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산다 (제2회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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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믹스가 다 떨어졌나 보다. 보이는 건 티백 녹차와 인스턴트 원두커피뿐이다. 범철은 찻장을 열어 보았다. 곧바로 누런 텀블러가 굴러 떨어졌다. 텀블러가 바닥에서 튀어 요란한 소리가 나자 휴게실 밖에서 누가 소리친다.

“다 부숴라, 부숴!”

옆으로 쓰러져 구르는 텀블러를 주워 다시 찻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 먼지 낀 텀블러 따위가 쌓여 있을 뿐 찻장 안에 커피믹스는 없었다. 그럼 뭘 마시지? 범철은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냈다. 2, 3, 5, 소수면 녹차를 마신다. 1, 4, 6, 소수가 아니면 원두커피다. 그가 탁자 유리 위로 굴린 주사위가 달그락거리다가 이내 멈췄다. 주사위의 눈은 1, 원두커피로 결정됐다.

휴게실의 온수기 성능은 지나치게 좋았다. 범철은 뜨거운 물이 적당히 식기를 기다렸다. 아까 소리쳤던 김 실장이 휴게실에 들어오더니 “뭐하냐? 물 떠놓고 치성드려?” 쓸데없는 말을 꺼내 놓고 나갔다. 그제야 조심스레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온도는 괜찮았지만 너무 썼다. 차라리 물 한 모금 마시고 말걸 하고 범철은 조금 전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러자 후회가 모든 걸 되감았다.

커피믹스가 다 떨어졌나 보다. 티백 녹차와 인스턴트 원두커피가 쌓여 있지만 커피믹스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누가 흘린 거라도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 범철은 허리를 숙여 찻장의 여닫이문을 당겼다. 안에서 황색 텀블러가 굴러 떨어지더니 바닥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튀었다. 김 실장이 바깥에서 놀리듯 소리쳤다.

“다 부숴라, 부숴.”

텀블러는 거꾸로 서 있었다. 바닥에서 튀어 올라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아까와―그것을 아까라고 할 수 있다면―달랐지만 범철이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그는 텀블러를 주워 찻장에 넣었다. 찻장에도 커피믹스가 없으니 다른 거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뭘 마시나. 그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한 쌍의 주사위 중 하나를 꺼냈다. 주사위를 굴려 소수인 눈이 나오면 녹차, 소수가 아닌 눈이 나오면 원두커피를 마시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사위가 구르고, 눈은 6이 나왔다.

범철은 종이컵에 인스턴트 원두커피를 뜯어 담고 뜨거운 물을 따랐다. 그러고는 물이 적당히 식기를 기다리며 김 실장이 휴게실에 들어와 뭐라고 이죽거리고 나갈 때까지 쭉 아버지 생각을 했다.

대체 어디서 죽은 거지? 죽었다는 건 알았다. 그와 아버지 사이에는 어떤 연결 같은 것이 있었다. 그날 밤, 아마도 아버지가 죽었던 그 순간에 범철도 연결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죽은 아버지한테서는 당연히 연락이 올 수 없고 어디서 돌아가셨느냐 붙잡고 물어볼 곳도 없다. 요새도 아버지랑 연락 잘 안 하고 사느냐는 친척의 전화를 받은 게 전부였다.

달달한 커피믹스에 길들여진 입에 원두커피는 몹시 썼다. 범철은 인상을 쓰며 쩝쩝거렸다. 차라리 녹차를 마실 걸 그랬나? 후회가 됐다.

그의 후회가 세상을 되감았다.

커피믹스가 없다. 달달한 게 필요한데. 범철은 인스턴트 원두커피와 티백 녹차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혹시나 해서 쪼그리고 앉아 찻장 문을 당겼지만 웬 금색 텀블러가 굴러 떨어졌을 뿐이다. 거기에도 커피믹스는 없었다.

“다 부숴라, 부숴!”

소파 아래로 굴러가려는 텀블러를 발로 밟아 세웠다. 누구 것일까. 먼지가 낀 게 안 쓴 지 오래됐나 보다. 하기야 자꾸 일회용 종이컵을 가져다 두니 텀블러를 안 쓰게 되는 것 아니겠나. 일회용품을 줄이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쓰지 말자고 종이컵을 들이지도 않은 기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외부에서 높으신 분이 방문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려니 종이컵이 필요해서 막내가 사방팔방 다른 부서에까지 빌리러 뛰어다녔고, 그 후로 종이컵은 은근슬쩍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들 따지지 않음으로써 반겼다.

범철은 금색 텀블러를 찻장에 돌려놓고 일어났다. 주머니에 질러 넣은 손에 한 쌍의 주사위가 만져졌다. 아버지는 주사위를 늘 갖고 다니도록 그를 조련했다. 주사위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심하게 얻어맞았다. 범철은 주머니에서 주사위 하나를 꺼내 굴렸다. 소수가 나오면 녹차를 마시겠다고 정해 놓고 주사위가 멈추길 기다렸다. 눈은 2가 나왔다.

“뭐하냐? 물 떠 놓고 치성 드려?”

녹차는 그럭저럭 마실 만했다. 쓴 커피를 못 마시는 편이라 주사위 눈이 그렇게 나와 준 게 다행이었다. 범철은 문득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 모습을 아버지가 보면 좋아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게 싫어했는데, 아버지가 죽고서부터 오히려 주사위 따라 행동하는 이 꼬락서니라니.

“혼자 뭐해요?”

아연이 휴게실 입구에 서 있었다. 250개들이 커피믹스 박스를 든 채였다. 범철의 시선이 박스를 향하자 그녀는 턱짓인지 어깻짓인지 애매한 동작으로 뒤쪽을 가리켜 보였다.

“숙직실에 몇 박스 더 있어요.”

그녀는 커피 한 잔을 타서 범철의 맞은편에 앉았다. 범철은 그제야 미뤄 놓았던 대답을 꺼냈다.

“눈 구경요.”

“헤엑! 아까보다 더 많이 오네요? 집에 갈 때 운전 어쩌지? 눈길 운전 잘해요?”

아연이 짐짓 호들갑을 떨었다.

“난 집에 차 놓고 왔어요.”

“범철 씨 감이 좋은가 보다. 눈 내릴 줄 알고 놓고 온 거예요? 일기예보에서는 내일쯤에나 내릴 거라고 했는데.”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3이 나왔죠. 그래서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했어요. 범철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창밖 세상이 눈으로 온통 하얗다. 혹시 아버지가 저기 밖 어디선가 횡사를 당했을까? 회사 앞 시멘트 길처럼 아버지의 몸도 눈에 덮이어 가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양반이 되살아나 쌓인 눈을 헤치고 벌떡 일어날 일이다. 점쟁이란 양반이 자기 죽을 자리도 못 짚어서 객사를 하나. 당신 자식도 점쟁이 만들겠다고 주사위 들린 양반이 그런 식으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범철은 팔을 뻗어 탁자 위의 종이컵을 쥐었다. 그의 얼굴을 훔쳐보다가 제풀에 움찔 놀란 아연이 후다닥 시선을 거두어서는 다른 곳으로 휙 던져 버렸다. 녹차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날 바로 가볼걸 그랬다. 범철은 그 이상한 느낌이 있었던 밤, 아버지와 연결되었던 그때를 떠올리며 후회했다.

그러자 후회가―진동했다. 진동은 세상에 파동을 일으켰다. 육면체 따위를 평면에 펼쳐 그리는 것과 비슷하면서 더 복잡한 과정이 파동의 너울마다 일어났다. 선택은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발자국을 찍는다. 여태 찍어 왔던 발자국이 세상과 함께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범철은 길게 벌어진 시간의 간격으로 느릿하게 감탄했다. 세상에! 이런 거였구나. 그는 왜 주사위가 필요한 것인지 그 이유를 이해했다. 아버지, 점쟁이라뇨. 이건 그런 게 아니군요. 그는 그날 밤의 선택으로 생긴 발자국을 찾아내어 그 위에 발을 맞춰 섰다.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뒤로 한 걸음만큼 몸을 밀자 거꾸로 돌린 것처럼 세상이 여태와는 반대 방향으로 물결치기 시작했고 그 현상은 순식간에―세상을 되감아 놓았다.

박 차장의 노트북 키보드는 alt 키와 tab 키만 닳아 있을 것이다. 그가 손가락을 퉁길 때마다 모니터에 주식이 어쩌고 주가가 어쩌고 하는 그래프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큰 조직에는 그와 같은 잉여 인력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이유로 박 차장에게 싫은 티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박 차장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런 부분과 관계가 없었다.

퇴근 시간을 30분쯤 남겨 놓고서 박 차장이 범철을 불렀다.

“좀 전에 메일 보낸 거 봤지? 그거 해서 내일 아침에 볼 수 있게 좀 보내줘. 16번에 로그 쌓이니까 그거 참고하면 될 거야.”

이 개 같은 새끼, 회식하는 날까지 이 지랄이다. 사무실 여기저기서 위로인지 동정인지 헷갈리는 눈빛으로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안도감인지도 모른다.

퇴근 시간이 되어 모두가 회식장소로 이동한 후 외투 챙기는 시늉으로 미적거리던 아연이 다가왔다.

“아까 박 차장님이 시키신 거 양 많아요? 도와줄까요?”

그녀가 칸막이 위에 턱을 걸치고 물었다. 범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연은 잠깐 범철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럼 먼저 갑니다. 고기 따로 빼놓을게요.”

박 차장이 시킨 일을 끝내고 범철은 뒤늦게 회식 장소로 이동했다. 술에 취해 떠들어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연이 손짓했다. 그녀는 세팅된 테이블 하나를 따로 준비해 두고 있었다.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사이다부터 따니 테이블을 건너온 아연이 불판에 고기를 올리며 물었다.

“술은 안 마시게요?”

“차 가져왔어요.”

“아하.”

불판을 한 번 갈고 냉면을 시켰을 때쯤 자리를 파할 분위기가 됐다. 끝까지 버티며 냉면을 챙겨 먹고 나가니 먼저 나간 사람들이 고깃집 앞 거리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직원 대부분은 이미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여직원은 총무 역할이라 계산을 마칠 때까지 도망가지 못한 아연뿐이었다.

“노래방 가자!”

“방 말고 빠로 가자, 빠로.”

남자직원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걸 듣고 아연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범철은 아연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녀가 자신을 저 무리와 같은 족속이라고 여기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아연의 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후 범철도 대충 주위에 인사를 건넸다. 피곤했다.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술 안 마시고 집에 일찍 갈 핑계로 쓰려고 걸어와도 될 곳에 굳이 차를 끌고 와서 불법주차까지 했다.

다행히 불법주차 딱지가 붙어 있진 않았다. 대신 유리창에 명함 크기의 전단지가 잔뜩 올려 있었다. 헐벗고 기다리는 여자가 많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다 걷어내 버리고 운전석에 올라 한숨 돌리는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지나가며 새 전단지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림자는 불법 주차해 놓은 차들을 스치며 기계적으로 전단지 올려놓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범철은 차라리 감탄해 버렸다. 그때 갑자기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아연이 올라탔다.

“태워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얻어타고 가려고 기다렸어요.”

범철은 들키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쉽지 않은 하루다. 아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리라고 했겠지. 그는 창문을 열고 팔을 내뻗어 전단지를 치웠다.

“집이 어딘데요?”

“이목동이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티를 내기 싫어서 굳이 묻고 답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2차 따라갔으면 어쩌려고 기다렸어요?”

“술 안 마실 거라고 했잖아요. 아니었어도 좀 기다리다가 눈치껏 버스 타고 집에 갔겠죠.”

쉽지 않은 하루는 아연을 이목동까지 데려다 준 후에도 계속되었다. 교차로마다 신호에 걸렸다. 오늘따라 자리가 보이지 않는 주차장을 여러 바퀴 돌았다. 엘리베이터는 눈앞에서 문이 닫혔고, 심지어 그 엘리베이터가 19층까지 갔다가 내려왔다. 마침내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땐 문틈으로 퀴퀴한 냄새가 쏟아져나왔다. 아침에 급하게 출근하느라 싱크대에 쌓아 놓기만 했던 설거지거리가 생각났다.

“아, 씨…….”

정말 쉽지 않은 날이다. 온종일 세상이 딴죽을 걸려고 드는 것 같았다. 범철은 설거지까지만 끝나면 씻고 침대에 누워 쉴 수 있기를 바랐다. 더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하지만 그는 오늘 하루 이 순간을 몇 번인지 셀 수 없는 방식으로 반복해 왔고, 그중에서 그의 바람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리가 없다. 범철은 갑자기 그를 관통한 충격에 거품 묻은 수세미를 쥔 채로 쓰러졌다.

처음엔 비단손수건 같았다. 그 느낌은 배꼽을 파고들더니 그대로 몸을 관통하여 등허리 쪽으로 빠져나왔다. 이후로는 빠져나온 손수건 자락을 누가 쥐고 양팔 번갈아 쫙쫙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범철의 몸이 움찔거렸다. 부드럽기 짝이 없는 느낌이 배꼽으로 들어가 등 쪽으로 빠져나가며 끊임없이 충격을 주었다. 통증과는 많이 달랐다. 간지러움과는 조금 달랐다. 쾌감은 전혀 아니었지만 마치 절정이 다가올 때 그러하듯 퍼져나가며 몸을 경직시켰다.

“흐억!”

몸에 차곡차곡 쌓이던 충격파가 마침내 뭔가를 터뜨리는 순간, 범철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몸을 떨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무엇인지 모를 이 힘은 죽은 아버지에게서 빠져나와 산 그에게로 왔다. 아버지가 갖고 있던 뭔가가 이제 그의 것이 되었다.

주사위가 어디 있지? 범철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만져지는 게 없다. 어디다 놨더라. 꼭 들고 다니는데. 차 키를 빼 놓을 때 같이 뺐던가? 새로 꺼내 오자. 그가 베란다 문을 열고 박스를 꺼내 와 엎자 수백 개의 주사위가 방바닥에 쏟아졌다. 그중 아무거나 하나를 들고 굴렸다. 3이 나왔다.

그런데 3이 나오면 뭘 하기로 했지? 이러면 안 된다. 분명하게 분기를 만들어야 한다. 아버지는 그에게 분기가 분명해질수록 주사위 점의 결과도 신통해진다고 가르쳤다. 헐떡이던 숨이 가라앉고서야 헐떡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비로소 생각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뭘 굴려야 할지 알겠다.

어머니가 암세포 때문에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던 때였다. 2주 만에 나타난 아버지는 병상의 어머니에게 입을 맞추었다.

“미안하다. 주사위가 좀처럼 길을 안 놓아 주더라.”

하지만 어머니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네 아버지 왔더냐? 한 번씩 의식을 찾고 정신이 맑을 땐 그렇게 묻기도 하실 뿐이었다.

홀수가 나오면 아버지에게 가본다. 짝수가 나오면 가지 않는다. 범철이 주사위를 굴렸다. 짝수가 나왔다. 잘됐다.

“미안해요. 주사위가 길을 안 놓아 주네요.”

몸을 관통하던 충격도 이젠 여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후로 며칠간 범철은 어떻게든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으며 살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첫눈이 내리는 날에 회사에서 녹차를 마시다가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날 바로 가볼걸 그랬다고. 그 이상한 느낌이 있었던 밤에, 아버지와 연결되었던 그때.

선택에 대한 그의 후회는 늘 세상을 되감았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