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지, 잊고 있었다.

그랬지,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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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계속되는 보충 수업이 지긋지긋해질 무렵이 되자 아빠가 깜짝 선언을 했다.

 

 

아빠 친구가 발견한 여행 장소에 가자는 것이었는데 무슨 신이 산다는 계곡이라 현지인들은 가기를 꺼리고 외지인들은 아예 모르는 장소였다. 어쩐지 공포영화 첫 장면 같아 찝찝했지만 보충을 삼일이나 빠지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근처에 산다는 아빠 친구 가족보다 더 먼저 계곡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풀었다. 이동하는 내내 경치가 그림 같다는 이야기를 연거푸 들어 기대보다 못 미칠 법도 했지만 계곡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멋진 곳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푸른 침엽수들과 키가 겅중한 수풀이 운치있게 자라 있었고 푸른 하늘빛이 물 속에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물은 수정처럼 맑아 바닥에 깔린 돌과 자갈 자잘한 모래 한알 한알 까지 세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수질 오염은 딴 세상 이야기 같을 정도로 맑은 물이었지만 낯선 방문객들을 보고 숨었는지 송사리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간만에 좋은 장소를 찾은 아빠는 현지인들도 오지 않는 숨은 명소라며 자랑스럽게 떵떵거렸다. 확실히 지대가 높아 밤중에 폭우가 쏟아지더라도 헐레벌떡 자리를 피할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다른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다른 가족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담소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취객들의 혀 꼬인 노랫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니, 그만하면 괜찮았다.

 

 

경치를 조금 더 자세히 볼 요량으로 작은 탐험을 시작했다. 혹시라도 더 멋진 장소를 발견한다면 가족들에게 가르쳐 줘야지. 어쩌면 아빠 친구나 주민들도 몰랐을 멋진 곳을 새로 발견하고 엄마 아빠에게 자랑할 생각에 용기있게 차가운 물 속을 걸어 들어갔다.

 

 

허벅지까지 오는 물을 건너 덩굴과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히 자란 절벽 쪽으로 가자 어디선가 우우우 하는 바람 소리가 울렸다. 어딘가 동굴이라도 있는 것일까. 절벽을 살펴보는데 덩굴 한 줄기가 바람결에 살풋이 들렸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비밀의 정원이라도 발견한 듯 설렜다. 아프리카나 아마존에 처음 도착한 사람의 기분이 이랬을까? 미지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처럼 신비로운 기분에 사로잡혀 덩굴을 살짝 들추자 안에서 하얀 얼굴이 튀어나왔다.

 

 

“어흥!”

 

 

뜻밖의 급습에 놀라 계곡 물 위로 넘어졌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배꼽이 빠져라 웃으며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깜짝 놀랐지! 바보 여긴 내가 먼저 발견했지롱!”

 

 

그랬지. 난 여기 혼자서 여행을 온 것이 아니었다. 장난을 성공한 것이 뿌듯하고 재미있었는지 깔깔거리는 언니를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아 이러는 게 어딨어! 진짜 놀랐잖아!”

 

 

“바보야 낯선 곳에 오면 어련히 조심해야지. 그렇게 얼 빼놓고 다니면 나중에 잡혀간다?”

 

 

“여기 누가 있다고 잡아가기는 잡아가냐? 진짜 깜짝 놀랐네! 아오!”

 

 

“내가 잡아간다 바보야! 얼른 따라와, 언니랑 같이 돌아다니자!”

 

 

언니는 동굴 속으로 반쯤 들어선 채 내 손목을 잡아 끌며 말했다.

 

 

“아, 어디가는데에!”

 

 

“그냥 따라와봐.”

 

 

언니는 내 손목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왜애, 아 진짜, 내 발로 걸어갈테니 이렇게 하지 마라. 아, 이렇게 연행하지 마라.”

 

 

그랬지. 언니는 이렇게 탐험심과 모험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동네 뒷산이나 공원 수풀 같은 곳을 곧잘 헤치고 돌아다녔던 사람이었다.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면서 돌을 파내고 풀을 뜯고 그게 무슨 대단한 발견인양 엄마한테 자랑스럽게 내보이곤 했다. 어린애 답지 않게 등산을 즐기고 돌맹이 하나 쉽게 보지 않은 언니가 지질학을 전공한 것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이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무슨 영화 속 엘프 동네 같은 풍경이었다. 동굴은 여러 개의 바위가 쌓여 맞물려 있는 긴 터널 같은 곳이었다. 멀리 동굴 끝에서 황금빛 햇살이 쏟아지고 있어 조금 침침하기는 해도 어둡지는 않았다.

 

 

쾌적한 환경 덕인지 동굴 안엔 여러가지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커튼처럼 입구를 덮고 있는 덩굴과 잎을 활짝 피운 고사리, 녹색 벨벳처럼 바위 위를 덮은 이끼 등 딴 세상 같은 풍경이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터널인 것 같아. 옛날에는 그래도 사람이 조금 지나다녔던 것 같은 모양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잊혀졌나봐.”

 

 

그러고보니 원래 이렇게 어딜 가나 설명하고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무슨 박물관 비슷한 곳이라도 가면 옆에서 하루 종일 떠들어 대는 언니 탓에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뭔가를 열심히 받아 적는 일도 있었다. 전시된 표본들에 대한 언니의 애정은 끔찍해서 누가 식물 표본에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기라도 하면 바로 뛰쳐나가 제지했다.

 

 

“자, 가보자.”

 

 

“아, 귀찮아. 뭔데.”

 

 

“좀 가보자. 너는 무슨 애가 방안 퉁소마냥 구석에만 쭈그리고 있으려고 하니.”

 

 

“아, 어디로 가는 지는 알고 가는 거야?”

 

 

“아니까 따라 오기나 하셔요.”

 

 

동굴은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터널 같았다. 산 바로 아래를 통과하는 듯 길었지만 발 아래로 바위와 졸졸 흐르는 물이 어슴푸레 보일 정도로 밝았다. 무심코 발을 딛자 이끼를 밟았는지 그만 휘청하고 미끄러졌다. 언니가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질 뻔 했다.

 

 

“아, 깜짝이야.”

 

 

좀 더 안전하게 갈 요량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앱을 켰다.

 

 

“뭐야?”

 

 

“플래시 첨보냐.”

 

 

“샀어?”

 

 

“바로 엊그제 약정 끝났거든요. 아 뭐 무슨 동생한테 관심이 쥐똥만도 없어. 님 풀떼기에 신경쓰는 것 만큼 나한테도 관심 좀 쏟아라.”

 

 

“지금 써 주잖니. 얼른 따라오기나 해.”

 

 

하… 누굴 닮아서 저렇게 추진력이 넘치는지…

 

 

“아오! 뭔놈의 길은 또 이렇게 험해가지고 사람을 힘들게 하냐.”

 

 

“원래 산길이 다 그렇지. 봐, 위에, 멋있지 않니?”

 

 

언니는 동굴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가 보이길래 멋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걸까. 플래시를 위로 비추자 기골장대한 바위들이 서로 맞물려 있는 가운데 한 뼘도 되지 않을 듯 작은 박쥐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박쥐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쟤네가 그 황금박쥐야.”

 

 

퍽 들뜬 목소리였다. 배가 다른 곳보다 조금 누리끼리할 뿐 딱히 황금색으로 보이지는 않는 작은 박쥐가 그리도 좋을까.

 

 

“십일월부터 삼월까지 동굴에서 잠을 자는 애들이야. 여름에는 고목이나 수풀 사이에서도 쉬는데 다른 박쥐들 처럼 야행성이지. 지금은 낮이라 다 자고 있는 거야.”

 

 

황금박쥐고 황동박쥐고 조금도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였다. 언니는 물 만난 고기처럼 이 돌은 무슨 돌, 과거에 무슨 지각 변동이 있었을 것, 신나게 설명했다.

 

 

“아, 다리 아퍼 좀만 쉬어.”

 

 

“어머 얘, 앞으로 갈 길이 먼데 언제 그러고 있니. 얼른 일어나.”

 

 

“아 몰라 그럼 나 안갈거야.”

 

 

정말 더이상은 걷기 힘들었기에 아무 바위에나 철푸덕 주저 앉았다. 꽤 오래 걸은 것 같은데 아직까지 끝이 안나온다니 얼마나 긴 거지.

 

 

“알았어 알았어. 쉬어. 으유 지지배.”

 

 

바람결에 싱그러운 풀 냄새와 축축한 이끼 냄새가 실려왔다. 조금 어둡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쾌적한 장소였다. 멀리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굴 바닥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 가느다란 물줄기가 모여 바깥에 커다란 소를 만든 것일까. 물 아래로 백황색 모래가 비쳐 보였다. 이끼가 덮여 푸르게 물든 돌들과 검은 자갈.. 흰 자갈.. 새끼 손톱. 새끼 손가락.

 

 

잘못 본 것일까. 잠깐 흰 손가락 비슷한 것이 보였던 것 같았다.

 

 

다시 플래시를 비추자 손가락 같은 것은 흔적도 없었다. 역시 잘못 본 모양이구나. 흰 자갈 같은 것을 착각한 것 같았다. 어쩐지 공기가 무거워진 기분이 들며 한기가 돌았다. 언니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으아으윽!”

 

 

깜짝 놀라 거의 반사적으로 플래시를 비추었다. 거의 클렌징 폼 뚜껑만한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무심코 그것의 얼굴을 보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나무 껍질 같은 피부에 녹색 잔이끼가 껴 있었고 건조하게 일어난 얼굴 틈으로 드문드문 흰 버섯같은 것이 사마귀처럼 피어 오르고 있었다. 뱀처럼 완벽하게 구형을 이루고 흰자가 아주 얇게 검은자를 두르고 있는 눈은 나를 탐색하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꼼짝 없이 굳어버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검은 지느러미처럼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내 뺨을 스쳤다. 끔찍하게도! 정말 끔찍한 사실이지만 바퀴벌레나 그리마 같이 징그러운 생명체들은 그 모습에 역겨움을 결정해주는 부분이 가장 부드러웠다.

 

 

“흐으으…”

 

 

괴물의 손은 몹시 가느다랗고 길었다. 나무 뿌리처럼 단단한 손가락이 바이스처럼 내 팔을 조이고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아니 사람인지 조차 알 수 없는 그것의 손가락은 대리석처럼 매끈하고 차가웠다.

 

 

“이거.. 좀… 놔.. 주세요…”

 

 

괴물은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일까. 아니면 내가 무슨 환각 비슷한 거라도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것은 안면을 찌푸렸다. 괴물은 내 팔을 잡은 채 어디론가 끌고 갔다. 현실감이 들지 않아 멋모르고 괴물을 따라 털래털래 발걸음을 옮겼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개 숙여!”

 

 

동굴에 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얼른 그 말에 따르자 내 머리통 만한 검은 그림자가 훅 날아들었다. 바윗돌이었다. 모가 난 바윗돌은 허공을 가르고 괴물의 뒷통수에 직격했다. 육중한 돌덩이를 직통으로 맞은 괴물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어안이 벙벙해 자리에 붙박힌 듯 선 나를 언니가 잡아 끌며 외쳤다.

 

 

“뭐해! 얼른 뛰어!”

 

 

뜀박질을 하려는 찰나의 순간, 괴물의 손이 옷자락을 살짝 스쳤다. 괴물의 손가락에 걸린 섬유가 피부를 가볍게 스치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나를 놓친 괴물은 화가 난 듯 괴성을 질렀다. 무슨 사자나 호랑이가 울부짖는 것 같은 고성에 등줄기에 소름이 훅 끼쳤다.

 

우리는 황금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출구 쪽으로 내달렸다. 방금 그것은 사람이었을까. 아니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 몰골이었다. 돌마다 이끼가 끼어 이리 미끄러지고 저리 부딫히면서도 혹여 잡히기라도 할까 얼른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더이상은 뛸 수가 없었다. 그렇게나 달렸는데도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 처럼 출구는 도저히 가까워지지 않았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밥먹고 운동만 했던지라 체력에는 자신이 있던 나도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픈데 언니는 숨 하나 차지 않은 기색이었다.

 

 

“잠깐, 잠깐만!”

 

 

이젠 정말 제대로 설 수 조차 없었다. 계속해서 달리려는 언니를 억지로 멈춰 세우고 급히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왜그래?”

 

 

그렇게 묻는 언니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야외활동을 많이 해서 체력이 늘어난 것일까. 원래 그렇게 많이 움직였었나?

 

 

“잠깐 쉬어, 이제 안 오지.”

 

 

동굴 안은 조용했다. 바위 너머를 흘깃 보자 멀리 괴물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봤어? 뭐야? 뭐지?”

 

 

“쉬이, 쉿쉿. 이 쪽으로 올지도 몰라.”

 

 

우리는 바위 너머로 눈만 빼꼼히 내밀고 괴물을 살펴보았다. 괴물은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괴물은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공포에 단단히 굳은 언니의 고개를 억지로 누르고 다시 바위 밑에 숨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언니는 거의 납작 엎드리다시피 웅크렸다. 아까는 용감하게 나서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겁을 집어먹으니 혼란스러웠다.

 

 

“지나갈 때까지 여기 숨어있자.”

 

 

한 순간 언니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아, 하긴 아까부터 계속 저쪽 너머에 가고 싶어했으니까 조금 실망했겠다 싶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상황인데 탐험 따위가 무슨 소용이라고 얼굴까지 구기는 건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 놈의 탐구심 좀 접어두면 안될까.

 

 

산들바람에 출구를 가리고 있던 덩굴 하나가 동굴 안으로 살랑였다. 바람결에 간지럼을 탔는지 금빛 이파리 한 쌍이 팔랑거리며 저 너머로 날아갔다. 이파리들은 하나 둘, 덩굴에서 떨어져 허공으로 날갯짓했다. 환상적인 광경에 넋을 놓고 있는데 잎 한쌍이 이 쪽으로 날아들어왔다.

 

 

동굴 안으로 사뿐사뿐 날아들어와 내 손등에 앉을 듯 말 듯 팔랑거리는 것은 이파리가 아니라 노랑나비였다. 세상에 요정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어쩐지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나비를 보자 두려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한 마리, 두 마리… 여섯 마리… 나비들이 날아 들어와 내 주변을 둘러 쌌다. 우릴 지켜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아, 기분 나빠.”

 

 

그렇게 악의가 느껴지는 목소리는 난생 처음이었다. 방금 전 까지 벌벌 떨고 있던 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나비를 쫓았다.

 

 

“왜그래?”

 

 

“기분 나빠. 정말 구질구질하고 짜증나는 존재야. 비켜,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