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8화 “나쁘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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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바다 속은 심연으로 닫혀 있었다. 달빛 한 가닥 깃들지 않는 두터운 물길이 스스로 암흑을 자맥질하며 어떤 빛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결치는 블랙홀이 갑자기 찾아든 인간 하나를 발견하고는 차가운 물보라로 유혹하며 심연 너머로 끌어당겼다. 축축한 어둠이 겹겹이 밀려들었다. 무한대로 너울대는 칠흑의 감옥 세상을 권민은 심드렁히 돌아다녔다. 떨쳐버려야 할 잡념이 조류를 타고 권민을 뒤쫓았다. 틸리 브라운과 나눴던 대화가 겨울바다의 냉기와 뒤섞이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경찰에서는 스미스 사건을 계기로 갱단을 길들이려는 계획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대니얼 스미스가 속해 있던 갱단의 실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월척이었다. 스미스가 갖고 있던 글록17 권총도 밀수품으로 드러났다. 마약과 인신매매, 총기밀매까지 영역을 넓힌 오만함에 경찰은 소탕하고픈 의지가 들끓었다. 하지만 그 정도 위기에 움찔할 갱단이 아니었다. 사업을 통 크게 벌이는 놈들이라면 반항도 통 크게 질러대는 법이다.

 

틸리 브라운은 갱단 놈들한테 동료 여럿을 잃은 뒤부터 몇 배로 더 신중해졌다. 권민을 대하는 말투에서부터 노파심이 돋쳐 있었다. “놈들이 독이 올랐어, 갱단 애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틸리의 주름진 표정에서 분노가 묻어나왔다. “조사 중이던 수사관 하나가 기습당했어,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이게 끝이 아닐 거야,

 

그리고 티메이트 사건 역시 배후가 갱단이었어, 두 패거리가 연합을 맺었다더군, 전쟁이야, 피바람이 불 거야,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라, 놈들이 벌써 십대 조무래기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어, 아무래도, 민, 당분간 탐정일은 하지 마라, 네 존재가 드러나면 큰일이다.” 특수수사대만 섭렵해온 베테랑 경찰의 당부이자, 또 동지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오랜 친구의 당부였다.

 

권민의 치밀한 조심성 덕분에 정체가 노출될 확률은 극히 낮았다. 하지만 언제나 가능성은 대비해야 했다. 만약 이번 일로 신상의 일부분이나마 노출된다면, 입소문을 타고 다른 갱단 무리들에게도 유명세가 퍼질 것이다. 스미스나 티메이트 쪽 갱단만이 문제가 아니다. 체리레드 갱단 놈들도 자신들을 무너뜨렸던 과거 사건에 대해 실마리를 얻게 될 것이다. 당시에 놈들은 사립탐정 한 명을 죽이고 경찰 서넛을 해치우며 승승장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범죄행각을 들키고 비밀자산까지 깡그리 공중분해 당하는 불상사를 겪어야 했다.

 

놈들이 여러 끄나풀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경찰이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경찰은 그저 뒤처리만 맡았을 뿐, 익명의 누군가가 물어다준 선물을 자기들 업적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도주한 갱단 간부들이 사건의 진상을 캐려고 치열하게 뒷조사했지만 원수가 누군지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권민은 심연을 벗어나 해변으로 헤엄쳐 나왔다. 보온효과가 배가된 스쿠버용 드라이 슈트지만 여름처럼 장시간 유영할 수는 없었다. 물안경과 네오프렌 후드를 벗자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가 맨살을 파고들었다. 생각은 심연을 나오기 전에 이미 정리됐다. 한동안 플랫에 틀어박혀 물놀이나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생업은 따로 있으니 생계 걱정도 없다. 본업인 네트워크 컨설팅 업무에 매진하면서 불특정 일반인으로 살면 된다. 그동안은 탐정 일정에 맞추느라 소수의 일감만 받고 작업방식도 원격으로만 진행했는데, 이제는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됐다.

 

들쑥날쑥 변덕을 부리는 게 인생이라고 권민은 머릿속에서 중얼거렸다. 변덕스런 상황이 던져준 패에 굳이 도전정신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가치관 속에서 인생은 상황과 의지가 씨줄날줄로 교직된 옷감이었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어떤 의지로 반응할 것인가에 따라 인생이라는 피륙의 결이 결정된다는 걸 숱하게 목격해 왔다.

 

누군가는 교활하게 치고 빠지며 매끈한 비단으로 인생을 직조하고, 또 누군가는 미련하게 달려들다가 구멍 숭숭한 거친 무명 한 포 남기고 산화해 버린다는 걸 권민은 종종 되새겼다. 맞서느냐, 피하느냐, 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 매달린 외줄을 타는 일이 연쇄살인마를 쫓는 탐정 일보다 훨씬 더 아슬아슬했다.

 

슈트의 물기를 닦은 타월을 모랫바닥 위에 깔았다. 배낭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타월 바닥에 내려놓고는 앉은 채로 간단한 맨손체조를 하며 상반신 근육을 풀었다. 실수였다. 맨손체조를 마친 후에 샌드위치를 꺼냈어야 했다. 어두운 허공 틈바구니에서 비행체 하나가 급습해 권민이 한눈파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샌드위치를 낚아채 달아났다. 날치기꾼이 누군지는 뻔했다. 군것질 약탈은 갈매기가 출몰하는 해안가 마을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권민의 샌드위치를 훔쳐간 갈매기 녀석은 상대가 방심하는 틈을 포착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잠복하는 인내심까지 갖고 있었다. 녀석이 날아가면서 흘린 샌드위치 내용물 몇 가닥이 중력에 이끌려 피해자 옆 모랫바닥으로 철퍼덕 떨어져 내렸다. 권민은 다시금 깨달았다. 인생은 이렇듯 들쑥날쑥 변덕을 부린다는 걸. 다행히 시리얼바가 남았다. 다시는 뺏기지 않으려는 듯 시리얼바 두 덩어리를 양손에 꽉 쥔 채 주변을 경계하며 씹어 삼켰다.

 

후드파카에 파묻힌 권민은 타월 위에 누워 달안개 너머 심연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늘에서 크리스마스 장식 구슬 하나가 금박 빛깔을 깐족이며 날아다녔다. 구슬을 물고 있는 건 역시나 갈매기였다. 부둣가 마을 길목에 지천으로 깔린 장식물 중에서 맘에 드는 걸 훔쳐와 바다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다른 구술도 눈에 밟혔는지 녀석은 한동안 허공을 맴돌다가 뒤따라 날아든 친구의 날갯짓에 이끌려 먼 바다로 함께 사라졌다. 두 녀석의 우정이 잔영으로 남아 권민의 시야에서 한동안 아른거렸다.

 

먼 어둠 속으로 기꺼이 같이 떠나주던 친구가 권민에게도 있었다. 넘쳐나는 동정심과 용기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이었다. 템스 강에 빠진 이방인 소녀를 익사 직전에 구해내고 본인은 혼수상태로 누워 있어야 했으며, 10대 패거리에게 둘러싸인 청년을 지키기 위해 옆구리에 칼부림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체리레드 갱단에 납치된 의뢰인을 빼내려고 맨몸으로 쳐들어갔다가 가슴에 총알이 박힌 꼴로 실려 나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농담이나 뇌까리던 고집불통 노인네였다. 무고한 사람들의 비극을 막아내는 일이야말로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떠벌리던 런던의 돈키호테 탐정은 적의 사기만 올려준 채 가족과 친구들의 마음에 치명타를 날리고 떠나버렸다.

 

그는 세상을 지배하는 정글의 논리는 알았지만 정글의 위험을 피해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정공법으로 세상을 상대했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는 용기 있게 행동하면 그만이었다. 위험 정도를 따지며 잔머리 굴리는 행위를 비웃었고, 저승에서도 여전히 비웃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권민은 생각이 달랐다. 친구의 비극에서 그녀가 얻은 교훈은 교활함이었다. 적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용맹함은 덫으로 돌아올 뿐이다. 탐정으로서의 유명세는 권민이 원하는 전리품이 아니었다. 적이 모르는 적, 적일 거라 추측하지도 못하는 적, 철저히 유령으로 남는 것이 권민이 세상을 상대하는 철칙이었다.

 

바다에서 돌연 밀려드는 해풍에 나일론 파카가 마찰음을 일으켰다. 파도가 거세지고 있었다. 권민은 수영 장비를 챙겨 넣고는 해변 둔치를 벗어나 번화가 불빛 속으로 합류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탐정의뢰 전용 휴대폰이니 당분간 정지시켜둘 생각이다. 전원을 끄려는데 발신자번호가 눈에 익었다. 이수진 사건을 맡겼던 의뢰인의 번호였다. 마지막으로 받았다. 의뢰인은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며 정중히 물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어차피 시간도 많았다.

 

 

 

“우리 내일 아침 일찍 떠나요.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었는데, 막상 간다고 하니까 권민 탐정이 보고 싶더라고요. 얼굴이 어찌나 삼삼하게 떠오르는지.”

 

“아, 오해는 마세요. 우리 소장님이 지금 사랑고백 하시는 건 아닙니다요.”

 

“생뚱맞기는. 거기 그 말이 왜 들어가.”

 

“나이 잡순 아저씨가 젊은 여인네한테 보고 싶다느니 그런 소리 하면 오해받기 딱이라고요.”

 

“오버하기는. 봐봐. 전혀 오해하는 표정 아니구만.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인데 무슨. 하여간 걱정을 사서 한다니까.”

 

“길을 막고 여자들한테 물어보세요. 오버하는 건지 배려하는 건지. 저처럼 섬세한 남자가 예쁨 받는다니까요.”

 

“너나 열심히 예쁨 받으세요.”

 

대화는 돌연 샛길로 빠져 연애강의로 넘어가더니 언어습관과 대인관계의 연관성에 대한 학술적 담론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두 단짝이 수다를 지필 때면 레코드판이 튀어 엉뚱한 음률로 급전되는 튐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 독 소장과 승주는 무뚝뚝한 관객을 앞에 두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급변하는 만담을 늘어놓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와 마주앉아 있는 권민에게 말을 건넸다.

 

“한국에 가서도 계속 연락했으면 좋겠네요. 같은 업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