부였다. 가방 안의 것들도 하나같이 시시한 것들이다.

셔츠와 면바지 몇 벌과 새로 발급받은 시민카드, 몇 푼의 생활비, 서류 뭉치와 이제는 쓰지 못할 종이돈과 동전들, 말라비틀어진 캔디 두 개, 멈춰버린 손목시계와 낡은 수첩 하나가 전부다.

남자는 우선 의사가 추천해 준 시청의 복지 담당자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했지만 냉동수면 관리비와 치료비로 대부분을 써버린 상태였다. 그는 몇 군데 일자리를 추천받았고 ‘시’로부터 집을 임대받았다.

집은 작고 아담한 단독 주택이었다. 집 앞에는 작은 마당이 있다. 잡풀만 무성한 마당에는 나무가 없다. 반쯤은 싸구려 잔디가 심겼고 나머지는 이름 모를 잡풀이 점점 더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었다. 좁은 거실 겸 부엌과 욕실, 작은방 하나가 있는 집이었다.

*

도시는 매우 낯설었다. 남자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30년을 살았지만, 어느 것 하나 낯익은 것이 없다. 도시가 매우 빨리 변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남자가 도시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작 20년이다. 그리고 8년 동안 잠을 잤을 뿐이다. 어쩌면 어딘가에 어렴풋이 그가 기억하는 도시 일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시는 기다려주질 않는다. 그가 기억을 잃고 잠들어 있을 동안 도시는 점점 모습이 거대해지며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오래된 것들은 퇴락해서 사라진다. 마치 거울 속에 20년이 지나버린 남자처럼…….

남자는 일주일에 닷새를 백화점의 주차장에서 일했다. 그는 온종일 서서 차들을 빈자리로 안내해 주는 일을 했다. 퇴근 무렵엔 한 평 남짓한 사무실에 앉아 하루 동안 몇 대의 차가 들어오고 나갔는지 기록했다. 그 일로 번 주급은 집 임대료로 쓰이고 조금의 생활비로 남았다.

일이 없는 주말 내내 그는 무료했다. 물끄러미 창밖의 텅 빈 마당을 쳐다보며 하루를 보냈다. 비가 오면 비를 봤고 해가 뜨면 빛들을 봤다. 일상은 따분하고 답답했다. 뭐든 하고 싶었지만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한번은 잡지 가판대 앞에서 서성거렸지만 남자는 아무것도 사질 않았다. 잡지와 신문 속 이야기들은 꼭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대신 그는 잡지 가판대에서 몇 걸음 떨어진 사탕가게를 지날 때면 기분이 좋아졌다. 갖가지 빛깔과 형태의 사탕들이 크고 작은 유리병에 가득 찬 광경은 매일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았다.

남자는 가게로 들어가 진열대에 놓인 수많은 유리병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아가씨, 이걸 통째로 사고 싶은데 얼마인가요?”

“이걸 통째로요. 그렇게 팔지 않고요. 대신 작은 유리병에 담아 드릴게요.”

“사탕들이 주머니 속에서 녹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주머니 안이라면 괜찮아요.” 점원은 사탕 하나를 꺼내서 남자에게 내밀었다. “손에 쥐어 보세요. 녹지 않죠? 입 안에서만 녹아요.”

남자는 주급을 받는 금요일엔 빼먹지 않고 사탕을 샀다. 붉은색, 파란색, 검은색, 흰색, 회색, 노란색, 타원형, 완전히 둥근 모양, 별모양, 울퉁불퉁한 모양, 동전 모양 등등 다양한 형태의 사탕을 샀지만, 막대가 달린 사탕이나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 큰 사탕은 사질 않았다.

사탕이 든 유리병들은 남자의 집 창가에 진열됐다. 그중 일부는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출퇴근할 때 일을 할 때 이따금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그것을 만지곤 했다. 점원 말대로 녹지 않았다.

2

첫 환각은 남자가 퇴원하고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경험했다. 그는 그걸 환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잘못 본 것으로 생각했다. 주차장에서 차들을 유도하다 보면 이따금 아이들이 차창 너머로 멀뚱히 남자를 쳐다보곤 한다.

종종 남자는 아이들의 머리를 보지 못했다. 흐릿한 창문 너머로 작은 아이의 몸이 보였다. 하지만, 목 위로 아이의 머리가 없다. 남자는 잘못 봤거나 착시였거나 그렇게 생각했다.

환각을 확실히 경험한 날은 어느 금요일 퇴근 무렵이었다. 남자는 더는 차가 들어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서 일지를 쓰려고 사무실로 향했는데 어디선가 작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소리를 쫓았다. 그때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자 다시 들렸다. 남자는 소리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또 들리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리려 하면 또다시 들려왔다. 남자는 그렇게 텅 빈 주차장을 구석구석 헤매다가 한 아이를 발견했다.

*

네다섯 살 난 사내아이가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짧게 깎은 머리 모양이나, 입은 옷이 사내아이라고 짐작케 했다. 아이가 울 때마다 조그만 어깨가 샐룩거렸다. 남자가 다가갔다. 아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길을 잃었니?” 남자가 말했다.

여전히 아이는 돌아보지 않고 울기만 했다. 남자는 아이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면서 다시 한 번 물어봤다. 그 순간 아이의 머리가 몸에서 깨끗이 잘려나간 것처럼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거두고 뒷걸음쳤다. 곧 왼쪽 팔이, 뒤이어 오른쪽 팔이 깨끗하게 절단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리가 잘려나가자 아이의 몸이 와르르 무너졌다.

남자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그 광경을 놀란 눈으로 지켜봤다. 그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 나온 것은 그 아이의 머리가 남자를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을 때다. 그는 미친 듯이 주차장 출구 쪽으로 달음박질쳤고 집까지 죽어라 뛰었다.

다음날, 쉬는 날인데도 남자는 주차장에 왔다. 아이를 만났던 장소로 가 보았다. 그는 그것이 환각인지 아닌지 알아야만 했다. 아이가 서 있던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핏자국이나 어떤 흔적도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고 온종일 지켜봤다. 아이가 죽었다면 뉴스에 나올 터였다. 며칠을 확인했지만 그런 뉴스는 없었다.

초조해진 남자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고 했다. 흔한 수술 후유증이라고 했다. 환각과 일시적인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곧 괜찮아진다고 했다.

환각이 너무 심하면 처방전을 써줄 테니 받아가라고만 했다. 남자는 즉시 병원에 들러서 처방전을 받고 약을 탔다. 약은 그가 늘 지니고 다니는 사탕처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

남자는 그 뒤로 종종 환각에 시달렸다. 어느 날은 유치원 버스를 봤는데, 버스 안에 있던 아이들이 하나같이 목이 잘린 채였다.

점심때에 공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사지가 절단되어 잔디밭에 나뒹구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은 퇴근길에 가로등마다 빠짐없이 밧줄에 목이 멘 아이들의 시체가 시계추처럼 매달린 것을 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습관적으로 약을 먹었다. 때때로 너무 많이 먹어서 몇 알을 먹었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 후로 남자는 되도록 아이를 피했다. 대부분의 환각이 아이들과 관련된 것이어서 남자는 아이들이 거북하고 두려웠다.

3

토요일 오후 1시였다. 남자는 늦게 일어났다. 그는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그의 바지 주머니에는 여전히 사탕이 들어 있었다. 다른 쪽 주머니엔 약을 넣었다. 약은 두어 알만 남았다.

약을 더 타와야겠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냈다. 한 주 동안 가지고 다닌 사탕들이다. 남자는 냄비에 물을 끓였다.

물이 끓자 사탕을 모조리 냄비 속에 집어넣었다. 사탕이 물과 희석되면서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는 욕실로 가서 변기에 냄비 속 내용물을 쏟아 붓고는 물을 내렸다.

남자는 옷을 갈아입고 새 사탕을 유리병에서 꺼내 주머니를 채웠다.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려는데 마당에 누군가 있었다. 몸집이 작은 어린아이였다. 원피스를 입은 여자 아이가 마당에서 뭔가를 찾는지 웅크리고 앉아서 풀밭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이의 몸이 남자 쪽으로 돌려졌다. 아이는 머리가 없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서 급하게 문을 닫았다.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몇 개 남지 않은 약을 꺼내서 입 안에 털어 넣고 물도 없이 꿀꺽 삼켰다.

한동안 문에 기대고 서 있던 남자는 창밖을 살폈다. 아이는 여전히 똑같은 자리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목이 없다. 변하지 않았다. 약을 먹었는데도 환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남자는 초조하게 창밖을 쳐다봤다. 아이의 머리가 어디에 있을까? 분명히 어디에 있을 텐데. 남자는 겁먹은 표정으로 마당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아이의 머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초조해졌다. 언젠가 주차장에서 봤던 그 아이가 생각났다. 차가운 바닥에 떨어진 채로 웃는 그 머리. 남자는 몸서리를 쳤다.

약을 한 알 더 삼켰다. 이제 남은 약이 없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약이 더 필요했지만 남자는 현관문을 나설 수가 없었다. 저건 환각일 뿐이다. 환각일 뿐이다. 남자는 속으로 몇 번이고 말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남자는 거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약기운이 퍼질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 남자는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가서 아이를 쳐다봤다. 여전히 머리가 없었다. 그때 옆 창문에 뭔가가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눈을 힐끔 돌렸다. 아이의 머리였다. 양 갈래로 땋은 아이의 머리, 씨익 미소 짓는 아이의 머리, 공중에 뜬 아이의 머리, 목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머리가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놀라서 욕실로 도망쳤다. 환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한참 뒤 남자는 욕실 문틈 사이로 창가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는 용기를 내어 재빨리 거실로 나가서 창가 커튼을 모조리 쳤다. 대낮인데도 남자는 등을 모두 켰다. 텔레비전도 켰고 라디오도 켰다. 켤 수 있는 건 모조리 켰다. 남자는 창가 맞은편에 웅크리고 앉아서 벌벌 떨었다.

남자는 이따금 창가로 살금살금 다가가 커튼을 살짝 젖히고 주변을 살폈다. 아이는 여전하다. 환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남자는 욕지거리를 한바탕 했다.

그는 미친 듯이 거실을 빙글빙글 돌면서 왔다 갔다 했다. 전화 수화기를 몇 번 들었지만, 의사에게 전화해 봤자 소용이 없을 터였다.

의사는 그저 환각이라고 할 테고 후유증이니 조금 지나면 사라진다고 하겠지.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팽개쳤다. 그는 창가가 보이는 구석으로 돌아가 몸을 웅크리고 환각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초인종 소리에 남자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남자는 그것이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할 동안 두 번째 초인종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남자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현관으로 몸을 이끌었다. 문에 달린 작은 구멍으로 밖을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거기 누구요?”

남자는 목소리를 쥐어짜내서 말했다. 자신의 황량한 목소리에 놀라며 마음속의 공포를 꾹꾹 눌러 담고는 문 뒤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으로 밖을 쳐다봤다. 문밖에 아이가 서 있었다. 여자 아이였다. 원피스를 입은 아이. 그를 괴롭혔던 그 아이였다. 아이는 자신의 잘린 머리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남자를 보고 미소 지었던 그 끔찍한 머리를…….

남자는 문을 거칠게 닫았다. 문을 잠가야 하는데 온몸이 벌벌 떨리고 팔다리에 힘이 빠져 그럴 수가 없었다. 제대로 서기도 벅찼다. 그는 문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마지막 힘을 다 쥐어짜내 문고리를 잡고 이를 악물었다.

“날 내버려 둬. 저리 가!”

남자가 소리쳤다.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남자는 미친 듯이 벌벌 떨었다.

*

얼마 동안 남자가 그렇게 문고리를 잡고 버텼을까? 그가 그렇게 지쳐갈 무렵 문밖에서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착한풀 가져도 돼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아이의 목소리였다. 또렷하게 들렸다. 다시 한 번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착한풀 가져도 돼요?”

분명히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남자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맥이 풀려서 문고리를 쥐던 손을 놓쳤다. 현관문을 천천히 열었다.

문밖에는 여전히 아이가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잘린 머리를 들지 않았다. 온전한 아이로, 귀여운 아이로 문 밖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토끼풀을 쥐고 있었다. 아이는 그것을 남자 앞에 내밀었다. 네잎클로버였다.

“이 착한풀이요. 제가 가져도 돼요?”

아이의 얼굴에 겁먹은 표정과 호기심 어린 표정이 번갈아 나타났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애처럼 울었다.

4

큰 방이 하나 있다. 한쪽 벽면에 큼직한 모니터가 걸려 있다. 모니터 앞에는 넓은 테이블이 놓였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기계 장치들이 어지럽게 연결돼 있다. 모니터에는 수십 개로 분할된 화면들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 남자 하나가 모니터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을 잔뜩 움츠린 노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날씨가 쌀쌀해졌어.” 노인이 말했다.

“이제 곧 겨울이잖아요.” 젊은 남자가 대꾸했다.

노인은 외투를 벗어서 구석 의자에 올려두고 가방 안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녹차 한잔할래?” 젊은 남자는 대꾸 없이 책상 구석에 놓인 컵을 들이밀었다. “어젠 별일 없었고?”

“늘 똑같죠. 퇴근길에 사탕을 사고 집으로 곧장 와서 늦게까지 텔레비전도 안 보고 착한 어린이처럼 잘도 자던데요. 덕분에 좀 따분했죠.”

“그놈의 사탕은 매주 사는군.”

“그러게요.” 젊은 남자가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냥 두면 사탕으로 집 안을 가득 채울지도 모르겠네요.”

노인은 그 말에 낄낄거리고 웃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모니터만 쳐다봤다. 모니터 속 가장 큰 화면에 남자가 거실에 웅크리고 앉았는데 죽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옆에 작은 모니터에는 여자아이가 풀밭에 웅크리고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찾았다.

“저 아이는 뭘 찾지?” 노인이 풀밭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글쎄요.” 젊은 남자는 한 손으로 제어판의 둥근 볼모양을 빙글빙글 돌리더니 화면을 크게 확대했다. 아이의 손이 풀들 사이로 분주히 움직였다.

“네잎클로버라도 찾는 것 같아요.” 젊은 남자는 화면을 원상태로 축소해 놓았다. “영감님은 어디다 거셨어요?”

“뭘 어디다 걸어?”

“모르세요? 다들 저 남자가 치료될지 안 될지 내기를 했잖아요. 이번 판은 꽤 크다고요.”

“자넨 어디에 걸었는데?”

“저야 물론, ‘치료된다’에 걸었죠.”

“돈 날렸구먼. 그걸로 차라리 술을 한잔 사지.”

젊은 남자가 노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정말이요?”

“그런 건 내게 진작 물어봤어야지. 내가 저 남자를 한두 해 봐왔는지 알아? 저 남자가 냉동된 게 벌써 몇 번짼데…….” 노인은 웅크려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자넨 저 남자가 치료될 거로 생각해?”

“글쎄요. 저런 게 치료인지는 잘 모르지만, 꼬맹이들만 보면 저렇게 기겁을 하고 꽁무니를 빼잖아요. 저 꼴로 무슨 짓을 하겠어요. 근데 애당초 저치가 장애라는 생각은 안 들던데.”

모니터 속의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초조히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전화 수화기를 몇 번 들었다 놨다 했지만,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그는 잔뜩 겁먹은 사람처럼 살금살금 두꺼운 커튼이 쳐진 창가 쪽으로 가서는 커튼을 살짝 들춰서 마당을 살폈다. 앞마당 잔디밭에는 여전히 아이가 앉아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젊은 남자는 차를 다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온병을 가져와서 다시 컵에 따랐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라니?”

“저 남자, 장애라고 생각하세요?”

“장애? 글쎄, 난 의사가 아니라 잘 모르겠네. 뭐 의사들이 장애라면 장애겠지. 그래서 치료를 하겠다고 이 난리를 치는 거고.”

“저는 이게 적당한 치료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거야 누가 알겠나. 의사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우린 그저 테스트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군요.” 젊은 남자가 한참 말이 없다가 대꾸했다.

노인도 젊은 남자만큼이나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지만 쌀쌀한 날씨에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그럼 만약에 치료가 된다면?” 노인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뭐가요?”

“치료가 된다면 어찌하겠느냐는 거지. 치료하고서 사형이라도 시켜야 하는 건지. 장애였으니 그냥 넘어가야 하는 건지.”

“글쎄요.” 젊은 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요.”

“자네에겐 그저 과거에서 튀어나온 인물 같다. 뭐 이런 말이군.”

“그거예요. 제가 아는 건 숫자뿐이에요. 저 남자가 20명의 아이를 죽였다는 것 빼곤 아는 게 없어요. 여기선 자료에 접근을 못 하게 막아뒀더라고요. 어린 시절에 대해서 박사에게 하는 말 들었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는 말, 도대체 기억이 어디까지 조작된 거예요?”

노인은 모니터 속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떠는 모습을 지켜봤다.

“22명이지. 저 남자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희생자는 22명이야. 그리고 그에 대한 자료는 의사들 아니면 열람이 안 될걸. 저 남자의 어린 시절? 그게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암. 절대…….”

“어떻게 아세요? 기록을 보셨어요?” 젊은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볼 필요도 없지. 내가 어렸을 때 저 남자의 인기는 대단했으니깐. 쉬는 날에 도서관에서 옛날 신문이나 잡지를 검색해 보게. 저 남자 이야기는 얼마든지 찾을걸.”

젊은 남자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아예 노인 쪽으로 몸을 틀어서 앉았다.

“유명했었지. 희생자가 생길 때마다 언론이 얼마나 신이 나서 떠들었는지. 남자의 과거가 어쩌고저쩌고 아주 한 편의 장편소설을 쓰더군. 그 뒤엔 각종 전문가가 줄지어 출연해서 열심히 분석하기에 바빴지.”

“과거가 어땠는데요?”

“뭐 뻔하지. 아비는 술주정뱅이의 변태성욕자였고 어머니는 마약중독자고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형제는 매일 아버지란 작자에게 얻어맞으면서 자랐겠지. 남자가 열 살 때 남동생은 산채로 불태워졌다더군.”

“왜요?”

“아비가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서 몇 시간을 매질하더니 형제에게 비역질을 시켰지. 어머니가 그걸 보고 미쳤는지 동생의 몸에 기름을 붓더니 불을 질렀다고 하더군.”

“세상에…….”

“근데 신문이나 잡지에서 떠벌리는 말들이니 다 믿진 말게. 그게 사실인지는 저 남자와 신만 알 일이지.”

젊은 남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백한 사실은 첫 번째 희생자는 다섯 살 난 남자아이였는데, 다리 밑에서 발견됐지. 교살됐고 옷이 벗겨진 채로 남자가 남긴 유일한 온전한 시신이었지.

그 뒤로 아이들이 유괴되고 납치됐지. 남자가 체포됐을 때 집 안 구석구석에 뼈가 발견됐다더군. 잘린 아이들의 몸들이 냉장고에서 나왔지. 미처 다 먹질 못했던 거야.

뒷마당에는 죽은 아이들의 머리가 묻혀 있었다더군. 그는 22명을 교살했다고 자백했네. 그의 진술은 실로 끔찍했지. 그 어린아이들을 고문하고 능욕하고 죽인 후에 그걸 두고두고 먹었다더군. 어렸을 때 우리는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네. 달리 그를 부를 만한 단어가 없었으니깐.”

젊은 남자는 입을 벌리고 놀란 눈으로 노인을 쳐다봤다.

노인은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보지 말게. 여차하면 어떻게 살아남았나 물어볼 태세군.”

“어떻게 살아남으셨어요?” 젊은 남자가 진지하게 물었다.

노인은 웃었다.

“자넨 내가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시대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나?”

젊은 남자는 대답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재적인 위험은 있었지. 하지만, 어릴 땐 그런 걸 잘 못 느끼지. 아마도 돌아가신 양친이 더 많이 느꼈을 테지. 막연하게 무섭긴 했지만 다들 아무 일 없었네. 오히려 친구 중에 몹쓸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는 더러 있긴 했지만, 다행히 희생자는 없었어. 죽은 희생자와 가족들만 불쌍한 거지…….”

젊은 남자는 노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

오후 3시가 다 될 무렵 인터폰 불이 들어왔다.

“인형 제어실입니다. 5분 뒤에 미끼를 투입할 예정입니다. 준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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