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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행여나 제대로 안 타면 어떡하지 걱정했었지만, 보기 좋게 하얀 가루들이 되어버렸다.

더이상 내 흔적이 세상에는 없을거다. 내가 가지고 있던 내 수많은 기록들마저도 태워버렸으니까.

사실 하나 둘 박스에 싸서 집을 나올때까지도 몰랐다.

내가 모아뒀던 나에 대한 기록들이 이렇게 없었나 싶어서.

어릴땐 그나마 일기장이라도 모아놨었다. 어머니 말을 믿고 이 하나하나가 전부 나에 대한 기록들이 될거란걸 철썩같이… 믿었으니까.

어짜피 그 어린 마음에 쓸때도 내용을 채우기 급급했고 숙제였기 때문에 했었지 큰 내용이 담긴건 없다.

굳이 아쉬워 할 이유조차도 이미 하얗게 변해 바람처럼 하늘로 날라가버렸으니까.

결국은 실패했단걸 알았다.

결국은 이렇게 흘러갈 일이었겠지.

내가 무슨 노력을 하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아무리 피똥싸는 노력을 하더라도 달라지는것 조차 없었다.

기대조차 하지 말았어야 하는걸까.

그래. 기대. 그게 왜 필요했을까 처음부터.

어짜피 이랬을거.

내 모든걸 걸었던 그 선택이 무너졌다는걸 알았을 그때, 내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24시 00분.

째깍째깍 시간은 흘러만 갔다.

아마 30분정도 울었던거 같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울었다.

간담회에서 돌아온 후 집 문을 쾅 닫았을때 스르르 무너졌었다.

숨이 막혔다. 울어도 울어도 가슴속 어딘가를 막고있는 그 덩어리가 빠져나올 생각조차 안했다.

울어도 울어도 막힌것이 뚫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힘은 힘대로 빠지고, 점점 바닥으로 몸이 미끄러졌다.

정신없이 울고나니, 2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니 주변이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어짜피 처음부터 그랬다. 어깨라도 살짝 만져줬다면 그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을건데 아무도 없었다.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누워 울던 자리만 먼지가 삭 닦여있었다.

깨끗하네 하고 머리속을 스쳤지만, 그렇게나마 흔적을 남겼으니 됐나 싶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목이 너무나 타오르는데 입으로 집어넣을 무언가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수도꼭지를 열어보니 물 두어방울만 떨어졌다.

쓴웃음만 나왔다. 스스로 챙기지도 못하는 병신인데 이런걸 챙겨놨을리가 없잖아.

주머니를 뒤져보니 간담회장에서 챙겨왔던 물병이 있었다.

혹시 몰라 물을 반정도 남겨왔는데, 이거면 남은 시간동안 충분할듯 했다.

남은 물을 전부 입으로 털어넣으니 몸속에 생기가 도는것 같았다.

어제는 속이 그렇게 쓰렸는데 이젠 쓰린 느낌이 싹 가셨다. 못느끼는건지 뭔지.

컴퓨터는 저번주에 중고로 팔아버리고 없으니 마음은 편했다.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라도 할까 싶었지만 나에게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

어짜피 모두들 자기들 일에만 바쁘고 자기들 일에만 신경쓰니까.

내가 아무리 아프다 힘들다고 말해봤자 의미 없었던거야.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고 씨알조차 먹히지 않는데 내가 내 이야기를 해서 뭐해.

결국은 똑같다. 나조차도.

혹시나 달라질까 싶어 조금이나마 기다려봤는데 돌아온건 절망뿐이었다.

결국은. 결국은 그랬다.

정해진 길은 하나뿐이고 빛을 볼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인데. 왜 난 기다렸던걸까.

그런 생각하며 준비해뒀던 박스를 꺼내왔다.

컴퓨터는 팔았고, 그나마 장롱에 있던 이불이든 뭐든도 갖다 버린지 오래다.

집에서 지내지를 않았는데 이딴게 필요했을까.

책장에 있던 노트 몇권과 책을 다 쓸어담아보니 라면 박스가 반정도 찼다.

헛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챙길게 없었나 싶어서.

처음 마음을 먹고 마음을 정리할땐 적어도 두어시간정도는 걸릴줄 알았다.

시계를 보니 23시. 얼마 지나지도 않았었다.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박스를 정리하고 테이프를 붙였건만 30분정도밖에 안지나 있었다.

그게 내 무게였다. 처음부터 그랬었다,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그게 내가 가지는 무게였고 의미가 그정도 되는거였을 뿐이다.

왜 고민하고 기다렸을까. 이렇게 포장을 싸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고 비참하기만 할거.

제대로 먹은게 없으니 박스를 드는거조차 힘들었다.

책상 서랍에 넣어뒀던 라이터를 가지고 집을 나섰다.

바람이 되게 쌀쌀했다. 그리 기온이 낮지는 않아도 바람만큼은 세차게 불고 있었다.

옆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총각 어디가 하며 날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냥 다 쓴 책 버리려구요. 라고 답을 하니까 아 그렇구만. 날 추우니까 옷이라도 잘 입고댕겨 라고 말을 하곤 아주머니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옷이라도 잘 입고 다녀야지.

지금 패딩 하나 대충 걸쳐입고 거지새끼마냥 돌아다니는거 보니 내가 봐도 웃음이 터져나온다.

이런 거렁뱅이가 있나 하면서.

어짜피 내피도 다 뜯어져서 깃털들이 술술 빠져나가고 있다. 거지새끼지.

어짜피 나한테 좋은 옷이 필요나 있을까. 나한테는 그럴 자격조차 없는데.

박스를 들고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가니 복도조차 싸늘했다.

그 어떤 누구도 없는 조용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혹시나 경비아저씨가 날 카메라로 봐줄까. 아니 안봐줬으면 좋겠다.

어짜피 날 도와주지 못할게 뻔하다. 아니 도와줘서 뭐해. 그냥 젊은이 힘내 라는 말 한마디만 하겠지.

그렇게 정처없이 박스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혹시나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까 싶었다. 박스를 들고 있는걸 보고는 잠깐 들어드릴까요 하며 말을 건넬까 싶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라는 말이라도 들었으면 했는데 그조차도 없었다.

너댓시간을 미친놈인거마냥 돌아다니기만 했는데, 그 어떤 누구도 날 봐주지 않았다.

지나가던 한 여자가 내 얼굴을 흘깃 흘겨보고 지나가더니, 날 지나가자마자 저 거지새끼는 뭐야 더러워 라는 말을 내뱉었다.

달라질건 없었다.

아무것도.

발을 멈추니 편의점 앞에 서있었다.

시계는 1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꼬깃꼬깃 구겨진 만원짜리 한장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게 생겼다.

밖에 박스를 잠시 놔두고 편의점으로 들어가니 알바가 보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카운터에 아무도 없다고 보는게 맞겠지.

난 소주 몇병을 집어들고는 편의점을 나섰다. 이젠 주머니에 동전 몇개만 남아있다.

짤랑 짤랑 대는 소리가 귀에 울려퍼진다. 텅 빈듯하다.

박스안에 넣어둔 소주병 부딪히는 짤랑 소리는 꽉 찬거처럼 들리는데.

나를 든채로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박스속에서 짤랑짤랑 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그런지 사람들 눈길이 나에게로 모였다.

다들 날 혐오하고 있다. 아무것도 할줄 아는게 없는 병신새끼.

너저분하게 돌아다니는 거지새끼. 그정도 눈빛으로 본다.

웃음이 실실 새어나온다. 무슨 상관이야. 그래 나 거지새끼에 병신새끼다.

어짜피 당신들이 다시는 내 얼굴 보지 못할거니까. 무슨 상관이야.

박스를 안은채로 자리에 앉으니 다시 눈길들이 사라졌다. 어짜피 신경 써주지도 않은거 나한테 왜 그러는거야.

눈을 살포시 감았다. 어짜피 내가 갈곳까지 가는데는 시간이 한참 걸릴거니까. 돌아돌아가는 마을버스, 내가 갈곳까지 갈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감았다 뜨면 모든게 바뀌어 있겠지.

눈을 다시 떠보니 시계가 1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버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 사람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기껏 보이는거라고 해봤자 소 두마리 묶여있는 헛간에 작은 집 뿐이다.

그곳이구나. 잠깐 출장 나왔을 때 봤던 그곳이구나.

난 아픈 무릎을 살짝 주무르고는 벨을 누르며 일어섰다.

또다시 딸그랑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스 안의 소주는 그대로 잘 있나보다.

버스 기사쪽을 바라보니 ‘여기서 내리는 사람이 있었네’ 하는 눈치인듯 싶다.

버스 안을 다시 둘러보니 할머니 한분과 나밖에 없었다. 기사님 말고는 두사람이 전부였다.

누군가가 있든 말든 지나쳐 가버렸을거고 무시하고 떠나버렸겠지 모두들.

정류장표시가 멀리서 보였다. 버스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갔고, 크게 한번 흔들리고는 정류소 앞에 나를 버리고 떠났다.

저 멀리 내가 갈곳이 보인다.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저 먼 아래쪽에서 치는 파도라 희미하게 들리지만 분명히 파도소리다.

또다시 터덜터덜, 길거리만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발걸음이 지금 이곳에 멈췄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끝없는 절벽, 저 먼곳 아래에서는 파도만 철썩철썩 하얀 거품을 만들고 있다.

수평선을 바라봤다. 끝없이 이어진 저 머나먼곳이 내가 걸어왔던 길처럼 보인다.

다리를 빼놓고 걸터앉아서는 소주 한병을 땄다. 초록색 병 속에 들어있는 알콜이 몸으로 곧 들어올것이라는 기대감 아닌 기대감에 몸이 떨렸다.

의미없는 나의 기록들이 내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어짜피 소주병들은 오자마자 다 꺼내뒀으니, 난 박스 안의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다 낡고 헤지고 말라붙은 어린시절 일기장이었다. 얇기도 얇아서 잘 타지 싶었다.

라이터를 꺼내보니 기름이 조금 남아있었다. 남은 이것마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내 몸을 챙길 이유가 있을까.

일기장에 불을 붙여보니 라이터 살짝 댔다고 미친듯이 타올랐다. 주변에 바람까지 솔솔 불어오니 산소 공급도 잘되는거 같고.

불이 반정도 올라온 일기장을 박스안으로 던져넣었다.

허연 연기가 살짝 올라오더니, 박스 안 불길이 점점 커져갔다.

타오르는 박스를 보며 조용히 소주를 까마셨다. 한병씩, 한병씩.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 남아있는 모든것이 뜨거운 불길에 타 흩어지는데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

어짜피 의미 없으니까. 하나 사라져도 다들 울어주지도 않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테니까.

박스에 남은 모든것들이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절벽 위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에 흩날려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하얗게 퍼지는 재가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어짜피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싶다. 아무리 열심히 뛰고 또 뛰어도 제자리였을걸.

결국 끝은 하나로 정해져있었을거다. 아니,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괴롭다고 말을 하고 괴롭다고 몸부림쳐도 그 어떤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아마 날 짐짝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왜 얘는 이렇게 징징대고 있나 했을것이고.

아예 입밖으로 이야기조차 꺼내지 말걸 싶다.

술 들어가는게 우습다. 어느새 한병을 다 까놓고 두번째 병을 까다니.

애초에 내 시작이 잘못됐던걸까. 내가 태어난 자체가 잘못됐던걸까.

그래. 잘못된거겠지. 잘못됐던게 분명하다.

그렇게 사랑을 해주다가 나를 떼어버리고 매도하고 내버렸었다.

생각을 아무리 해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게 뻔하다.

왜냐고 묻고 물어도, 그 사람들은 너를 사랑하니까 그랬다는 말로 일축했었다.

난 살고싶었을 뿐인데. 언제나 살고싶어서 눈만 꾹 감고 버티고 참았을뿐인데 결국 돌아온건 무시와 괄시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고등학생때 그렇게 문을 쾅 닫고 들어간 그때부터였을까. 그때부터 어긋났던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