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도래 – 1 (제3회 ZA 문학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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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왔다. 중무장한 군대와 용감한 시민들은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나타난 자리에서, 길어야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오체분시 당해서 쓰레기봉투에 담겼다. 걸어 다니는 시체답게 덧없음의 미학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로 한날 한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는지?

종말론자들조차 혐오하는 그들에 대해서는 가이아 이론이거나 말거나, 그래서 인간을 견디다 못한 지구가 시체 바이러스라는 항체를 분비했거나 말거나, 사실 왜 나타났는지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조직된 군대와 경찰 앞에 끝없이 무력해 보여서 조지 오웰이나 하인라인의 소설처럼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또 다른 해프닝이구나 싶었고, 어떤 취미가들은 조금은 세상이 흥미진진해질 거라는 기대감을 품었지만 어림없는 백일몽이었다.

그들은 손가락 아래 찌부러지는 개미처럼 보였지만 실은, 우리의 눈이 미치는 이면에서 흰개미처럼 득실거리면서 세상의 뿌리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 투철한 저널리스트의 보도는 ‘우리는 ‘의혹’을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되었고, SNS와 커뮤니티 게시판으로 살 길을 찾아 나간 진실의 목소리는 ‘괴담’으로 취급되어 가십거리 이상이 되지 못했으며, 나는 이 모든 것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사건인데, 모두가 실제 일어나는 사건임을 아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의문을 품었다.

뒤늦게 밝혀졌지만 그 이면에는 강력한 군사력이 도사리고 있었고, 하나 둘씩 특정 지역으로 연락이 끊겨버렸다던가, 그래서 구글어스로 고향 촌동네를 보려고 했더니 거기만 몇 개월 전 사진이 출력되고 있다던가, 탈영병과 무장헌병이 자꾸 보인다는 ‘괴담’들이 육성으로 회자되기 시작할 때쯤, 우리가 아는 세상은 폭삭 내려앉았다. 발전소가 점령당한 것만으로도 맹자니 공자니, 수천 년을 쌓아온 가치관이 한 방에 잿가루가 되었으니까.

이렇게 인류가 죽어가는 시기였지만, 오히려 나는 살아나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얹었다. 햇빛으로 달구어져 따끈따끈했다. 두 팔을 뻗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자동차를 비롯한 모든 문명의 소리가 사라진 지금은 숨소리마저 놀랍도록 멀리 날아갔다. 매사에 조심하라, 쉬지 말고 입 닫아라, 범사에 경계하라. 시체들이 세상을 점령하기 전에는 소심해서 못쓰겠다며 일터마다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어떤가?

시체 세상에서 팔다리 쭉 뻗은 채로 잘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며, 아직도 뜨거운 음식을 먹는 사람도 나뿐이었다. 가스레인지를 켜서 프라이팬을 달구고, 두툼하게 썬 스팸을 굽고, 압력솥으로 지은 흰 쌀밥 위에 후추를 살짝 친 스팸을 얹어 후후 불며 한입 가득 우물거리면서 먹어 치운 다음 스위트콘 깡통을 따서 탱글탱글하고 달콤한 옥수수알이 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느끼며 달짝지근한 국물까지 모두 비우곤 후우, 만족스런 숨을 내쉰다.

꿈 같은 이야기! 가끔 궁상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발판 위에 올라서서 담벼락 밖을 내다보면, 천국의 경계에서 철조망 저편으로부터 전해지는 유황불의 뜨끈한 열기와 비명소리를 들으며 구경하는 듯하다. 거름에서 굴러도 이승이 좋다, 자취생 식사조차 과분한 행복이다. 아니, 자취생이라니? 지금 세상에서는 손에 꼽을 만큼 호화스런 식사다.

빛이 반사되지 않도록 모기장으로 렌즈를 덮은 망원경으로 현미동을 바라보았다. 렌즈가 비춰주는 조금 일그러진 골목길과 담벼락, 창문들. 오늘도 안전해 보였다. 뒷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시체 두 마리가 서있었지만, 이들은 허수아비였다. 어째서인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녀석들. 말미잘이나 파리지옥이라고 해도 뭐 맞는 말이다.

허수아비가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깡통에서 햄을 끄집어내 시체의 발 밑에 던져놓고는 현미동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중에 뒤돌아보니 허수아비는 제자리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쪼그리고 앉아 흙을 퍼먹기 시작했다. 시체는 정 다급하면 돌멩이도 먹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햄 덩어리에 손이 닿자, 기름기를 느낀 녀석이 아귀 같은 본색을 드러내곤 얼굴을 들이밀었다. 흙을 파먹는지 햄을 파먹는지, 이윽고 기세에 못 이긴 허수아비는 자기 손가락까지 두 개나 물어뜯고는 개껌처럼 씹기 시작했다. 왠지 하품이 나왔다. 하품이라니, 당신 미쳤군요.

동감인데, 내게는 계획이 있었다. 소중한 계획이었고, 그 모든 게 수첩 속에 있었다. 한희 8, 우성 14, 인혜 5, 금자 5, 영재3. 허수아비 3번에게는 먹이를 주었으니 표시를 해놓고 한희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희-그린코아 오피스텔 501호-바깥에는 시체가 30구 이상, 안쪽은 4구.

그린코아는 베스킨라빈스 모퉁이를 지나 4차선 도로 방면이었다. 그곳은 지나면 본격적으로 도심이 시작되어서 여기저기 뒤질 곳도 많지만, 아쉽게도 그곳이 경계선이었다. 꿀이 먹고 싶다고 아프리카 살인벌집을 뒤질 미친놈이 어디 있나? 사실 현미동으로 들어가는 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감수할 위험이다.

나는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 철공소로 들어갔다. 천정은 높고, 밀어서 움직일 수 있는 커다란 갈고리에는 H빔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사방에 녹슨 철근이나 H빔, 거인의 화장지처럼 돌돌 말린 강판이 널려있었지만 기름과 쇠 냄새 대신 케케묵은 먼지 냄새밖에 맡을 수 없었다.

모퉁이에 있는 철제 계단을 올라가 2층의 사무실로 들어가면 책상에서 뽑혀 나온 서랍, 드러누운 의자와 어지럽게 흩뿌려진 서류들, 급하게 도망친 흔적이 역력하다. 군홧발로 서류들을 밟으며 창문으로 걸어가자 종이 위로 내려앉은 먼지들이 모래처럼 사각거렸고, 창문 앞에 서자 침묵과 함께 죽은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언뜻 보면 모든 게 정상인 도시였지만 눈앞에 회색 필름을 씌운 것처럼 모든 것이 바래어 있었다.

자세히 보면 건물이고, 길이고, 문이 열린 채 버려진 차들, 내동댕이쳐진 배낭과 심지어는 짓밟힌 깡통까지 고운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문득 바라보면, 마치 회색조로 그려진 정물화 같아서 언제까지나 우두커니 서 있게 만든다. 비현실적인 것은 그 자체로 매력인 것 같다.

왜, 발가락의 때를 후비고 난 손톱 냄새를 알면서도 자꾸 맡는 것처럼. 그런 느낌은 창문 밑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창고 지붕으로 뛰어내린 뒤 철공소 뒷골목을 통해 본격적인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 펼쳐지는 속 모습을 본다면 한층 강해진다. 시체 썩는 누린내가 떠돈다는 걸 알면서도 그 공기를 마시고 싶어진다는 말이다.

배낭에서 장난감 잠망경을 꺼내 골목 밖으로 내밀었다. 4차선 도로 위는 차에 갇힌 시체와 깔린 시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잠망경을 조금 비틀자, 상체만 남아 기어 다니는 시체들이 보였다. 마치 소리를 끈 영화 같은 광경이다. 나는 몇 달째 이 괴상한 침묵 속에서 살아남으면서 침묵을 침묵으로 느낄 수 없게 된 대신 새로운 감각을 얻었다.

뒤틀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조용할수록, 그게 죽은 듯이 조용할수록 오히려 생생하다고, 마치 자연의 소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체 신음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고 할까, 일종의 전쟁광처럼 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다.

곱게 미쳐서 다행이다.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적응을 잘 한 거고, 사실 미쳤다는 것조차 구시대의 관점에서 미친 거지, 지금 세상에선 일종의 진화 같은 거잖아. 머릿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 잠망경에 집중했다. 차에 깔려서든, 허리 디스크가 심해서이든 상체만 남아 기어 다니는 시체들은 무시할 수 없는 복병이었다.

아니, 무서웠다. 차체 아래로 기어 다니거나, 혹은 멍하니 기다리고 있다가 휘발유를 뽑고 있으면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선 발목을 물어뜯으니까. 나도 한번 잡혔다가 바지에 똥을 싼 적이 있었다. 밀리터리 샵에서 찾아낸 코코란 점프 부츠의 복각판을(2차대전 미군 공수부대에 납품된 전투화) 신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차도에서 운동화 착용은 시체나라 영주권이나 다름없다. 명심할 것, 시체에게서 살아남으려면 가볍고 빠른 것이 최고지만 길 한가운데만 다닐 게 아니라면 보호장구는 필수. 물건을 뒤지거나 좁은 복도, 골목, 문, 창문 옆을 지날 때, 불가피하게 노숙할 때, 눈치채지 못한 모서리나 물건에 긁힐 때, 이 때는 민첩함이 소용없다.

그러니 굳이 미제 가죽 전투화를 찾아 신고 팔뚝과 정강이에는 축구용 각반을 연결해 두르고, 미군용 팔꿈치와 무릎보호대에 머리에는 비니 모자, 군용 위장무늬 고어텍스 점퍼의 어깨와 목덜미에는 가죽가방을 잘라 얼기설기 덧대고 목에는 가죽을 기워 만든 스카프를 두른 미치광이 몰골이라 할지라도, 거울을 지날 때마다 새색시마냥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일지라도 그 모습이 목숨을 구한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걸 꼽자면 역시 전투화와 각반, 무릎과 팔꿈치 보호대이다. 물론 가죽장갑도. 가죽 스카프는 빙글빙글 두르지 말고 대부처럼 걸어놓고만 있을 것. 그래야 시체에게 목덜미를 잡혀도 스카프만 빼앗기고 빠져나갈 수 있다.

한 번 덕을 본 적도 있다. 창문을 지나다가 갑자기 목이 서늘해서 뒤돌아보니, 창문에서 나온 손이 목도리를 움켜잡고 배웅하듯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시체 손아귀 힘으로 목덜미를 붙잡힌다는 건 철공용 바이스에 물린 것과 다름없다. 시체에게 몸을 잡힌 꽤 많은 사람들이 발로 차거나 멱살을 잡고 밀어내서 빠져나가는 건 많이 봤지만, 뒤에서 목을 잡힌 상태에서 빠져나간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불시에 다리나 손을 붙잡힐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정말 놀라서 뿌리치기도 전에 중심을 잃고 자빠지거나 물어 뜯기고 마니까.

제자 하나 기르고 싶다. 똘똘하고 심심하지도 않은 녀석으로. 수첩 속의 4명이 있지만 글쎄, 파트너나 친구로 삼을만한 사람이 아니다. 수없이 봐왔다. 바뀐 세상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은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삶을 포기한다. 골방 속에서밖에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고, 먹을 걸 찾으러 나서느니 뛰어내리거나 식칼로 손목을 긋고, 싸우면 죽을 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건다.

조금 나은 사람들은 안전한 장소를 찾아 떠나지만 그건 홍길동 찾아 율도국 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스스로 안전한 장소를 만들 수밖에 없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도망친다니, 말 그대로 죽는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상반신만 남은 시체 하나가 꿈틀거리더니 나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허겁지겁 잠망경을 접었다. 들키진 않은 것 같았다. 수많은 차에 들어 있는 경유며 휘발유가 욕심났지만 아직은 어림없다. 최소한 겨울이 지나야 안전하지 않을까, 눈이 내리면 시체가 기어 다닌 흔적도 알 수 있고, 혹시 시체들이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이러지 말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얻는 방법도 있지만 어디든지 주유기는 작동하지 않았고, 지하 탱크의 무거운 강철 뚜껑에는 그만한 잠금 장치가 걸려있었다. 최소한 자물통이나 사실이었다면 몇 달이 걸려도 쇠톱으로 끊어보았을 테지만 뚜껑 자체에 붙어있다 보니 열쇠가 없으면 엄두도 못 내는 것이다. 사무실을 몇 번 뒤져보았지만 주인이 가져가버렸는지 특수하게 생긴 열쇠는 보이지도 않았고…….

갑자기 등 뒤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축축 미지근한 털뭉치가 목덜미를 타고 굴러 떨어지는 것 같았다. 유독 걸걸하고 목젖을 울리는 신음소리. 귀에 익은 소리였다. 천천히 뒤돌아보았지만 골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체의 신음소리가 반사된 것 같았다.

나는 술집 골목을 향해 달팽이처럼 걷기 시작했다. 모퉁이에서 잠망경을 내밀었다. ‘대부’가 있었다. 몸집에 맞지 않게 크고 추레한데다 한쪽 팔이 뜯어져 나간 양복, 시연하느라 팔에 끼고 있던 파란 쿨토시와 고무 건강팔찌, 형광 주황색 끈으로 목에 걸린 채 덜렁거리는 구형 휴대폰. 얼굴만은 시체답지 않게 화색이 돌고 있었다.

잘 먹고 있다는 뜻이었다. 돌연변이 시체라서 지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악취를 뿜어서 시체들을 지휘하는 것도 아니지만 대부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시체들의 숫자만 봐도 얼마나 사냥을 잘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극도로 위험한 녀석이다. 생각 같아서는 한희를 건너뛰고 싶었다. 이런 때 포기하지 않는 건 영화주인공뿐이야.

수첩을 꺼냈다. 한희 8. 아뿔싸,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음식이 떨어졌어도 3,4일은 지나 있었다. 슬슬 음식을 가져다 주지 않으면 배가 고파서 집을 나올지도 몰랐다.

쓰레기통 뒤에 웅크리고 배낭을 열었다. 좁쌀 같은 고무조각으로 만들어진 방울공과 스폰지 뭉치가 네 개 남아 있었다. 나는 공을 내려놓고 스폰지 뭉치를 열기 시작했다. 이쑤시개로 방울 속에 채워둔 솜을 끄집어내곤 독극물처럼 다루며 공에 난 칼집으로 밀어 넣었다.

배낭을 메고, 공을 쥔 손을 당기고, 투포환 던지듯이 밀어 던졌다. 공은 대부의 머리를 넘어가 반대편에 떨어지며 방울소리를 냈다. 장승처럼 서 있던 시체들이 일제히 돌아서며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만은 공이 아니라, 공이 날아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잠망경을 쥔 오른손을 움켜잡고 떨리는 것을 참았다. 한희는 외과의 인턴이다. 의사를 잃어버릴 수는 없지.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