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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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일.

 

 

 

또 집이다. 같은 천장을 오늘도 본다. 바다에 다녀온 뒤로는 별다른 생각도 의욕도 없이 그냥 하루 하루 고기나 먹고 술이나 마시고 산다. 게을러 터진 내 적성에 아주 잘 맞다. 이렇게 좋을 거 내가 한 12살쯤에 이런 세상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그때는 남자도 여자도 애인도 모르니 외롭지도 않았으리라.

 

바다에서 기억이 흐릿하다. 분명히 한 밤중에 바다에 뛰어든 것 같은데 역시 다음날 아침은 익숙한 침대 익숙한 천장. 평소보다 일찍 기억이 끝난 것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다. 그렇게 같은 하루를 다시 산다. 며칠이나, 며칠이나.

 

대충 한 달은 지나간 것 같은데 정확히 며칠이나 여기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여기’라는 말이 어색하다. 나는 ‘여기’있는 것일까. ‘언제’ 있는 것이 아닐까. 날짜는 이미 의미가 없다. 출근을 안 하니 아무래도 어색하다. 만약 휴가를 내지 않았다면 이런 세상이 오지 않았을까. 출근을 한다면 날짜는 제대로 셀 수 있을까. 하지만 연구소를 생각하면 짜증부터 난다.

 

연구소에서 책임어르신이나 선임느님들이나 동기 개놈들이 실험 계획을 대강 짜면 그 실험을 프로그램으로 옮겨 데이터를 뽑아낸다. 아주 지루하고 짜증나고 뭐가 뭔지 잘 모를 일. 가끔은 직접 프로그램을 짜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손으로 쓴 글씨가 아니라 메일이나 메신저로 기획서를 주고받으니 알아먹을 수 있다. 공돌이들은 글씨를 정말 못 쓰니까. 천재는 악필이라고 하면서 저들끼리 낄낄거리는 꼴이 보기 싫다. 그리고 그 치들은 진짜 천재도 아니다. 내가 본 악필 중에 천재는 단 한 명도 없다. 천사는 하나 있지만.

 

 

 

인희는 책을 좋아했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은 부업이라 했다. 본직은 독서가였다. 언젠가는 꼭 자기 책을 내겠다고 했다. 원고지에 꼬불꼬불한 글씨로 쓴 습작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천성적으로 책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는 싫은 내색을 안 하려 애썼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런 연기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인희가 서운한 표정으로 바라보면 내 간이라도 뽑아 주고 싶었으니까. 물론 손에 쥐어 준 원고지를 볼 때마다 그 조악한 글씨에 놀라긴 했지만.

 

 

 

내 글씨는 어떻더라. 학사 때는 과제 채점하던 조교님이 글씨만 보면 손예진 같다고 한 적도 있는데. 석사 이후로는 펜을 쥐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밍기적 밍기적 일어나 펜을 찾는다. 방 한구석 책꽂이에서 노트를 하나 찾아 펜을 쥐고 책상에 앉는다. 이제는 옷 따위 골라 입을 생각조차 안 한다. 대충 커다란 박스티를 하나 꺼내 입는다. 꼬박꼬박 챙겨먹던 아침 빵도 잘 안 먹는다. 펜을 쥐고 인희를 생각한다. 인희를 쓰자. 인희를. 쓰자. 멍한 정신은 가출한지 벌써 오래 전이라 돌아올 생각이 없다.

 

 

 

인희는 예쁘다.

 

인희는 착하다.

 

인희는 웃는 얼굴이 귀엽다.

 

인희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인희는 추위를 많이 탄다.

 

인희는 손이 차다.

 

인희는 자주 아프다.

 

인희는 아동복처럼 귀여운 옷을 좋아한다.

 

인희는 매운 음식을 못 먹는다.

 

인희는 달달한 음식을 좋아한다.

 

인희는 무서운 영화를 못 본다.

 

인희는 발라드를 좋아한다.

 

인희는 인형을 좋아한다.

 

인희는 고기보다 야채를 좋아한다.

 

인희는 자전거를 못 탄다.

 

인희는 운전하는 내가 멋있다고 한다.

 

인희는 속도를 많이 내면 무서워한다.

 

인희는 잘 운다.

 

인희는 기억력이 좋다.

 

인희는 늘 나를 혼낸다.

 

인희는 싸울 때마다 처음 서운했던 일부터 다 따진다.

 

인희는 등짝을 찰지게 때린다.

 

인희는 기분이 좋으면 목소리에 콧소리가 섞인다.

 

인희는 기분이 좋을 때마다 사진을 찍는다.

 

인희는 사진을 찍어서

 

 

 

손 끝이 떨린다. 어째서 나는 이런 것마저 잊었을까. 내방 어딘가 인희 사진이 있다. 책꽂이를 살핀다. 책 무더기를 헤집는다. 사진첩은 어디 있더라. 매일 보는 내방인데 미로 같다. 서랍을 다 열어 뒤집는다. 전화를 켜고 사진을 찾는다. 없어 없어 여기도 없어. 컴퓨터를 켜고 파일을 검색한다. 돋보기가 아무리 빙글빙글 돌아도 사진은 나오지 않는다. 벽장에 CD들을 다 뽑아 던진다. 분명히 인희가 사준 선물들이 있을 텐데. 지금은 인희가 사준 옷들밖에 안 보인다. 인희가 사준 CD도 인희가 써준 편지도 인희가 만들어준 책갈피도 다 어디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다. 인희가 준 선물들이 다 없다면 이게 어찌된 노릇일까. 내가 다 버렸거나 아니면 한 곳에 모아 뒀거나. 어렴풋이 안개 속에 떠다니는 조각배처럼 생각이 흘러간다. 그때. 몇 달 전 술에 취해 집에 왔을 때. 옷장 맨 위 빨간 상자. 인희와 끝난 후 언젠가 버려야 할 것들이라며 모아둔 선물들.

 

빨간 상자를 조심스럽게 연다. 그곳에 내가 필사적으로 지키던 그것들이 모여있다. 무너지는 세상보다 소중했던 그 선물들이. 상자 반을 차지하는 CD들 중 하나에 팔짱을 낀 인희와 내가 활짝 웃고 있다. 활짝 웃는 두 여자에게 밀린 윤하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째려본다. 오디오에 CD를 밀어 넣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너에 대해 말을 해. 너무 완벽한……[1]

 

 

 

그날 하늘에는 벚꽃이 흩날렸다. 오랜만에 같이 도서관에 온 인희와 나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온 몸이 자라날 것처럼 햇살아래 늘어져 광합성을 시도했다. 눈을 감고 밝은 하늘을 더듬던 내 턱 밑에 딱딱한 플라스틱 덩어리가 밀고 들어왔다.

 

 

 

자 선물.

 

나는 이 사람 좋던데 너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다.

 

안 맞아도 잔말 말고 들어. 알았어?

 

잘 들어보고 소감 적어와.

 

검사할거야.

 

 

 

첫 곡 내용은 사실 나랑 인희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나는 그 가사를 참 좋아했다. 내가 인희를 보는 기분이 그 가사 같았다. 도서관 앞 공원 벤치에 앉아 인희는 책을 듣고 나는 음악을 읽었다. 그때 내 머리는 지금보다도 짧았다. 옷도 남자처럼 입었다. 인희는 그때도 천사 같았고 소녀 같았다.

 

 

 

트랙이 몇 개 지나가고야 눈을 뜬다. 인희가 처음 준 선물. 사진은 나중에 같이 고르고 골라 선택한 벚꽃놀이 기념사진. 인희와 내가 함께하고 처음 받은 선물. 아무래도 나는 미친 게 분명하다. 어떻게 버릴 생각을 했지. 역시 술은 백해무익인가. 인희를 처음 만난 날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 때는 검은 하늘이 세상을 덮은 그런 시절. 장독 안에 나를 가두고 조용히 화석이 되려 하던 그 시절. 다시 생각하자니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하다.

 

 

 

학사를 졸업하고 학교를 떠나려 했다. 현석과 있었던 일을 신고했던 선배가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바람에 온 학교에 소문이 났다. 자기 딴에는 무자비한 아주머니의 폭거에 뺨이 새빨갛게 부은 전자과 여신님을 구출하는 기사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겠지. 하지만 정작 기사작위를 받은 건 나였다. 검술 실력도 글 솜씨도 연기 실력도 아닌 유부남 꼬셔서 살림 차리는 재주. Lady Slut. 기가 막힌 별명이 붙었다.

 

동아리도 잘렸다. 기타를 들고 당당히 가입했던 전자과 밴드 동아리는 선배들이 나를 조용히 불러 나가달라고 했다. 개새끼들. 언제는 밴드 홍일점이네 여신이네 떠받들던 것들이.

 

아무리 그래도 전자과는 여학생이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과라 그런지 달려드는 남자들이 있긴 했다. 나는 그런 소문 신경 안 써. 괜찮아. 나 너 좋아해. 글쎄…… 그들은 나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유부남을 꼬신 솜씨를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날이 갈수록 술이 늘었다. 가난한 처지에 대학을 옮길 수도 없었다. 졸업은 해야 했다. 술이 늘었다. 술이 더 늘었다. 그때 인희가 나타났다.

 

인희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다른 대학교에서 선생님이 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날 걷던 길은 비록 술집 골목이었지만. 술에 취해 주저 앉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여기서 주무시면 안돼요.

 

저기요. 아저씨.

 

제 목소리 들려요?

 

 

 

선배애 저기 여기 좀 도와주세요.

 

웅얼웅얼 남자 목소리.

 

아니 이분이. 그러니까.

 

아니 선배 여기 좀 도와줘요.

 

웅얼웅얼 남자 목소리.

 

 

 

내 흐트러진 눈이 인희와 마주쳤다. 순간 세상이 멈췄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진리는 이렇게 생겼다.

 

 

 

인사불성인 나를 인희가 일으켜 세웠다.

 

 

 

야 진짜 너 그때 얼마나 무거웠는지 알아?

 

진짜 너 때문에 나 그날 죽는 줄 알았어.

 

그리고 머리랑 옷은 그게 뭐야.

 

동네 노숙자 아저씨도 아니고.

 

나 진짜 너 남잔 줄 알았잖아.

 

그때 나 도와준 선배도 너 남잔 줄 알고 덜컥 업었는데 뭔가 물컹하다고 해서 완전 놀랐잖아.

 

선머슴 같은 게 진짜 가슴만 커가지고는.

 

 

 

인희 말버릇은 ‘진짜’ 였다. 나는 수많은 ‘진짜’에 둘러싸인 채 인희 방에서 잠들었다. 인희 선배 방에서 재우려다가 평소에는 별 기능도 없이 공간만 차지하던 내 가슴 덕분에 결국 인희 방으로 옮겼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난 나는 인희가 끓여준 죽을 아무 말도 없이 먹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운동복을 대충 입고 머리도 하나로 묶고 있었지만 겉이 달라진다고 해서 천사가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인희도 참 대책 없었다. 길에서 술 취한 사람을 만났으면 경찰에 신고할 것이지 자기 집에서 재울 생각을 하다니. 착한지, 맹한지.

 

 

 

저기 그 죽은 입에 맞아요?

 

속은 괜찮아요?

 

이 근처 살아요?

 

그, 어제 요 앞 골목에 술 취해 앉아 계시길래 거기 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일단 재웠어요.

 

괜찮죠?

 

근데 저 학교가야 해서 그러는데 씻고 나갈까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빤히 바라보기만 했었다.

 

 

 

더 잘래요?

 

속 안 좋으면 더 자고 가셔도 되요.

 

문은 그냥 열어두시고요.

 

어차피 훔쳐갈 것도 없는데요 뭐.

 

 

 

고맙습니다……

 

 

 

아 말 할 줄 아시네.

 

말 못하시는 줄 알았네.

 

더 드세요.

 

저 좀 씻을게요.

 

 

 

인희가 다 씻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오도록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저…… 고마워서 그러는데 제가 언제 밥이라도 사도……

 

 

 

네? 에이 아니에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럴 수 없었다. 내 모든 신경다발은 온통 긴장한 채 그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인희의 작은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며 스며 나오는 말소리에 말초신경 하나하나가 모두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너무 고마워서요……

 

 

 

음 그럼 전화기 줘봐요.

 

여기로 전화주세요.

 

문자 잘 안보니까 전화가 빠를 거에요.

 

오늘은 강의 여섯 시나 되야 끝나니까 저녁에 연락주세요.

 

 

 

저기…… 이름 좀……

 

 

 

아, 전화 주시면 알려드릴게요.

 

그럼 저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