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7화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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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는 엽서가 유골인 양 애지중지 조심스레 가방에 넣었다. 독 소장은 은인을 대하듯 권민을 응시했다.

 

“권민 탐정, 진짜 고맙고 감사하고 그러네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평생 잊지 못 할 거예요.”

 

“두 분이 결정적인 단서를 준 덕분에 해결이 빨랐습니다.”
 

유능한 탐정한테서 듣는 뜻밖의 칭찬이라 두 사람 낯빛에 희열이 수줍게 돋쳤다.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아유, 얼마든지요. 어서 말씀하세요.”

 

“제가 이번 사건을 해결했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시면 안 됩니다. 이수진 씨 가족에게도 제 신분은 노출시키지 마세요. 영국인 탐정이라고만 하십시오. 이름을 물어보면 영어이름 아무거나 지어내세요.”

 

“아니 왜요? 그런 훌륭한 능력은 여기저기 알려야죠. 입소문이 나야 일거리도 늘 테고.”

 

“사건에 따라 다릅니다. 특정 사건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고 있죠. 이번 사건은 경찰이 다른 범죄를 내사하다가 우연히 해결한 걸로 처리할 예정입니다.”

 

“아니, 왜,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여러 갱단이 엮인 사건이에요. 높이 나는 새는 노리는 사냥꾼이 많은 법이죠. 유명해져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그렇군요. 알았어요. 어차피 의뢰인 입장에서야 해결됐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가보겠습니다.”

 

“비용은 오늘 안에 붙여드릴게요.”

 

“정산내역에 의문점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아유, 그럴 리가요. 더 드려도 시원찮을 판에.”

 

권민이 일어서자 독 소장과 승주도 일어섰다. 승주가 그렁거리는 눈인사를 조아리며 숙연함이 집약된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권민도 눈인사를 건넨 후 몇 걸음 멀어졌다.

 

“권민 탐정!”

 

독 소장이 권민 쪽으로 얼른 다가갔다. 독 소장은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수진 양 부모님 대신이에요. 영원히 모르실 텐데 나라도 대신. 정말 고마워하실 거예요.”

 

독 소장이 손을 놔주자 권민은 다시 눈인사를 건네고는 펍 밖으로 사라졌다.

 

숙소에 돌아오고 나서도 독 소장과 승주는 각자 상심에 갇혀 있었다. 독 소장은 해리슨 박의 부인을 도와 집 청소도 하고 쓰레기 치우는 일까지 모조리 해 주었다. 안주인이 내놓은 과일접시를 비우자마자 2층으로 올라가 창문을 닦기 시작했다. 할 일이 없어 생각만 더 복잡해지니 노동이 절실했다.

 

독 소장은 삭신을 다독이며 승주가 골박혀 있는 방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시무룩한 등짝이 창밖 쪽으로 고정돼 있었다. 승주는 시선을 창밖에 멀거니 걸어둔 채 탐정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현실,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이 겪어야 할 허망한 순간들을 상상하며 한숨을 곱씹었다.

 

독 소장은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졸음이 몰려왔다. 해리슨 박이 어떻게 해결된 거냐고 2층 방까지 쫓아와 캐물었지만 경찰이 뒷걸음질로 쥐 잡았다며 두루뭉술하게 눙쳤다. 해리슨 박은 자세히 말해 보라며 계속 엉겨 붙었다. 다행히 독 소장에게는 난공불락의 방어책이 있었다.

 

낮에 몸을 혹사시켜 놓은 덕분에 호랑이가 와서 으르렁거려도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에 눕자마자 역시나 단박에 곯아떨어졌고 해리슨 박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승주를 졸라볼까 싶었지만 저녁도 거르고 일찌감치 누워버린 몸뚱이는 의식이 꺼진 지 오래 돼 보였다.

 

승주는 새벽에 잠이 깼다. 이미 너무 많이 잤다. 그에게 우울은 곧 잠의 신이었다. 승주의 생체리듬은 울적해질 때마다 자동적으로 수면 호르몬을 분비시키는 쪽으로 진화됐다. 툭 하면 우울로 곪아버리는 마음자리를 잠으로나마 해독시킬 수 있으니, 다정이 병인 승주에게 그런 신체적 특징은 행운이었다. 이번에도 우울함에 곯아떨어져 꼬박 침대에 붙박여 있다 보니 허리가 뻑적지근했다. 바깥 공기를 쐬고 싶었다.

 

점퍼를 챙겨 입고 계단을 내려왔다. 안주인이 예비용으로 줬던 열쇠로 문단속을 하고는 현관 앞뜰로 나왔다. 새벽녘 고요한 어둠 속에서 눈발이 흩날렸다. 승주는 조용하다 못해 정지돼버린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다리가 이끄는 대로 돌아다니다 공원으로 들어섰다.

 

하얀 어둠이 내리고 있는 탁 트인 황량함이 마음에 들었다. 승주의 가슴속에 핀 황량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하늘은 제 시린 민낯을 함박눈으로 적시며 바람소리를 흥얼댔다. 황량하지만 청량한 광경이었다. 거리를 배회하다 우연히 찾아든 선술집에서 노회한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가수의 달관한 음색이 귀에 감겨들어올 때 느끼는 위안이 이 풍경 속에도 묻어 있었다. 승주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겨울임에도 푸른 때깔을 뽐내고 있는 호랑가시나무가 무채색 풍경에 익살스레 끼어든 모습도 좋았다.

 

승주는 관목 군락 사이에 놓여 있는 나무벤치에 앉았다. 등 뒤 오른쪽 시야 어딘가에서 움직임이 번득 스쳤다. 호랑가시나무의 푸른 잎사귀가 빼곡히 뭉친 밑동 언저리였다. 새벽 어스름이 들이치지 못한 잎사귀 요새 속 암흑 한편에서 알사탕 크기의 불빛 두 개가 꿈틀거렸다. 승주가 가까이 다가가자, 알사탕 두 개는 얕은 신음을 낑낑대며 뒷걸음질을 쳤다. 개였다. 강아지와 성견의 중간쯤 되는 크기였다. 이파리를 헤쳐 공간을 열었다. 검은 털에 엉겨 붙은 땟물과 더께가 어스름 빛에 반사돼 희끗댔다. 그렁거리는 동그란 눈동자가 겁먹은 채 승주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이리 와.”

 

낯선 인간이지만 자기를 향한 미소가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렸는지 검정개는 낑낑대며 눈치를 살피면서도 눈얼음이 내려앉은 차가운 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걷는 모양새가 이상했다. 몇 걸음 더 지켜보니 왼쪽 뒷다리를 저는 게 분명했다. 뼈마디가 뒤틀린 상태고 말라붙은 핏자국도 보였다. 목에는 메달이 달린 목줄이 보였다. 검정개를 들어 올리자 홀쭉한 뱃가죽이 힘없이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메달에는 이름과 집주소가 적혀 있었다. 길을 잃었나? 검정개는 낯선 인간의 품에 안겨 겁먹은 몸뚱이를 바들바들 떨었다.

 

승주는 개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 여전히 곯아떨어져 코 골고 있는 독 소장을 지나 옆 침대에 조용히 가로누웠다. 동물병원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수건에 돌돌 감긴 꼬마 개는 고린내만 풍길 뿐 승주 품에 안겨 도둑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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