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의 식이(食餌) – 1

  • 장르: SF, 추리/스릴러 | 태그: #호러 #로맨스 #영양사 #개차반 #화가 #블루레어스테이크 #티베탄마스티프 #보육원 #컬리넌
  • 평점×20 | 분량: 108매 | 성향:
  • 소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개망나니의 인성이 180도 변하다. 매너좋은 신사로 돌변한 그가 나한테 구애해 오는데… 생고기를 즐기는 남자, 사납고 거대한 마스티프 두 마리를 부리... 더보기

내 남자의 식이(食餌) – 1

— 본 작품은 무료이지만, 로그인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음식을 담는 기계적인 손놀림. 맛있게 드시라는, 하지만 진심은 담겨 있지 않은 의례적인 말들. 식판을 내려다보는 불만어린 표정들. 배식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이다. 반찬마다 매너리즘을 한 꼬집 뿌려 배식하는 이곳은 나의 애증이 몇 겹으로 덧칠된 소중하고도 빌어먹을 직장, 임포경찰서 구내식당이다.

 

강력팀 형사들을 끝으로 줄이 끊긴다. 나는 그제야 밥주걱을 내려놓고 숨을 돌린다. 내일은 일요일. 몸에 밴 음식 냄새를 벗기러 목욕탕에 가는 날. 때를 밀다 지치면 바나나 우유를 마시자. 천국이 따로 없으리라.

 

하지만 주말을 향한 기대는 눈앞의 풍경에 가차 없이 부서진다. 여사님들이 마스크와 비닐장갑을 벗더니 맨손으로 반찬을 집어 먹는 것이다. 침까지 튀기며 수다를 떨더니 손가락을 빨고 그 손으로 두건 밑의 정수리를 긁기도 한다. 기함할 노릇이다. 누가 보면 구내식당 위생이 엉망이라고 민원이 들어온다. 손도 씻고 마스크와 두건도 다시 쓰라고 잔소리를 날린다. 조리법 때문에 이미 한 차례 설전을 벌인 뒤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곱지 않고 여사님들도 신경질적으로 혀를 찬다.

 

그때, 강력팀 형사들이 식사하던 테이블에서 욕설이 터져 나온다. 수저를 탁탁 내려놓는 걸 보니 긴급 신고라도 들어온 모양이다. 형사들은 식판을 그대로 둔 채 뛰쳐나간다. 한숨이 나온다. 저걸 치우는 것도 내 몫이다. 뭐 하나 부탁할 때마다 반항적으로 나오는 여사님들을 부려먹느니 내가 하고 만다.

 

저녁 9시. 식당 문이 닫히고 여사님들도 퇴근한 시각. 주방 뒤의 코딱지만 한 사무실은 불이 환하다. 사무실이 왜 이렇게 구석에 처박혀 있을까. 그러니 내가 이 안에서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다.

 

잊을 만하면 누가 묻는다. ‘영양사님 하는 일이 뭐예요? 식단 대충 짜면 조리원들이 조리 다 해주고 밥이나 퍼 주면 되니 참 편하게 돈 버시네요.’ 그런 인간들 상판에 책상에 쌓인 이 서류들을 집어던지고 싶다.

 

식재료 발주, 검수, 조리원 인사 관리, 위생 점검, 손익 계산. 치를 떨며 자판과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형사팀의 이도원 형사였다. 또냐? 짜증이 솟는다. 최명우 그 인간이 날 데려오라 떼쓰는 걸 테다. 요즘 잠잠하다 싶더니, 그럼 그렇지, 제 버릇 개 줄까. 구시렁대며 형사팀으로 내려가자, 강력팀 형사가 와서는 그쪽이 아니라며 날 취조실로 데려간다. 이번엔 단순 폭행이 아닌가?

 

취조실 안에는 최명우가 형사팀 이도원 형사와 강력팀 조수환 형사를 마주보고 앉아 있다. 분위기가 요상하다. 이도원 형사가 얼빠진 얼굴이다. 최명우 저 인간 상대하느라 이골이 난 사람이 저런 표정이라니?

 

제일 이상한 건 명우다. 얘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서른 평생, 이 자식이 웃는 걸 처음 본다. 얼굴과 옷을 점점이 장식한, 피가 분명한 붉은 얼룩 사이로 피어오르는 해사한 웃음. 취조실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다. 평소 이 인간 때문에 열불이 나서 더우면 더웠을망정…….

 

명우는 옷차림도 백팔십도로 달라졌다. 츄리닝이 아닌 정장 차림에, 면도와 이발까지 말끔히 한 모습이다. 녀석의 어릴 적 얼굴을 몰랐다면 누군지 못 알아봤을 거다.

 

– 유경아, 오랜만이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장유경이! 장유경이 불러 오라고!’ 하며 오만상 찌푸리고 고함치던 그 인간이? 얼굴만 같고 인격은 정반대인 쌍둥이 같다. 저기 앉은 게 녀석의 형 최명선이라면 수긍이 가겠지만 둘은 판이하게 다른 외모다.

 

– 명우……? 최명우?

 

– 섭섭한데, 알면서 왜 물어.

 

빙그레 반문한다. 얘 목소리가 이렇게 감미로웠나?

 

나는 이도원 형사 옆의 빈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의자가 오늘따라 불편하게 느껴졌다. 평소와 확연히 다른 명우의 표정과 말투에 신경이 곤두서서일 것이다. 눈앞에 앉은 사람이 얼음조각상이고, 희푸른 냉기가 속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차라리 원래대로 눈알을 부라리고 악을 질러댔으면 싶었다.

 

멀거니 명우만 바라보는 사이 형사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날 왜 부른 건가 싶을 정도로 명우는 고분고분 답했지만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내가 형사들에게 밥을 퍼 주던 그 시각에 명우의 가족들이 살해당했단다. 최명우, 맨날 사람을 치고 물건을 부수더니 기어이……. 그런데 사건 직후 신고한 사람이 명우였다. 네 명을 죽인 게 본인이 아니란다. 그 증거로 살해 현장인 거실과 다이닝 룸에 설치된 CCTV 영상을 제공할 거라고.

 

– 범인이 누군지 보셨단 소리로 들리는군요?

 

퉁명스레 묻는 조수환 형사의 눈빛과 말투에서 짙은 조소와 불신이 배어나왔다.

 

– 그럼요. 범인은 마스랑 티프예요. 네 사람이 도발하긴 했지만요.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가족들의 개죽음을 말하는 명우는 시종일관 한숨 한 번 쉬는 일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오늘 저녁, 최재훈 박사 부부, 최명선 박사 부부, 최명우 이렇게 다섯은 저택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고 했다. 식사 중에 말다툼이 벌어지자, 험악한 분위기를 포착한 애완견 마스와 티프가 주인인 명우를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을 공격했다는 거다.

 

그들의 저택은 임포경찰서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명수산 자락에 위치한 2층짜리 한옥이다. 높은 담과 수목에 둘러싸여 안을 볼 수가 없지만 언젠가 전원주택 잡지에 소개된 것을 보니 저택보다는 궁궐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집이었다.

 

해당 궁궐, 아니 저택을 소유한 최 씨 일가는 일대에서 이름난 집안이다. 명우의 아버지인 최재훈 박사는 상당한 검도 실력의 소유자로 회장보다 박사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하는 대형 제약회사 창업주이고, 명우의 형인 최명선 박사는 모 대학교 생물학과의 박사 후 연구원인 반면, 최명우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남자다. 집지키는 개라고 해야 하나. 그가 산책할 때 대동하고 해가 지면 마당에 풀어놓는다는, 개인지 사자인지 구별이 안 되는 그 맹수들과 마찬가지로.

 

본가는 서울이지만 명선 명우 형제는 임포군에서 자랐다. 명선이 아토피와 천식이 심했기 때문이다. 성장한 후 명선이 서울로 진학하고 어머니마저 본가로 떠나버리자, 명우는 임포군에 홀로 남아 온갖 만행을 일삼았다. 폭행, 기물파손, 협박……. 임포군에서 최명우를 모르면 간첩이다. 한때 명품 매장에 진열돼 있었을 터이나 지금은 꾀죄죄하기 그지없는 츄리닝 차림. 시커먼 수염과 덥수룩한 머리칼 사이로 싸늘한 안광을 쏘아대며, 초대형 마스티프 두 마리를 끌고 다니는 남자. 산 아래 웅장한 대궐에서 홀로 지내다 심심하면 사람을 패고 남의 차에 몽둥이질을 하는 남자.

 

그러다 경찰서에 잡혀 오면 장유경이 데려오라고 난리친다. 짭새하고는 말하기 싫다는 거다. 나는 매번 욕이 나오지만 최명우가 피해자들과 합의하는 걸 거들 수밖에 없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장 선생이 와서 구슬려 주면 합의가 쉽게 되는데 법원까지 가고 일 복잡하게 만들어야겠냐고 이도원 형사가 애원하는 탓이기도 하다.

 

피해자들은 법대로 하자며 뻣뻣하게 굴어댄다. 그럴수록 합의금이 올라가는 걸 아는 까닭이다. 최명우도 법대로 하자고 감방 구경 좀 해 보자며 받아치는데, 내가 부모님 생각도 해라, 아들이 폭행죄로 구속된 거 소문나면 회사 이미지 깎이지 않겠니, 몇 마디 하면 제풀에 기가 꺾여서는 상대가 요구하는 합의금을 순순히 내준다. 그런 식으로 쓴 돈을 모으면 이 동네 신축 아파트 몇 채는 샀을 거다.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지는 절대 묻지 않는다. 이 인간 얼굴을 1초라도 더 보는 게 싫고,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고역인데, 개인적인 사연까지 나누라는 건 고문에 가깝다. 따라서, 합의가 성사되면 난 미련 없이 자리를 떠버린다.

 

그런데 오늘은 왜 부른 걸까. 살인죄면 합의할 사항도 아닌데다 명우가 한 것도 아니라는데. 나는 취조 도중 일어나서 문을 향했다.

 

– 죄송하지만 전 없어도 되겠죠? 하던 일이 있어서요.

 

– 유경아, 정말 반가웠어. 근데, 전화번호 좀 물어봐도 될까?

 

돌아보니 명우가 싱긋거렸다.

 

– 나 전화 없어.

 

나는 대답을 던지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취조실을 나섰다.

 

나는 전화기만 없는 게 아니라 통신 서비스 자체를 가입하지 않았다. 임포경찰서로 오기 전 길산중학교에서 근무할 때 학부모들 등쌀에 시달려서다. 길산시는 교육열이 전국 둘째가라면 서러운 동네여서 치맛바람이 토네이도 수준이었다. ‘선생님, 애가 학교 밥이 맛없대요. 가뜩이나 마른 애가 더 말라가요.’ 툭하면 날아오는 메시지들. ‘맛있게 하려면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서 아이들 건강과 정서에 좋지 않습니다.’ 항변하면 날아오는 답변. ‘건강에 좋다고 맛없어야 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이 정도면 공손한 거다. ‘우리 집에선 조미료 안 써도 맛있게 한다, 키 안 크면 책임질 거냐, 머리 나빠지면 책임질 거냐, 젊은 게 어른을 가르치려 든다, 식재료 빼돌리는 거 아니냐, 이 바닥에 발도 못 디디게 만들어줄까.’ 가장 참기 힘든 말은, 내가 고아원 출신인 걸 용케 알아내서는 ‘부모 없이 자라서 부모 심정을 모른다’고 하는 거였다. 전화를 없애버리자 출퇴근길에 쫓아오는 학부모들에게 불평불만을 들어야 했고, 교장 교감한테 하소연하면 자기 소관 아니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지옥을 탈출할 열쇠는 사직서뿐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이 닥치는 대로 취직할 때, 나는 대학 졸업장을 갖겠다는 일념으로 주경야독하며 휴학과 등록을 반복해 4년제 대학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했다. 졸업하기까지 꼬박 8년이 걸렸다. 그렇게 영양교사가 돼 놓고 1년 만에 그만둔 거다. 공무원 연금이 나올 텐데 그 좋은 직장을 왜 버리느냐고 사람들이 말렸지만, 당시 나는 길산중 교복을 연상시키는 베이지색 체크무늬 비슷한 것만 봐도 구토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마침 어린 시절을 보낸 임포군에서 경찰서 구내식당 영양사를 구한다는 공고가 떠서 지원했다. 사람에 치이는 게 지긋지긋해서 시골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로 합격했는데 업주가 굉장히 서두르는 눈치였다. 알고 보니 전 영양사가 그만 둔다는 말도 없이 잠적한 상태였다. 즉시 다른 직장을 알아봤어야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할 일이 산더미였는데 가장 큰 문제가 소위 여사님이라 불리는 조리원들이었다. 그들이 부리는 텃세는 길산중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정도로 심해서, 조리 지시를 무시하는 일 따위는 약과에 속했고, 예상 분량보다 많이 만들어놓고 몰래 싸 가질 않나, 설거지며 기구 관리를 대충하고 퇴근해버리질 않나, 내가 문제를 제기하면 저들끼리 똘똘 뭉쳐 보란 듯이 태업을 했다. 학교와 달리 삼시세끼를 다 준비해야 돼서 새벽부터 밤까지 그들과 함께하는 내내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업주는 1원이라도 더 뽑아내려고 발악을 했다. 때문에 식재료는 전국팔도를 수소문해 최저가를 구해올 수밖에 없고, 업주가 간섭하는 바람에 식단도 몇 번을 갈아엎는지 모른다. 도저히 단가를 맞출 수가 없어 불고기에 떡을 섞으면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친다. 떡만 있고 고기는 없다는 거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요리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우리집’이었던 ‘소망의 집’은 하루 세끼라도 얻어먹으면 감지덕지해야 할 환경이었기에 별다른 소망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유일한 소망은 잿빛 스테인리스 식판이 아니라 뽀얀 사기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 거였다. 그러면 부실한 찬과 국이 맛있어질 줄 알았으니까.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는 그릇이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닫고 요리사를 꿈꿨지만 누군가가 말렸다. 식당 주방장들이 왜 남자인지 아냐고. 중노동인데다 위계질서가 군대 못지않다는 거였다. 진로를 영양사로 바꾼 이유다. 지금에 와서는 한심하기만 하다. 평생 먹는 것에 집착해온 것 같아서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나 싶고, 여기다 청춘을 바쳤는데 그만두면 뭘 하나 싶다. 이러다 자살한 영양사로 뉴스에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취조실을 나오니 쓸데없이 시간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다시금 신경질이 났다. 지친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돌아와 서류와 계산기를 내려다보니 전부 찢고 부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한숨만 한 번 푹 쉬고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해하고 있었다. 막차를 놓치면 집까지 걸어가야 했기에 얼른 가방을 챙겨 건물을 나섰다. 오늘도 막차 퇴근이다. 여사님들과의 실랑이, 쉴 틈 없는 중노동, 골치 아픈 서류 작업. 푹 삶은 시금치처럼 흐늘거리는 날이었다. 내일이 일요일이라는 사실 하나만이, 쓰러지지 않고 집까지 당도하게 할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었다.

 

밖은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도로와 인도 사이에 늘어선 물웅덩이에 거친 파문이 일고, 세상은 세찬 빗소리와 함께 암흑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나는 우산을 꼭 쥐고 암흑을 가르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나아갔다.

 

우산이 휘청거릴 정도로 불어대는 바람. 우산 밑으로 사정없이 튀어 들어오는 빗방울들. 옷이 금세 젖어버렸다. 피부에 옷이 찰싹 들러붙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 몇 초 안 가 샌들과 스타킹도 흥건해졌다. 신발 안에서 발이 찍찍 미끄러질 때마다 욕을 퍼붓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그때, 붉은색의 커다란 SUV가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빠른 정도가 아니라 레이싱이라도 하듯 도로를 날고 있었다. 그런 탓에 바퀴가 물웅덩이를 가르며 물살이 튀어 오르고, 나는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망할!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인내심이 날아가 버렸다. 나는 우산을 집어던지고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 야! 양심 좀 있어라, 사람이 보이면 속도를 줄여야지! 5분 빨리 가려다가 50년 먼저 가는 거 모르냐! 확 그냥 지옥에나 떨어져라!

 

내 말을 들은 걸까? 별안간 새빨간 브레이크 등이 켜지며 차가 멈춰 서더니 이쪽으로 후진하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났다. 더 세게 따져야 할지 아무 말도 안 한 척 가버려야 할지 안절부절 못 하는 사이 머리부터 발까지 쫄딱 젖고 덜덜 떨리는 한기가 몰려왔다.

 

사지가 일으키는 진동을 의식하며 사방을 둘러봤다. 늦은 시간인데다 경찰서가 읍내 변두리에 있다 보니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한밤중 귀갓길에 납치당해 농수로에서 시체로 발견된 여자들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내가 그 기사의 주인공이 되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서 있어선 안 된다. 반대로 돌아 냅다 달렸다.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옆을 쌩하니 지나치는데 물보라가 솟구치며 또 한 번 전신을 덮쳤다. 이번엔 어처구니가 없어 욕도 안 나왔다.

 

뻣뻣하게 굳어서 망연히 서 있는데 차가 멈추고 사람이 내렸다. 굵은 빗줄기 사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니 어깨가 떡 벌어지고 머리가 짧은 게 남자인 것 같았다. 진짜 나를 납치하려는 걸까? 다시 반대로 돌아서 무턱대고 달리기 시작했다.

 

– 유경아!

 

남자가 불렀다. 그때 무시하고 떠났으면 기이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 불가사의한 격랑에 휩쓸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제 이름이 불리면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보는 게 인간의 본능이었다.

 

남자는 최명우였다. 장우산 아래 어두운 그늘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보다도 하얀 이를 내보이며 명우가 환하게 웃었다.

 

– 역시 너였구나. 네 목소리 같았어.

 

– 내 목소리? 욕하는 걸 들었어?

 

명우가 우산을 씌워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런 꼴로 만들어서 미안하네. 마스랑 티프가 가만있질 않아서 맘이 급했어. 정말 미안. 널 이렇게 만든 죄로 지옥에 가야 한다면 기꺼이 갈게.

 

– 미안하면 됐어. 지옥은 무슨. 아, 안녕.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날 보며 짓는 웃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걸 마주하는 내 심장이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지도. 말쑥한 모습으로 느닷없이 나타난 미남자가 현실 같지 않았고, 그런 남자와 한 우산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현기증이 일었다. 그렇게 허둥지둥 뒤돌아서던 나는 그만 두 발이 꼬이며 넘어지고 말았다. 젠장! 되는 일이 없다.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짜증과 무기력함에, 무릎이 욱신거리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명우가 내 팔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 괜찮아?

 

냉수처럼 내리쏟는 비보다도 싸늘한 감촉에 나는 소스라치며 팔을 뿌리쳤다. 그때 버스 소리가 가까워졌다. 버스는 차를 왜 이렇게 세워놨냐는 듯 고막이 찢어지도록 빵빵대더니 우리를 지나고 빈 정류장도 인정머리 없이 지나 저 멀리 사라져갔다. 안 돼!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맥이 풀려 일어날 생각도 못 하는데 명우가 내 손에 우산을 쥐어주더니 뚜벅뚜벅 걸어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 타. 집까지 태워줄게.

 

그래, 네 녀석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 그 더럽게 비싼 차 좀 얻어 타 보자. 이게 바로 매점 언니가 마트에서 봤다고 호들갑 떨던 컬리넌이라는 차로구나. 그런데 막상 타려니 못 앉겠다. 저 부드러운 베이지색 가죽 시트가 나 때문에 엉망이 될 것 같았다.

 

– 괜찮아. 그냥 타. 시트야 갈면 되니까.

 

좋아, 그것도 날 이렇게 만든 값이라 생각해라. 호기롭게 조수석에 올라앉은 나는 펄쩍 뛰어오르고 말았다. 뒤에서 우렁차게 짖어대는 개들 때문이었다.

 

– 마스, 티프, 조용!

 

명우의 단호한 목소리에 맹수들이 입을 다물었다.

 

– 유경아, 미안해. 얘들이 경계심이 심해서. 그래도 내 말은 잘 듣는 애들이니 괜찮을 거야.

 

명우가 다시 개들을 돌아봤다.

 

– 이 분은 소중한 친구야. 둘 다 얌전히 굴어.

 

명우가 운전석으로 돌아오는 몇 초 동안 나는 사자견들이 덮칠까 봐 두려움에 떠느라 ‘소중한 친구’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지 못 했다. 하지만 개들은 얌전했다. 주인 말을 잘 듣는다더니 진짜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개들이 가만있질 않아서 속도를 냈다면서 왜 그때는 개들을 내버려뒀을까? 하나 더, 개들이 가족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때에도 명우는 왜 말리지 않았을까? 순간, 얼음물을 퍼부은 듯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내릴까 말까 고민하는데 차는 이미 출발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차 안에 어색하게 맴도는 침묵 속에서 나는 뭐라도 할 말을 찾아야 했다.

 

– 쟤들…… 아직도 키우네? 안락사 안 시켰어?

 

– 안락사? 무슨 죄가 있다고.

 

– 죄가 없다는 거야?

 

– 당연하지. 주인인 나를 지키려고 그런 건데. 마스랑 티프가 아니었으면 난 지금 산 사람이 아닐걸.

 

그렇다면 죽은 네 사람이 명우를 죽이려고 했단 말인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한편으론 고개가 끄덕여졌다. 최명우한테 앙심을 품은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명우는 내 근황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고, 나는 경계심을 바짝 조인 채로 성의 없는 대답을 이어갔다. 그러다 도착한 ‘우리집’. 내가 세 든 2층짜리 주택이다. 평범한 서민들이 사는, 지은 지 몇 십 년 된 고만고만한 양옥집이 늘어선 동네에 있다. 2층에는 집주인, 1층에는 신혼부부, 반 지하에는 나와 또 다른 세입자가 산다. 이런 날씨에는 집에 물이 들어찰까 걱정되는, 보증금 오백만 원에 월세 삼십만 원짜리 보금자리, 락스로 닦아낸 자리 위에 또다시 곰팡이가 스멀대는 나만의 안식처다.

 

명우가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우산을 받쳐주며 대문까지 따라왔다. 주인할머니가 키우는 진도가 안에서 왕왕 짖어댔다. 동거인과 동네 주민들을 다 알아 함부로 짖지 않는데, 명우가 낯설어서 저러나. 아님 마스와 티프 때문인지도. 차 안에서 맹견 두 마리도 지지 않고 짖어대고 있었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문을 닫아놓은 게 소용이 없고 차까지 들썩대는 통에 고막이 먹먹하고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산 속의 명우는 그 안이 다른 세상이고 바깥 소음은 전혀 안 들린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작은 종이가방을 건넸다.

 

– 자, 생일 선물.

 

– 생일 선물?

 

– 응, 서른 번째 생일 축하해. 오늘이 네 생일이잖아.

 

가족들이 살해당한 날 초등 동창의 생일을 챙기는 남자라니. 장례식장에서 반쯤 미쳐 술을 퍼 마시거나 가족들의 영정사진을 붙들고 통곡하기는커녕 이렇게나 차분한 모습으로. 흙탕물을 몇 번이나 뒤집어쓰다 명우를 만난 아까보다도 꿈같은 현실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을까? 나조차도 잊고 있던 건데. 내 생일이 맞는지도 모르겠어서 한 번도 소중하게 챙겨 본 적 없는 날짜를. 그러다 생각났다. 딱 1년 전, 명우가 공원 주차장에서 주차 문제로 누군가와 드잡이를 하다 제 차로 상대의 차를 박아버린 날이었다. 차주 간에 합의를 보는데 또 내가 동원됐다. 합의가 끝나 일어서는데 이도원 형사가 상자에 담긴 롤 케이크를 내밀었다. 생일날 이런 고생 시켜 미안하다고. 형사가 인심 좋은 삼촌들이라면 으레 지어보일 만한 웃음을 짓는데, 그 옆에서 명우는 빨리 내보내 달라고 꽥꽥거리고 있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건가.

 

단단히 빗장을 지른 마음에 균열이 생기며 감동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개소리는 여전히 골목을 뒤흔들고 있었고, 그 탓에 캄캄한 창문에 불이 하나둘 켜지며 주민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 고마워. 잘 가.

 

짧게 내뱉고 종이 가방을 낚아채는데 명우와 손이 스치고, 그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또 소스라치고 말았다.

 

방에 뛰어 들어가 선물부터 풀었다. 안에 든 것은 최신형 스마트폰과 하트 모양의 분홍색 카드였다. 카드에는 ‘생일 축하해.’ 한 문장이 쓰여 있고, 전화기에는 최명우 한 명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었다. 나는 피식하고는 지저분한 내 몰골은 잊은 채, 오랜만에 가져보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2년 가까이 전화 없이 살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불편한 게 없었다. 연락을 주고받을 가족도 친구도 없다는 씁쓸한 이유 때문이다.

 

소망의 집 원장님과 부원장님은 어느 소설들에 나오는 것처럼 악질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천사도 아니었다. 두 분이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사무적이어서, 상을 받아와도 ‘수고했구나.’ 한 마디가 고작이었고 사고를 쳐도 매뉴얼대로 체벌하고 끝이었다. 섭섭하지도 고맙지도 않았기에 나도 내 일을 사무적으로 해냈다. 잘난 것도 모자란 것도 없는 평범한 아이로 자란 것이다. 그럼에도 열아홉에 그 집을 나오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간단한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새 인생을 살고 싶었다. 구질구질한 과거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내가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수시로 따돌림 당해야 했던 악몽을 상기시켰다.

 

형제자매처럼 지내던 아이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그건 내 생활이 이 모양인 게 크다.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며 퇴근하는 인생. 일요일에는 몸과 옷에 밴 음식 냄새를 씻고 세탁하느라 진이 빠져 월세집 근방 500미터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렇다 보니 친구도 연애도 귀찮기만 했다.

 

– 잘 들어갔어?

 

명우에게 문자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장이 왔다.

 

– 잘 들어왔어. 내일 저녁에 시간 돼?

 

<span class="fo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