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후식

  • 장르: 판타지
  • 분량: 18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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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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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덴스 공주의 일곱 번째 생일날, 왕실 연회장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대륙 곳곳에서 찾아온 온갖 명사들로 북적거렸다. 실로 어마어마한 장관이었다. 단검으로 저글링을 하는 자, 머리가 두 개인 사람, 사자 조련사, 불을 먹는 사람 등등. 어린 레페덴스 공주가 자꾸만 수행원의 손고 자유를 만끽하려 한다는 것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생일파티였다.

 

에롤 역시 국왕의 초청을 받고 레페덴스 공주의 생일파티에 참여한 사람 중 한명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히 화려한 다른 참여자들과는 다르게 에롤은 무척 평범한 남자였다. 적당히 깎은 수염과 포마드를 발라넘긴 머리.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흔한 외모였다. 게다가 왕궁의 분위기가 어색한 듯 자꾸만 불편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이름 있는 자리에 참여한 경험이 적어보였다. 하지만 기인들 사이 평범은 오히려 기이해 보인다는 것일까. 유달리 수수한 에롤의 외모는 레페덴스 공주의 관심을 끌었다.

 

“그대는?”

 

어린 외모와 어울리지 않은 고풍스러운 말투였다. 레페덴스 공주는 즐거운 날, 국왕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다분히 노력하고 있었다.

 

“에롤이라 합니다. 공주님.”

 

에롤은 어색한 궁중 예법으로 다리를 뒤로 길게 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퍽 조잡한 인사였지만 레페덴스 공주는 지적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에롤.”

 

공주의 단아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조금 돌려 말하긴 했지만, 공주는 지금 넌 뭐 하러 온 누구냐. 라고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던 유모의 피나는 예절교육 결과물이기도 했다.

 

“뭔가 보여줄 걸 준비했나요? 아니면 선물?”

 

이어진 레페덴스의 조잘거림은 유모가 알았다면 손바닥을 때려놓을 법한 보챔이었다. 에롤은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공주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답니다.”

 

“뭔데요? 보여줘요!”

 

어험. 어험. 공주의 곁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수행원이 어색한 헛기침을 내뱉었지만, 공주는 세상에서 유모나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수행원의 안타까운 헛기침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에롤을 조르기 시작했다. 공주의 귀여운 칭얼거림에 에롤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만일 그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면, 저 정도의 나이는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다른 선물은 이미 받으셨을 겁니다.”

 

“이미 받았다고요?”

 

“그렇습니다. 공주님.”

 

에롤의 곧은 손가락이 연회장 중앙에 놓인 다과류를 가리켰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음식들.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손님들을 유혹하는 달콤한 디저트의 산이었다.

 

“저기 있는 딸기 타르트가 보이시나요?”

 

“아.”

 

레페덴스 공주는 방금 전 볼이 미어져라 입에 넣고 먹은 딸기 타르트를 떠올리고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고소하고 향긋한 페이스트리에 쌓인 달콤한 카스타드 크림과, 그 위를 관능적으로 장식한 새빨간 딸기.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맛은 어린 레페덴스 공주의 입맛을 단숨에 사로잡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미성숙한 사고로는 그 맛있는 간식을 챙겨준 사람에까지 생각이 미칠 수 없었다.

 

“저걸 경이 만들었어요?”

 

대단히 놀라운 발견을 해낸 듯 공주가 소리쳤다.

 

“경이라 부르지 마세요. 공주님. 전 한낱 제빵사에 불과합니다.”

 

에롤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자몽을 갈아 만든 셔벗처럼, 어딘가 씁쓸한 미소였다.

 

“전 이틀 뒤, 이 자리를 장식할 케이크를 만들고 있답니다. 공주님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저 케이크 좋아해요!”

 

좋아하는 간식 이야기가 나오자 환하게 웃음을 짓고 소리치는 레페덴스 공주는 영락없는 꼬마였다. 그녀는 작년에 받은 케이크를 떠올렸다. 파란 별장식이 올라간 삼단케이크였다.

 

“그런데 경.”

 

“전 경이 아닙… 아니. 말씀하세요. 공주님.”

 

“경을 돕는 사람들은 다 어딨나요?”

 

“네?”

 

“그 사람들에게도 만나 공을 치, 치…”

 

“치하 말씀이십니까.”

 

“아, 네. 그거요. 고맙다고 말하는 거.”

 

에롤은 레페덴스 공주를 조금 존경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이는 어려도 마음씨는 고운 모양이었다. 레페덴스는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 했지만, 밧줄에 목이 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공손한 대답만으로 참아야했다.

 

“죄송하지만 공주님. 케이크는 저 혼자 만들 생각입니다.”

 

“네?”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렇지만 경이 만들 케이크는 엄청 큰 거 아니에요? 이만큼 큰 걸 만들 텐데. 아. 아닌가요?”

 

“맞습니다. 아마 이십 킬로그램도 넘는 케이크를 만들게 될 겁니다.”

 

그녀는 에롤이 만들 케이크가 얼마나 거대한지 상상할 수 없었으나, 모르긴 몰라도 파티장을 장식할 만큼 거대한 크기가 될 거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에롤의 표정을 살폈다.

 

“힘들면 말하세요. 에롤 경.”

 

“여부가 있겠습니까.”

 

에롤의 믿음직한 대답을 듣자, 레페덴스 공주는 어렴풋이 저 중년의 제빵사 역시 온갖 기인들이 득실거리는 공주의 생일 파티장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란 걸 느꼈다. 에롤의 기예는 놀라우면서 실용적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역시 파티장에 놀러 나오길 잘했다 스스로를 칭찬하며 궁중 인사를 올렸다. 그녀는 파티장을 돌며 몇 번이나 반복했던 치하사를 덧붙였다.

 

“그대의 놀라운 기예에 아낌없는 찬탄을 보냅니다. 위대한 장인이여. 어버이와 스승에게 그대에게 보내는 영광과 같은 축복이 함께하길 왕가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페하와 왕가에게 영원토록 신이 함께하시길. 감사합니다. 레페덴스 공주님.”

 

그녀가 먹은 간식이 얼마나 인상적이었을까? 레페덴스 공주는 수줍게 질문했다.

 

“에롤 경.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저한테도 타르트 만드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나요?”

 

에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 저 질문을 누군가에게 했던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얼마나 오래 지났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 예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저, 빵 만들면 유모한테 자꾸 혼나요. 빵을 잘 만드는 요령 같은 게 있나요?”

 

그러자 에롤은 몹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레페덴스 공주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지은 건 아니었다. 공주의 철없는 칭얼거림이 그가 오래전 겪었던 기묘한 사건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빵을 잘 만드는 요령이라. 어쩌면 저렇게 공주는 그와 똑같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까. 언젠가 아주 오랜 옛날, 에롤은 스승에게 그렇게 말했다. 사소한 건 집어치우고 핵심만 빨리 알려달라고. 그때 당시에는… 서둘러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중요한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에롤은 잘 떠오르지 않는 스승의 얼굴을 억지로 상상하며 작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때 스승은 어떻게 반응했더라.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에롤은 그 대답을 받아낼 수 없었다.

 

“요령은 있습니다.”

 

“정말요?”

 

공주는 환하게 반색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곧 에롤이 들려준 대답을 들은 레페덴스 공주는 그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몇 번이나 의심해보아야 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역지사지?”

 

“그렇습니다. 공주님.”

 

에롤의 눈은 이미 저 멀리, 과거 빵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과거의 스승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디저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디저트가 되 보아야 합니다.”

 

에롤. 거대한 케이크를 척척 만들어내는 위대한 제빵사가 말했다.

 

 

 

 

“넌 디저트다.”

 

거인 루푸아는 아까부터 자꾸만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그를 흘깃거리는 인간 남자에게 점잖게 설명했다. 그것은 인간 마을을 습격해 상당수의 전리품들과 함께 챙겨온, 일종의 쇼핑거리였다.

 

루푸아는 자신의 설명이 지극히 상식적이며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쾌하다 자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 불쌍한 인간 남자는 곧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고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담담히 받아드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인간 남자란 것들은 다 그랬으니까.

 

“디저트라고?”

 

한참을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디저트라니?”

 

“후식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후식이란 게 뭐냐고!”

 

“불쌍한 놈이군. 후식이 뭔지 모르다니.”

 

루푸아는 삼십 센티가 넘는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스스로 문명과 동떨어져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 더한 놈이 있었다니.

 

인간 남자는 차가운 철장을 손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움켜쥐었다.

 

“날… 잡아먹을 거냐?”

 

그러자 루푸아는 동굴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은 여러모로 돼지보다 나아. 잡아먹을 때까지 재미도 있고.”

 

인간 남자. 만일 스스로를 소개하란 요청을 받는다면 조금의 주저도 없이 자신을 에롤이라 소개할 남자는 루푸아의 말에 사색이 되었다. 거인은 버젓이 살인과 식인을 동시에 저지를 계획이란 걸 간접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마치 도살할 개를 가둬두는 용도로 만들어졌을법한 철장 안에서 에롤은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근처에는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불쌍한 인간 남자 한명을 제외하면 어떠한 구원의 여지도 없었다. 저 오 미터가 넘는 거인을 제외하고는.

 

“나, 날 잡아먹지 않는 게 좋을 걸?”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거리며 나왔다. 에롤은 산만한 덩치에 한 손에 꼬챙이를 들고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거인을 보며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빌어먹을. 정말이지 운이 없으려니 더럽게 없었다.

 

“허허허. 아니야. 아니야. 한 해가 끝나가니, 인간을 먹어줄 필요가 있다고.”

 

“뭐?”

 

“껍질을 벗겨 고기를 발라내면 맛이 더 좋아지지. 작년엔 그걸 몰라서 질긴 생고무 같은 가죽이 잔뜩 들어간 파이를 먹었지 뭐야.”

 

에롤의 얼굴이 이보다 더 질릴 수 없을 만큼 질려버렸다. 지금 그에게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발라낸단 말을 한 건가?

 

“게다가 설탕이 어울리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고. 봐. 인간은, 왜. 요정처럼 귀엽잖아?”

 

저도 모르는 사이 에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 거대한 식인 괴물은, 인간을 그저 오븐에서 갓 꺼낸 생강과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단순히 좀도둑질을 하러 로렌플로타 마을을 방문했다 졸지에 거인의 연말파티 디저트가 되게 생긴 에롤은 죽을상을 짓고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자, 잘 생각해보라고. 날 봐! 빌어먹을! 설탕에 잘 어울린다고? 내가 그러게 생겼어!”

 

“응?”

 

루푸아는 천천히 에롤을 위아래로 훑어 살폈다.

 

“아주 완벽한데? 작년 같았으면 통째로 반죽에 파묻었을 거야.”

 

거인은 자신이 내린 결론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난 비쩍 말라서 먹을 고기도 없어. 봐! 이 앙상한 갈비를! 젠장.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야? 넌 운도 지지리도 없는 거인이라고!”

 

“이상하군.”

 

에롤이 상의를 걷어 올리고 갈비뼈를 어루만지며 난리를 피워도 루푸아는 담담했다. 루푸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만족한다는데 왜 네가 난리를 피우지?”

 

“…….”

 

에롤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저 거인이 보기에 먹음직스럽다면, 그건 그냥 그런 것이다. 다른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에롤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다른 변명거리를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한참을 머리를 굴리던 에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난 도둑이야.”

 

만일 로렌플로타 민병대에게 걸렸더라면 죽어도 입 밖으로 내놓지 않을 진실을 털어놓았다. 비단 로렌플로타 뿐만 아니라, 왕국 내 어떠한 경우라도 절도 행위는 교수형으로 처벌할 수 있다. 하지만 저 탐욕스러운 거인은 식사거리에게 도덕적 결함이 있다면 식욕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별 의미 없는 발상에서 착안한 변명거리였다.

 

“그래서?”

 

“난 타락했어. 신부님들이 날 볼 때마다 지옥에서 썩어 문드러질 개자식이라 불렀단 말이야. 아, 그래. 사실 난 개고기 맛이 날지도 몰라. 내가 태어난 마을 영주님은 우리 엄마를 보고 항상 암캐 같은 년이라고 불렀단 말이야. 동물로 따지면 동네 똥개보다 못하지. 그것도 쓰레기를 잔뜩 주워 먹고 뱃속에 회충이 가득 찬 비루먹은 개 말이야. 그런데 날 먹을 수 있겠어?”

 

에롤의 자기비하는 거의 눈물겨울 수준이었다. 루푸아가 만약 귀가 얇고 비위가 약한 거인이었다면 에롤의 신랄한 평가에 입맛이 뚝 떨어져 연말 파티에 인간 고기파이를 빼버릴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푸아는 힘줄이 굵고 비위가 강한 거인이었다. 그러니까, 맛만 있다면 그게 뭐가 됐든 간에 주워 먹을 각오가 된 상태란 뜻이었다.

 

“하긴. 넌 좀 특이하게 생기긴 했지.”

 

“뭐야?”

 

루푸아의 뜻밖의 평가에 에롤은 거의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신호일지도 몰랐다. 거인의 입맛이 좀 떨어졌을지도 모르니까.

 

“지금까지 먹은 인간 중 너처럼 어린 애는 없었어. 어린 인간은 더 지저분한가보지?”

 

에롤은 무척 감회가 새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기 손으로 직접 금고를 따기 시작한 뒤로 ‘어리다’란 말을 얼마 만에 들어본 거지? 루푸아는 어린 인간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좀 생각해봐야겠어. 난 개고기를 싫어하거든.”

 

거인은 한동안 에롤의 철장 앞에 주저앉아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작은 언덕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거인의 장신에 에롤은 새삼스레 경외감을 느꼈다.

 

“네가 보통 인간 남자와 같은 맛이 난다면 별 상관없지만… 나도 잘 모르겠군. 개고기 맛이 날 수도 있으니, 요리에 넣을 순 없지.”

 

그러자 에롤은 마치 무죄판결을 받은 죄수처럼 기뻐했다. 얼굴은 밝게 펴지고 철장을 쥐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 그렇지! 하하하, 그래! 난 개고기 맛이 날 거라고! 맛이 없어!”

 

“그래. 그러니 넌 장식으로 써야겠어.”

 

“응?”

 

“아. 맞다. 넌 디저트가 뭔지 모른다고 했지? 디저트 위에 올라가는 맛없고 예쁜 것들이 있어. 널 거기 올렸다 딱 한입만 먹어봐야지. 머리만 떼서 올리는 게 좋겠군,”

 

에롤은 이번엔 진심으로 입을 쩍 벌렸다. 저 괴물의 식탐이란!

 

“인간을 둘 잡아온 보람이 있군.”

 

루푸아는 그렇게 씩 웃으며 거대한 몸을 이끌고 동굴 밖을 나섰다. 동굴 입구에 비석처럼 세워둔 거대한 바윗돌을 미닫이문처럼 밀어 닫으며 거인은 연말 파티의 후식거리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는 참 양심적이고 착한 거인이었다.

 

“그럼 잘 자라고. 내 이쁜이들.”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동굴 입구가 완전히 차단됐다. 그와 동시에, 동굴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에롤은 만약 그가 무사히 이곳을 탈출할 수만 있다면 잡아먹을 돼지나 닭에게 ‘오늘도 잘 지냈니, 친구들?’같은 얼빠진 소리를 하는 농부들의 엉덩이를 모조리 걷어 차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역시사지. 역지사지. 직접 당해보니 기분이 더럽기 짝이 없었다.

 

“빌어먹을.”

 

그는 어두운 철장 안에 주저앉아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로렌플로타 근처를 얼쩡거리는 게 아니었다. 저 멍청한 거인이 지껄인 대로 이제 곧 연말이 찾아온다. 유쾌한 음악이 흐르고 집집마다 빵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분위기는 갓 꺼낸 쿠키처럼 뜨뜻달콤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접시에 엎어둔 푸딩처럼 말랑말랑해진다. 바야흐로 도둑의 계절이라, 그 말이다.

 

여느 베테랑 도둑처럼 에롤 역시 헤이해진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한탕 제대로 챙기기 위해 비교적 잘 사는 마을인 로렌플로타를 찾았다. 역시 이름난 도시라 그런지, 온갖 사람들이 갖가지 희귀한 물건을 팔고 있었다. 에롤은 자기 운수가 드디어 트일 때가 왔다고 혼자 낄낄대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도둑이 찾기 좋아하는, 비교적 외지고 조용한. 그리고 부유해 보이는 장소를 말이다.

 

그것이 에롤의 지독한 불행의 시작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물색한 장소는 에롤보다 세 배는 커다란 유사 동업자의 이목을 끌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비교적 외지고 조용하며 부유한.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작업도구를 지참한 뒤 으슥한 장소를 얼쩡거리고 있던 에롤은 인간 마을 ‘서리’에 나선 거인 루푸아를 만나 마대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하.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막 정신을 차린 에롤은 그곳이 유치장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곧장 침착하게 탈옥을 시도했다. 어떤 모자란 친구가 자물쇠를 떡 하니 풀기 쉬운 곳에 달아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자란 친구가 몸무게가 아홉 배도 넘게 나가는 덩치란 건 생각하지 못한 에롤은 곧 자물쇠는 풀었지만 자물쇠를 벗겨내지 못해 탈옥에 실패했다. 거인이 걸어둔 자물쇠는 그냥 쇳덩이 뭉치로 무게가 120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물건이었다.

 

주위는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에롤은 거인이 ‘인간 둘’을 운운한 걸 떠올렸다. 만일 이곳이 인간으로 치면 축사와 유사한 곳이라면 에롤 외에 인간도 이곳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곧 에롤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만일 여기 에롤 외 누군가 있다면 거인과 촌극을 벌이고 있었을 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심보는 또 뭐란 말일까? 에롤은 반신반의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허공에 말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그다지 기대하진 않았지만 놀랍게도 어둠 속 누군가가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쿵.

 

단단한 무언가를 발로 걷어차는 소리였다. 에롤은 기쁨에 차 다시 물었다.

 

“저, 괜찮으십니까! 살아 계신 거죠!”

 

-쿵.

 

다시 울림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있다. 그의 말을 듣고 대답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하지만 여전히 조금 의아스런 부분이 있었다. 거인이 입을 막아버리기라도 한 걸까. 어둠 속 누군가는 에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거인이 입을 묶었습니까?”

 

-쿵. 쿵.

 

에롤은 잠시 고민했다. 두 번의 신호는 아니란 의미일까?

 

“선생님께서도 저랑 같이 납치됐습니까?”

 

-쿵.

 

이번엔 아마. 긍정의 의미일 것이다.

 

“그럼 거인이 한 말은 전부 들으셨죠?”

 

-쿵.

 

그렇다. 저 사람은 모종의 이유로 입을 열 수 없는 상태다. 그 사실을 확신한 에롤은 무척 난감했다. 저 괴물의 손아귀에 놓인 같은 처지의 인간을 발견했지만 서로 의견조차 나눌 수 없다니. 설마 저 멍청한 거인이 그걸 다 계산하고 같은 공간에 두 인간을 가둔 걸까? 에롤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조금 나아진 건 틀림없었다. 하나보단 둘이 더 나으니까.

 

“선생님.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전 도둑입니다. 이런 말 하면 믿지 않을 걸 뻔히 알지만, 전 로렌플로타 근처는 처음입니다. 진짭니다. 선생님 집을 건드렸을 경우는 절대 없다고요. 그러니까. 제기랄. 도둑이 이런 말을 해도 웃기지만, 절 좀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롤은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롤의 표정이 점차 우울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어둠 속에서 울림소리가 들려왔다.

 

-쿵.

 

아마. 긍정이었다,

 

“후.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왜 말씀을 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거인이 저 바위를 치워주면 그때 슬쩍 선생님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제가 기억나는 것부터 들려드리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 선생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에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어떻게 저 거인과 마주쳤는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 무수한 추측과 주관적 판단이 엇갈렸지만 에롤은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서 점차 자신이 처한 상황이 명료해지는 걸 느꼈다. 아무리 침착하게 정리해도 절망적이긴 마찬가지였긴 하지만 말이다.

 

에롤은 자신이 닭장에 갇힌 닭처럼 하루하루 먹이로 삶을 연명하다 때가 되면 도살당해 고기파이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현재 그가 처한 상황이 그러했고, 어떤 긍정적 사고를 동원해보아도 그 추론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건은 의외의 상황에 벌어졌다. 에롤이 거인에게 납치당한지 3일이 지난 어느 오후, 동굴 벽을 가로막던 바윗돌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간만에 보는 빛이라 에롤은 고통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볼 수 있었다. 이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말도 나눌 수 없는 자에게 혼잣말을 떠드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오랜 어둠과 침묵에 지친 에롤에게 거인 루푸아는 감미로운 자극으로 다가왔다.

 

“잘 지냈나?”

 

“굶겨 죽일 작정인지 의심되던 참이었어.”

 

에롤은 텅 빈 물자루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루푸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에 든 그릇을 소리가 나게 탁 내려놓았다.

 

루푸아가 들고 온 그릇은 두 개였다. 하나는 물이 가득은 그릇으로 작은 욕탕기를 뜯어온 건 아닌가 싶은 크기였다. 에롤은 루푸아의 다른 그릇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그릇 안에는 연한 크림색의 액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적당히 점성이 있어보였고 방금 전까지 휘저었는지 작은 기포가 군데군데 솟아있었다.

 

루푸아는 능숙한 솜씨로 철장의 자물쇠를 벗겨내더니 안에 든 자루를 끄집어내 작은 국자로 물자루를 채우기 시작했다. 에롤의 자루를 가득 채운 루푸아는 곧 에롤이 지난 3일간 혼잣말을 지껄였던 바로 그 사람. 루푸아의 디저트거리에게 손을 뻗었다.

 

무척 신기한 일이었다. 3일 만에 보는 그 사람은 에롤이 상상하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루푸아가 간식거리로 잡아먹겠다 말해서, 살이 통통하게 오른 먹음직스런 인간일줄 알았는데, 그는 60살도 넘어 보이는 비쩍 마른 남자였다. 인간 노인이라 부르는 편이 옳으리라. 노인은 잿빛으로 흐려진 수염을 아무렇게나 길어 늘어트린 채 늙은 버드나무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철장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에롤은 의외의 관경에 그만 멍하니 노인의 모습을 관찰했다. 루푸아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노인을 잡아먹겠다 말한 걸까. 곧 에롤은 의심스런 눈으로 루푸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뭔가 변명거리를 늘어놓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곧이어 실제로 루푸아의 검은 구멍처럼 벌어진 입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에롤은 깜짝 놀랐다. 노인에 대한 변명거린 아니었지만.

 

“너. 장식품. 빵 만들어본 적 있나?”

 

“빵?”

 

이미 장식품으로 낙인찍힌 에롤은 루푸아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롤이 빵에 대해 아는 점이라고는 큰 도시의 빵집일수록 터무니없는 가격에 빵을 판다는 것뿐이었다. 만일 에롤이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도련님이었다면 집에서 구운 간식거리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6살 때 어머니와 헤어지고 15살에 고아원을 뛰쳐나온, 주방과 요리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거리의 남자였다.

 

“뭘 만들 건데?”

 

“빵틀.”

 

루푸아는 그릇에 담긴 크림색 액체를 보여주며 말했다. 에롤은 곧 어떤 의문을 느꼈다. 그가 아무리 요리와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았다지만, 저 거인이 만들려는 빵틀(아마 파이 크러스트를 말하는)은 에롤이 알기로 딱딱한 그릇 같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루푸아의 반죽(으로 추정되는 것)은 반죽이 아니라 스튜에 가까운, 무척 물기 가득한 상태였다.

 

에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걸 먼저 지적했다.

 

“반죽을 망쳤잖아?”

 

“그래?”

 

“그래. 파이 반죽은 그것보다 훨씬 차지다고. 아니, 네 반죽은 그냥 밀가루에 물을 탄 것뿐이잖아? 쉐이크 음료냐?”

 

에롤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거인은 무척 놀랍다는 듯 에롤을 바라보았다.

 

“장식품. 빵 만들 줄 아나?”

 

“그야… 기초적인 건.”

 

사실, 요리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에롤이었지만 이 답답한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부분이라도 루푸아와 접점을 만들어놓는 편이 유리했다. 에롤은 최대한 태연해보이도록.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요리는 완전 초짜인가보지?”

 

“인간 남자들은 전부 요리라고는 조금도 모르더군.”

 

“그럼 여자를 납치하지 그랬어?”

 

“그건 안 돼.”

 

루푸아는 거대한 손으로 돌풍이 일어나도록 손을 휘저었다. 귀찮은 벌레라도 쫓는 모습이었다.

 

“인간 남자는 절대 인간 여성을 내놓지 않으려 하거든.”

 

“하. 그러셔?”

 

하지만 우연히 루푸아가 인간 여자를 납치했다 하더라도 제빵 비결을 배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빵은 기술자의 기술의 영역이지 단순 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롤의 참견이 마음에 들었는지, 거인은 철장문을 열고 그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철퇴 같은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에롤은 침착하게 루푸아의 반죽그릇 앞으로 가 섰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지?”

 

“음… 어… 그러니까…”

 

에롤은 일단 뒷짐을 지고 가슴을 내민 채 팔자걸음으로 그릇 주변을 맴돌았다. 목욕통 같은 그릇 가득히 담긴 질척한 반죽으로 보고 있자니, 어떤 사치스런 귀족의 이색적 파티에 초대받은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에롤이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반죽에 대해 쥐뿔도 몰랐다.

 

“그래. 일단 물이 너무 많아.”

 

너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괜히 의심을 살까 에롤은 일단 떠오르는 대로 지껄여보기로 마음먹었다.

 

“물은 어느 정도면 적당하지?”

 

꼭 조리학원에 처음 등록한 순진한 수강생처럼 루푸아가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에롤이 대답해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더 적게.”

 

“그럼 이 반죽은 어떻게?”

 

“그건…”

 

에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뭐라도 해보고 싶어 철장에서 빠져나온 것까진 좋은데 이 앞은 전부 임기응변의 영역이었다. 에롤이 시원스레, 제빵에 대한 지식을 풀어놓지 못하자 루푸아의 문짝만한 얼굴에 조금씩 의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알려주기 싫은 거야? 아니면 알려줄 수 없는 거야?”

 

“아니, 아니. 지금 알려줄게. 그러니까…”

 

에롤의 이마를 타고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당장 들려줘야할 조언은 뭘까. 그는 될 수 있는한 머리를 쥐어짜내며 좋은 생각을 떠올리려 애썼다. 빌어먹게 멍청한 머리는 가장 필요한 순간 가장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차라리, 이럴 때 그를 도와줄 머리가 하나 더 있었더라면. 에롤이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바로 그의 눈앞에 철장에 갇힌 채 두 눈을 부릅뜬 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노인은 생기로 넘치는 눈동자로 에롤 앞에 놓인 반죽 그릇을 쏘아보고 있었다. 노인의 떨리는 눈동자가 조금 방황하더니, 곧 에롤의 간절한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마 에롤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 무슨 뾰족한 아이디어 없습니까? 에롤은 노인의 눈을 바라보며 언 호수바닥을 디디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선 밀가루를 더 부어서…”

 

-쾅, 쾅!

 

놀라운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들린 소음에 에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소음의 근원을 찾아낸 에롤은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방금 에롤의 눈빛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까진 모르지만, 노인은 에롤의 간절함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싶었다. 노인은 지금 에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에롤은 갑작스럽게 소리를 낸 노인을 놀랜 눈으로 바라보았다. 노인은 마치 타오르는 듯한 안광으로 에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비록 말은 할 수 없지만 노인의 얼굴은 굳건한 결의로 가득했다.

 

노인의 신호는… 에롤이 짐작한 바로는 ‘아니오’를 의미했다.

 

“왜 그래. 말을 하다 말고.”

 

여전히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루푸아가 물었다. 다행이도 거인의 귀로 듣기에 노인의 쿵쾅거리는 다소 거친 신호는 그다지 거슬리는 소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에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응?”

 

에롤의 가슴 속으로 차가운 밀물과 같은 침착함이 가득 들어찼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철장 안 벙어리 노인으로부터 출발한 정신적 조류였다. 저 노인이 에롤에게 뭔가를 설명해주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를테면 빵 만드는 법 따윈 모르는 에롤이 쩔쩔매는 모습에 도움을 주고자 거인 몰래 팁을 주고자 한다면? 에롤의 머릿속으로 거대한 칠판을 상상했다. 칠판 위로는 질척이는 반죽을 처리할 수 있는 경우의 수들이 순서대로 적히기 시작했다. 에롤은 보이지 않는 분필을 들고 긴 작대를 죽죽 그으며 문장 하나를 지워버렸다. # 밀가루를 더 붓는 건 어떨까.

 

“일단 차가운 데 두고 방치하는 건…”

 

-쾅, 쾅!

 

“좀 아닌 것 같고…”

 

에롤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반죽그릇 주변을 다시 빙빙 돌기 시작했다. 루푸아는 작은 인간이 하는 짓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제빵을 할 줄 아는 인간은 생전 처음 보는 루푸아였다.

 

“저걸 그대로 사용하는 건…”

 

-쾅, 쾅!

 

“불가능하지!”

 

노인은 발을 굴렀다.

 

“그럼 절반씩 나눠서 살려보는 건…”

 

-쾅, 쾅!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에롤은 고개를 끄덕였고.

 

“저걸 다 갔다 버리면…”

 

-쾅!

 

“좋겠군!”

 

에롤은 걸음을 멈추고 씨익 웃으며 루푸아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가득 찬 표정이었다. 루푸아는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작은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었으므로.

 

“지, 진짜로? 저걸?”

 

“보아하니 대충 밀가루에 물만 부어놓고 개어놓은 것 같은데, 저런 엉성한 물건은 그냥 버리는 편이 나아. 뭐. 제빵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

 

에롤은 있는 힘껏 거드름을 피우며 공격적으로 소리 질렀다.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전문가처럼 보이면 나쁠 건 없었다.

 

“으, 으응.”

 

루푸아는 에롤의 넘치는 자신감에 조금 주눅이 들어 어느새 그의 말에 동의하고 말았다. 마을에서 서리해온 밀가루를 반포대나 넣었는데 이걸 버리다니. 아깝기도 많이 아까웠지만,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면 감내할만 했다. 결국 루푸아는 욕조만큼 거대한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롤은 미적미적 부엌으로 걸어가는 루푸아의 등 뒤로 크게 외쳤다.

 

“가서 밀가루 가져와! 물이랑 소금도!”

 

그러자 루푸아는 걸음을 멈추고 슬쩍 에롤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지? 진짜 빵틀 만들 수 있지?”

 

“그건…”

 

-쾅!

 

“당연하지.”

 

거만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 거인을 올려다보는 에롤은 기술을 가진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실은 난 빵 반죽을 좀 만져본 적이 있는…”

 

-쾅, 쾅!

 

에롤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건 아니지만, 사실. 거의 모른다고 봐도 되지만…”

 

-쾅, 쾅!

 

다시 에롤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 노인이 뭘 말하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에롤은 보았다. 노인의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열정적인 눈동자를. 터무니없는 상상에 사로잡힌 에롤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과감하게 태도를 고쳐 말했다.

 

“이라고 평소에 말하고 다니지만. 실제로 빵을 구워본 경험이 있는…”

 

-쾅!

 

“꽤 실력 있는…”

 

-쾅!

 

“제빵사다.”

 

-쾅!

 

에롤은 존경어린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묵묵히 에롤에게 옅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흠.”

 

겉보기에는 썩 그럴듯해보였다.

 

“킁킁.”

 

냄새 역시 훌륭했다. 막 오븐에서 꺼내 은은한 우유향과 버터향이 맴도는 페이스트리는 루푸아가 이전까지 알던 빵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먹음직스러운 연갈색으로 잘 구워진 페이스트리 위로 메이플 시럽을 펴 바른 노인과 에롤은 연이은 노동으로 지친 숨을 몰아쉬며 그들의 자랑스러운 결과물을 바라보았다.

 

누가 만들 시도라도 해봤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페이스트리 간식. 에롤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루푸아를 불렀다.

 

“먹어봐.”

 

거인은 그의 앞에 놓인 거대 페이스트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그가 알기로 빵이란 건, 쓰고 텁텁한 맛이 나는 겉껍질 속에 효모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부드러운 흰 부분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물론 루푸아가 먹은 빵도 질 나쁜 것은 아니었다. 무려 거인에게 바치는 공물로 만든 빵이었으니 고급스런 흰 빵으로 만들어 바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공물을 바친 사람들은 루푸아가 오동통한 사람 대신 흰 빵에 먹음직스럽게 썰어 올린 붉은 햄에 맛을 들이길 바랄 뿐이었다.

 

루푸아의 문짝 같은 입이 쩍 열리며 얇고 바삭바삭한 빵이 입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버석 버석. 거인의 입가로 부스러진 빵조각이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썩 시원찮은 식사매너였지만 에롤과 노인은 괘념치 않았다. 두 작은 인간이 약속이라도 한 듯 보고 있는 곳은 바로 거인의 입술이었다. 혹시라도, 빵을 다 먹고 입가심으로 사람의 팔다리를 뎅겅 잘라 먹진 않을까.

 

작은 식탁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페이스트리였지만 거인은 그걸 마치 미니파이처럼 순식간에 먹어 치워버렸다. 마지막 조각을 입에 털어 넣은 루푸아는 손가락에 묻은 시럽을 핥으며 이 신기한 빵을 만든 두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었지만, 실은 그들은 몹시 떨고 있었다.

 

루푸아가 쩝쩝 거리는 소리만 동굴을 가득 채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루푸아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맛있네.”

 

허. 맥이 탁 풀린 에롤은 하마터면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릴 뻔했다. 적어도 거인은 빵을 먹고 화를 내진 않았다. 루푸아는 에롤과 노인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며 다심 말했다.

 

“아주 맛있어. 아니, 특이하군.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지?”

 

순간 노인과 눈이 마주친 에롤은 노인의 앙상한 몸을 껴안고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노인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에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성공이었다.

 

얼마 전. 루푸아의 제빵 작업을 돕기 위해 철장 밖으로 나온 에롤은 루푸아에게 작업을 도울 일손이 필요하니 노인을 풀어 달라 요청했다. 루푸아는 에롤의 제안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철장을 빠져나온 에롤은 루푸아의 초보적이다 못해 원시적인 제빵 기술을 비난하며 대체 무슨 배짱으로 혼자 연말 음식을 준비할 생각을 했냐고 따져 물었다.

 

“그리고 디저트는 그런 게 아니야.”

 

“응?”

 

“넌 설탕만 뿌리면 다 디저트가 되는 줄 아나?”

 

“그런 거 아니었나?”

 

“어휴. 달달한 맛은 설탕 한가지로 내는 게 아니야.”

 

어딘가 에롤의 태도가 못마땅해진 루푸아는 그럼 넌 디저트에 대해 잘 아느냐 물었다. 물론 에롤은 디저트를 몰랐다. 다만, 그걸 알려줄 노인을 알 뿐이었다. 노인은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고, 에롤은 시간과 재료를 주면 그럴듯한 디저트를 준비해주겠다고 말했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며 부엌을 통째로 빌려준 루푸아는 곧 두 인간이 부엌을 휘저으며 벌이는 난장판을 넋을 잃고 구경했다.

 

“거기! 밀가루! 설탕! 소금! 버터는 자루 째로 가져와!”

 

팔짱을 끼고 주방을 돌아다니며 신들린 듯 소리를 지르는 에롤의 모습은 카리스마 넘치는 일류 쉐프 그 자체였다. 그리고 완벽한 요리사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명령을 내리는 척을 하던 에롤에겐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에롤 : (노른자를 깨트리는 노인에게) 노른자 좀 깨트려봐!

 

에롤 : (오븐을 달구는 노인에게) 오븐 좀 달궈!

 

 

대충 이런 식이었다. 에롤은 노인을 관찰하고 그의 행동을 일일이 지적하는 일과 더불어 밀가루 포대 주둥이 묶기, 설탕 자루를 그릇 가까이 끌고 가기, 거인에게 밀대를 쥐어주며 반죽을 밀게 시키기 등의 작업을 벌이며 고군분투 했다.

 

다행이 에롤은 거리에서 갈고닦은 손재주가 뛰어난 편이었다. 노인은 에롤에게 얇게 편 버터를 올린 반죽을 일정 간격으로 자르라고 시켰을 때, 별다른 감각적으로 해결해낼 수 있었다. 꼬박 하루를 통째로 쏟아 부은 결과, 두 인간은 루푸아가 한손에 쥐고 먹을 수 있을만한 크기의 간식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루푸아는 결과물에 만족했다.

 

“맛있어. 아주 맛있어. 어떻게 빵껍질투성이 빵이 이런 맛이 나는 거지? 바삭바삭하고. 아, 시럽을 뿌려서 그런가?”

 

집채만한 거인이 두 눈을 빛내며 물어오자 에롤은 혹시나 거인이 그에게 시럽을 뿌린 후 입으로 가져가지 않을까 기겁하며 서둘러 말했다.

 

“아니, 아니. 좀 천천히 물어봐. 네가 먹은 건 진짜 파이다.”

 

“진짜 파이?”

 

“그래! 이게 진짜 파이지. 왕도 사람들은 다 이런 걸 후식으로 먹는다고.”

 

거짓말이었고 오답이었다. 넓게 따지면 페이스트리 역시 파이의 영역에 속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노인이 구워낸 페이스트리는 데니스 페이스트리. 즉, 크루아상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변변찮은 재료와 모자란 제자의 도움을 빌려 만든 것 치고는 완성도가 상당했으니, 노인이 얼마나 제빵에 능숙한 사람인지 이해할 법 했다. 특히나 얇은 반죽을 겹쳐 만드는 페이스트리 종류는 모양을 세우는 일이 무척 어려웠다. 그런 사실을 아무것도 모르는 에롤은 그저 데니스 페이스트리가 예쁜 파이처럼 보이니 파이라고 말해본 것뿐이었다.

 

“그럼 이걸 열 개쯤 만들어 먹으면…”

 

루푸아는 상상만으로 침이 고이는지 헤벌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신기하긴 신기한 모양이다. 눈치 빠른 에롤이 그 사실을 놓칠 리 없었다. 에롤은 잽싸게 루푸아의 상상에 끼어들어 말했다.

 

“아니지. 이봐. 거인.”

 

“루푸아다.”

 

“응?”

 

“루푸아라고 불러.”

 

“아. 그래. 루푸아. 거인씨 이름이 루푸아였군, 그래. 루푸아! 설마 지금 먹은 파이가 맛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뭐?”

 

“아무리 조악한 주방에서 만들었다지만, 세상에. 이건 너무 끔찍하군.”

 

에롤은 루푸아가 먹으며 흘린 빵조각을 주워들며 다 들리라고 소리쳤다.

 

“내가 봐도 다 부끄러울 정도야. 형편없어! 이런 걸 먹거리라고 만들다니, 차라리 좁쌀이나 쪼아 먹는 비둘기를 잡아먹는 게 더 맛있겠어! 이걸 봐. 이 파이는 너무 흐물거려서 누가 보면 아직도 반죽인줄 알겠다고!”

 

“이봐. 인간…”

 

“에롤이다.”

 

“에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진 말고…”

 

“아니, 넌 진짜 파이를 처음 먹어보니 이게 맛있다고 착각할 수 있겠지.”

 

“착각이라고?”

 

루푸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바삭바삭하고 고소하고 달콤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간식이 형편없는 음식이라고?

 

“아… 시간만 좀 더 있었더라면 제대로 된 파이를 구워줬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