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사(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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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사(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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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경상을 입은 그레고리는 간단한 깁스를 끝낸 뒤 3주간 입원 치료를 받으라는 명령서를 받았다. 다쳐서 끙끙거렸던 건 잠시, 팔자에도 없는 휴식 시간이 생기자 괜히 기분이 좋아진 그레고리다.

 

그에 비해 휩은 상황이 더 나빴다. 병원에 도착한 휩은 열에 눌러 붙은 살과 투구를 분리해내는 수술부터 받았는데, 샐러맨더와 싸우고 있었을 때는 몰랐지만 정말 크게 물집이 잡혀있었다. 수술이 끝난 뒤 휩은 화상 자국이 감염 되서 고열에 시달렸다. 휩은 밤새 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중얼거렸고 그레고리는 착잡한 심정으로 휩을 응원했다.

 

일주일동안 그레고리와 휩은 외부접촉을 엄금했다. 사건 후 삼일이 지나자 휩의 상태가 점점 나아져 그레고리와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 제법 몸이 회복되자 가장 먼저 그들을 찾아온 건 수비대장이었다.

 

“몸 상태는 좀 어때?”

 

항상 보던 얼굴이었지만 병원에서 보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수비대장은 들고 온 바구니를 그레고리에게 내밀었다.

 

“이건?”

 

“받아. 부대원들이 돈 모아서 산 선물이야.”

 

그레고리는 선물 바구니를 들고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이런 걸 다…….”

 

천 조각을 벗기니 노랗게 익은 배가 먹음직스럽게 들어있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레고리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수비대장이 만류했다.

 

“누워있어. 아플 땐 쉬는 게 제일이야.”

 

그는 간호병사에게 받아온 의자를 놓고 앉았다. 수비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더 큰일 날 수도 있었는데. 잘 대처해줘서 고맙네.”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레고리의 딱딱한 대답에 수비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샐러맨더 건 때 가장 용감하게 나섰던 건 자네들이였어. 용기사 훈련소 수비병들 사이에 자네들 이름이 쫙 퍼져있네. 단장님도 자네들 상태가 좋아지면 곧장 훈장 수여식을 거행할 거라고 말씀하셨네.”

 

“훈장이요?”

 

그레고리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래. 자네들은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어. 샐러맨더가 탈출한 것 치고는 피해가 거의 없었네. 훈련소에 신기록을 자네들이 앞장서 달성한 거야. 어디보자. 이번 사고로 발생한 인명피해가 한명, 샐러맨더 우리가 파괴된 것과 4번 감시초소가 불탄 것 빼고 시설 피해도 거의 없고. 자네 둘과 날개 뼈가 부러진 와이번 한 마리가 최고 중상자야.”

 

그레고리는 수비대장의 열정적인 칭찬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확실히 용을 발견하자마자 시선을 잡아 끈 게 피해 감소에 큰 도움이 됐나보다.

 

수비대장은 앞으로 그레고리와 휩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참 포상금 이야기를 진행하려던 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 그래서 제국민들은 나이가 보통 서른 살이 넘어가면 국가에서 주는 포상을 잘 챙겨야……. 아. 자네 손님인가?”

 

수비대장은 새로 나타난 손님을 훌끗 쳐다보았다. 그레고리 역시 손님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눈에 띄게 당황했다. 손님은 그레고리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백금색 머리칼의 눈부신 미녀.

 

“엘리나?”

 

“아. 이야기마저 나누세요. 기다릴게요.”

 

엘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보지 않았지만 엘리나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그레고리는 곁눈질로 엘리나를 계속 살펴보았다. 그녀는 멍하니 한참 잠에 빠져있는 휩을 바라보았다.

 

수비대장은 그레고리와 엘리나를 번갈아 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자네가 건강해보이니 난 이만 가보겠네.”

 

“벌써 가십니까?”

 

“나도 한가한 사람은 아니야. 대원들이 자네 얼굴 보겠다고 다음 주 주말에 면회 잡아뒀네. 괜찮겠지?”

 

“괜찮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였지만 그레고리는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번 달이 끝나기 전까지는 병원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울 테니까. 수비대장은 그레고리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비대장이 나간 뒤, 병실은 잠든 휩의 숨소리만 적막하게 들렸다. 엘리나는 천천히 그레고리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라 더욱 반가웠다. 그레고리는 기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지만 그걸 표현하기에는 엘리나의 표정이 너무 나빴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어두웠다.

 

“오래간만이야.”

 

그레고리가 어렵게 첫마디를 열었다.

 

“죄송해요.”

 

엘리나는 사과로 대답했다.

 

“왜 네가 사과해.”

 

“아뇨…….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레고리는 깜짝 놀라 엘리나를 달랬다. 그녀는 사과를 거듭할수록 격해지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지 점점 울먹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레고리가 몸을 일으켜 엘리나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주자 엘리나는 그레고리의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레고리……. 그레고리!”

 

“괜찮아. 엘리나. 울지마. 응? 왜…… 무슨 일이야.”

 

“리디아가, 리디아가…….”

 

순간 그레고리는 납덩이를 삼킨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뾰족한 물건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던 원반 하나가 툭. 떨어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디아가 왜? 엘리나. 리디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리디아가…….”

 

그레고리의 가슴 한복판으로 차가운 납덩이가 툭 떨어졌다.

 

 

 

“리디아가……. 리디아는……. 저 어떡해요? 그레고리? 네?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리디아가 죽어가는 동안, 저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어요!”

 

그레고리를 껴안은 엘리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엘리나는 비에 젖은 짐승처럼 불쌍하리만큼 몸을 떨어댔다. 그레고리는 이를 악물었다. 슬픔에 젖어 그에게 의지하는 불쌍한 아가씨에게 그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리디아는 그럼…….”

 

엘리나는 한참동안 오열했다. 샐러맨더의 탈주로 다친 초병은 두 명. 그리고 사망한 용기사 수련생이 한 명. 앙다문 이빨사이로 지독한 통증이 흘렀다. 그레고리는 엘리나가 진정될 때까지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엘리나가 눈물을 흘리던 동안 휩이 잠에서 깨 그레고리와 엘리나를 보았다. 휩의 눈동자는 무겁고 우울해보였다.

 

엘리나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호흡이 돌아오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랑 같을 때 사고를 당했어요. 샐러맨더가 탈출하던 날.”

 

분명 울며 감정을 쥐어짜냈을 텐데 엘리나의 목소리에는 지울 수 없는 분노가 담겨있었다.

 

“‘에피’는 리디아의 용도 아니었어요! 비오는 날 예민해진 샐러맨더가 화를 내자 어리숙한 주인이 도망쳐버렸다고요! 리디아는. 불쌍한 리디아는 좁은 우리에서 도망칠 곳도 없이… 샐러맨더를 진정시키려고 하다…….”

 

격정적으로 분노를 터트리던 엘리나는 점점 목이 메었는지 목소리가 낮아졌다. 양껏 마음 속 감정을 터트리고 난 뒤 찾아오는 불편한 적막이 찾아왔다. 엘리나가 무겁게 침묵하자 그레고리 역시 덩달아 숨을 죽였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불안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잘못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얼마나 지났을까. 엘리나는 눈물이 배어나올 듯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한 꼴을 보였네요.”

 

“엘리나.”

 

마음 한구석이 타는 듯한 안타까움에 그레고리는 어리숙한 손을 뻗어 엘리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실체가 없는 마음은 만질 수 없지만, 그레고리는 엘리나의 가냘픈 어깨가 마치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이라도 되는 양 정성껏 위로했다. 엘리나는 그레고리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양손으로 그레고리의 팔뚝을 감싸 쥐었다. 탈출한 샐러맨더와 싸우며 깊은 화상을 입어 흉측한, 그래서 더욱 볼썽사나운 팔뚝이었다.

 

엘리나와 그레고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뚜렷하게 인지했다. 눈을 감아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서로의 존재감이 비극적인 사고를 공유한 이들의 지친 영혼을, 다친 짐승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 치유하듯 그렇게 낫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 사람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처럼 느껴질 정도로 광활한 존재가 되어 보잘것없는 자기 자신을 잊게 만들었다. 엘리나는 그레고리의 팔이 마치 종교신수상이라도 되는 양, 꼭 껴안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엘리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거야?”

 

그레고리가 물었다.

 

“일주일 뒤에… 장례식이 있을 거예요. 그레고리. 거기서 만나 뵙고 싶진 않지만… 저기… 그때 와주실 수 있나요?”

 

그레고리는 속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례식에서 사람을 만나고 싶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죽어 모이게 된 장소는 그 이유만으로 이미 불운하다. 그레고리는 자신의 눈동자가 우울함에 물들어있지 않길 바라며 엘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꼭 갈게.”

 

엘리나는 그레고리의 대답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몸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레고리의 시야를 벗어나는 엘리나는 볼 위로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휩은 리디아의 사망 소식을 듣자 거의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당장 리디아의 영안실로 찾아가겠다고 떼를 썼다. 휩은 보기 드물게 그레고리의 말에도 따르지 않았다.

 

“제기랄! 대장! 대장까지 왜 그래요! 빌어먹을……. 용기사 영안실이라면서요? 당장 가자고요!”

 

“휩. 진정해.”

 

휩의 난동은 실성한 짐승의 몸부림에 가까웠다. 아직 자기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가 사라졌다는 진실을 받아드리지 못해, 평소와 같이 행동하면 이미 어긋난 일들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대장… 대장이 말해줘요… 제발… 의사고 수비대장이고… 말해줘요… 가서 리디아를… 만나야…”

 

“미안하다.”

 

그레고리는 휩과 리디아가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서로가 마을 하나를 두고 떨어진 고향 친구 사이였다는 것, 외출을 틈타 두 사람이 꼬박꼬박 만남을 가졌다는 것 정도만 알 뿐이었다. 하지만 휩의 불안과 절망감을 이해할 수 없진 않았다.

 

용기사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만일, 사고로 죽은 이가 리디아가 아니었다면. 일주일 전 그레고리의 병실을 찾아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던 엘리나가, 싸늘한 시체로 식어간다면. 그레고리 역시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난동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리디아의 죽음을 받아드리는 일은 어려웠다. 장례식 직전까지 휩은 참담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 혼자 종이를 구해다 뭔가를 적고는 했다. 그레고리는 그런 휩을 말리지 않았다.

 

장례식 당일. 그날도 샐러맨더가 탈출하던 날처럼 궂은비가 내렸다. 제국 용기사 훈련소 정중앙에 위치한 ‘용사의 쉼터’는 명예롭게 전사한 이들이 묻히는 공동묘지다. 제아무리 찬란한 장식품과 조각으로 도배를 해놓아도 죽은 이가 풍기는 음울한 분위기까지 묻어두기에는 역부족인 이곳에 검은 상복을 입은 기사들이 가득했다.

 

수비대장과 비번인 수비병들 역시 전원 참석했으며 그레고리와 휩 역시 목발과 붕대와 함께 참석했다. 먼발치에서 검은 비옷을 쓴 채 가는 속눈썹 아래로 빗물을 흘려보내고 있는 엘리나를 보고 그레고리는 조금 안심했다. 힘들고 지쳐도 리디아의 죽음을 받아드릴 준비는 되어있었다.

 

그레고리와 휩은 습관적으로 수비병들 사이에 도열하려 했지만 의외의 인물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레고리.”

 

낯선 이에게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은 언제나 어색하다. 그레고리는 퍼붓는 빗속에서 검은 챙 사이로 빗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까무잡잡한 노년의 남부인 이었다.

 

“이리로 와 서게나.”

 

그레고리는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팔에 목련 문양의 견장을 찬 여기사가 달려와 속삭였다.

 

“단장님이세요. 저기 비어있는 두 자리로 가시면 되요.”

 

짤막한 두 마디였지만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레고리는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용기사훈련소의 단장이란 자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근무에 투입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먼발치에서 밖에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장은 그레고리에게 두 번 말하지 않았다. 정신이 번쩍 든 그레고리는 서둘러 목발을 움직여 여기사가 말한 자리로 가 섰다. 바로 리디아의 관에서 두발자국 떨어진 자리였다.

 

단장이 관 정중앙에 서자, 여기사가 신호를 보냈다. 군악대의 슬프고 장엄한 음악이 천천히 용사의 쉼터에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차갑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학교장과 단장이 관에 손을 얹고 기도문을 외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용기사훈련소의 모든 기사들이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기도가 끝나자 생도 여덟 명이 관에 메인 줄을 잡아끌었다. 아주 천천히. 한때 얼굴을 맞대고 술잔을 기울였던 그와 그녀의 친구가 미끌어지듯 세상을 떠났다.

 

바로 저곳이었다. 지상의 세계와 지하 세계를 구분 짓는 저 6피트 아래가 용기사들의 마지막 쉼터였다. 그레고리는 하염없이 내려가는 관을 보며 리디아의 활발했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 외박증을 위조해 친구와 밤을 세며 놀기를 세상 제일의 호사로 생각했던 어린 용기사 훈련생이 보였다.

 

그레고리는 눈을 감고 묵념했다. 휩이 숨을 죽여 가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고리는 목발을 집지 않은 손을 올려 휩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빗물로 손가락이 차게 젖어 뻣뻣해졌지만 그레고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관이 완전히 땅 속에 들어가자 단장을 시작으로 푸른 수국 한 송이를 관 위에 던져 넣었다. 교장과 용기사들, 수련생도들이 수국의 물결을 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쪽빛으로 피어나는 수국은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던 순간을 기억해주라며 조르기라도 하듯 리디아의 무덤을 파랗게 피어나게 만들었다.

 

긴 수국의 행렬 사이 엘리나도 푸른 수국 한 송이를 리디아에게 바쳤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엘리나는 수국을 던진 뒤 꾸벅 고개를 숙이고 곧장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이와 기수와 병과에 따라 삼삼오오 무리지은 용기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엘리나는 그런 용기사들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바칠 꽃을 받지 못해 용기사들을 구경만 하고 있던 그레고리는 슬그머니 자리를 떠 엘리나의 곁에 다가갔다.

 

“엘리나.”

 

“그레고리.”

 

단지 서로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엘리나와 그레고리는 서로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했다. 엘리나는 그레고리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곧 민망해진 그레고리가 헛기침을 하자 엘리나는 비옷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뭘. 당연히 와야 할 자리인데.”

 

두 사람은 용기사들의 의식이 끝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헌화식이 끝나자 리디아의 관은 흙으로 덮여 완전히 땅속에 묻혔다. 그레고리는 리디아의 묘를 보면서도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리디아 웨일워드. 이곳에 잠들다. ‘용사의 쉼터’에 유달리 깨끗한 비석 하나가 비에 젖어 물빛으로 빛났다.

 

 

 

장례식 이후 그레고리는 엘리나와 만나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엘리나는 시간이 남으면 어김없이 그레고리를 만나러 면회소를 찾았고 그레고리는 기꺼이 엘리나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엘리나는 용기사 훈련을 받으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토로했다. 물론 그 형태는 비난과 욕설의 중간쯤 되는 형태로 표출됐다.

 

“그레고리. 이거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안 돼요?”

 

전술기동훈련을 끝마친 뒤 외출을 받은 엘리나는 곧장 그레고리를 만나러 쪼르르 달려왔다. 각 병과가 실전을 가장하고 벌이는 전술기동훈련은 약 3일에 걸쳐 10회 이상의 비행에 나서야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수련생들이 질색 하는 고된 훈련이었다. 엘리나는 무척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귀족들, 진짜 재수 없어요.”

 

그레고리는 하마터면 홀짝이고 있던 포도주를 내뿜을 뻔했다. 엘리나가 결코 얌전하기만 한 아가씨는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건 천지차이다.

 

“개중에는 그런 귀족도 있겠지.”

 

그레고리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침착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엘리나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아뇨, 걔네들은 다 똑같아요! 귀족들이란! 어떻게 하나같이 전부 이기적이고 배려란 걸 모르죠? 귀족들은 자기가 제국 공군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구요!”

 

“그래도 요격대라면 좀 다르지 않을지…”

 

“요격대 귀족들이요? 마찬가지죠. 아니, 걔네가 더 심각해요. 제발 자기 주제를 좀 알았으면 좋겠다구요.”

 

“……. 엘리나.”

 

그레고리는 제발 목소리를 낮추라는 의미로 작게 속삭였지만 엘리나는 안절부절 하는 그레고리가 퍽 재미있는지 그녀 몫의 포도주를 들이키고는 훈련 기간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제국의 많은 용기사들이 그러하듯 엘리나 역시 자신이 용기사란 직업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용의 마음을 읽고, 용과 교감하며 소통한다는 건 미치광이 살인자에게 죽일 대상을 가려 죽이라고 설교하는 과정과 같다. 신경을 혹사시키고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사는 제국의 하늘을 수호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병력이다.

 

일단 재능이 있다면 징집되고 보는 곳이 제국 공군이다. 그 대상이 귀족 평민 가릴 것 없다보니 공군에서는 유달리 계급간의 권력다툼이 심하다. 이름 있는 가문의 귀족들은 생존율이 높고 비교적 안전한 용을 타고 경력을 쌓다, 전투에서 몇 번 승리하면 지휘관으로 승급되는 식이었다.

 

그에 비해 평민들은 야만인들의 그리폰과 직접 부딪쳐 싸우는 요격대에 주로 소속된다. 직접 싸우는 병과라 공을 세우기 쉬울 것 같지만, 실상은 사망률이 너무 높아 신병이 들어오기 무섭게 죽어나가는 병과였다. 아주 많은 수가 필요했지만 제국은 넓고 평민은 많다. 요격병들이 피를 흘려 쌓아올린 전과는 귀족 지휘관들의 몫이 된다.

 

엘리나가 정말 힘들어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그녀는 요격병 수련생도다. 당연히 주변에 그녀와 비슷한 처지의 평민들이 널려있다. 강제로 징집되어 용의 눈치를 살피며 목숨을 건지려 발버둥치는 요격병들이. 하지만 엘리나는 평범한 요격병과는 대우 자체가 다르다. 바로 프라이트너의 기수였기 때문이다.

 

엘리나는 숙소도 귀족들과 함께 쓰고 대우도 하급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이미 요격병들은 그녀를 ‘친 귀족파’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엘리나는 진짜 귀족이 아니다. 가문도 연줄도 없이, 그저 프라이트너 기수로 적합판정을 받은 것 외의 능력은 없었다. 진짜 귀족들은 엘리나를 자기 가문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작업을 깔아두고 있었다. 평민 하나쯤을 구워 삼는 건 노련한 귀족이라면 일도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사관학교로 끌려와 또래의 용기사들 사이에서 자라난 엘리나가 귀족들과 대등하게 맞설 정도로 뛰어난 정치적 안목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이가 차면 찰수록, 엘리나는 그녀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적대적으로 변해가는 걸 느꼈다. 평민들은 엘리나를 귀족의 개처럼 생각했고 귀족들은 그녀를 가치 있는 장기말 정도로 생각했다. 엘리나는 두 거대한 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어 조용히 지쳐갔다.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오직 어린 시절 사관학교에서 사귄 친구, 리디아만이 그녀의 사정을 헤아려주고 다른 평민 요격병들과 친분을 이어주었다.

 

그레고리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작은 학교였지만 그레고리는 역사를 가르치던 선생이었다. 엘리나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그녀가 느낄 압박감이 얼마나 무거울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레고리는 엘리나가 얼마나 힘들지 간에 언젠가 극복할 수 있는 고난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프라이트너에서 내리지 않는 한, 그녀의 가치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전투 중 사망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역대 프라이트너 기수들이 그러하듯 제국 공군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그레고리는 그날을 위해. 언젠가 자유로이 하늘을 누릴 엘리나를 위해 자그마한 탈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한참을 ‘귀족들의 자존심만 앞세운 전술’에 대해 토로하던 엘리나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그레고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래?”

 

엘리나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어딘가 불만에 찬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까딱거렸다. 엘리나의 인상이 워낙 예의발라 그다지 불량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레고리가 보기에는 다분히 도전적이었다.

 

“그레고리.”

 

그녀는 갑자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죠? 나. 용기사들이랑 별로 안 친한거.”

 

갑작스러운 엘리나의 직언에 그레고리는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야.”

 

“변명할 필요는 없어요. 나도 다 아니까. 용기사들이 저 별로 안 좋아하는 거요.”

 

그레고리는 깊은 신음을 흘렸다. 만일 이 자리에 무능한 수비병이 아니라 남부 출신의 쾌활한 평민 용기사가 있었더라면. 그런 그레고리의 착잡함을 눈치 챘는지 엘리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레고리가 걱정해주는 걸로 충분해요. 저기. 그레고리. 저 다음 주에 휴가인데, 그레고리도 휴가 받을 수 있다고 했었죠?”

 

불현 듯 잊고 있었던 일들이 기억나 그레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그레고리와 엘리나는 휴가나 외출을 맞춰 마을로 놀러 나가자는 약속을 했었다. 빈번히 일정이 맞지 않아 실패했지만 이번에 그레고리가 조금만 무리하면 일정을 맞출 수 있다.

 

“저 어차피 다른 용기사들이랑 나가도 할 거 없단 말이에요.”

 

엘리나가 그렇게 투덜거리자 그레고리는 단숨에 결정을 내렸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일정을 맞추고야 말리라.

 

그레고리는 엘리나와 확실한 날짜를 맞추고 반드시 그때 만나자는 약속을 한 뒤 면회소를 나섰다. 엘리나에게는 해가 완전히 지기 전까지 시간이 있었지만, 그레고리는 곧 근무를 나가야할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레고리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면회소 펍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는 엘리나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그녀는 외출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