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트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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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트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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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욱신거리는 눈의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어두운 밭. 왜 이런 곳에 서 있는 거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자신이 아무리 돈이 궁하다 해도 최근의 기억을 내다 팔았을 리는 없을 터다. 그런데도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최근 무얼 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통증이 점차 가라앉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미 검은 몸을 드리워 별빛을 늘어놓은 하늘. 제멋대로 피부를 훑으며 도망치기 바쁜 찬 바람. 버려진 지 오래된 듯한 폐가. 무슨 작물인지 모를 것을 심어놓은 밭. 주변을 둘러싼 산. 풍경은 단순한 시골에 불과하다.

방금까지 비가 내린 건지 습기가 가득했다. 여자는 주위를 살피며 자신이 왜 여기 있는 건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달이 구름에 가려진 탓인지 주변이 심히 어둡다. 시커먼 손길이 갑자기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문득 폐가에 닿은 시선. 괭이와 낫으로 긁어내린 듯 흠집이 잔뜩 난 벽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아니야.

별빛밖에 없는 공간에서 그림자가 저리 선명할 리 없다. 저건 그림자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다.

그림자가 아니란 걸 인식하자마자 저 자의 오른손이 느릿하게 올라왔다. 바다 밑에서부터 떠오르는 물체처럼 느릿하게. 저 사람은 뭘 하려는 거지?

여자가 시선을 집중했다. 휘젓는 듯한 손짓을 알아볼 수 있었으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달빛이 드러나기 전까진.

구름이 무언가에 의해 당겨지듯 걷혔다. 마침내 드러난 달이 날카로운 빛살을 드리웠고 폐가에 닿았다. 여자는 빛이 폐가를 밝히자 비명을 질렀다.

폐가에 붙어있는 자 역시 여성이었다. 다만 온몸이 피투성이인 게 정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취한 것처럼 웃고 있는 얼굴을 보는 순간 여자는 등을 돌리고 냅다 달렸다.

밭 저편으로 가로등의 불빛이 보인다. 어쩐지 평소보다 발이 가볍다. 몸 안이 텅 비어있는 양 발길이 부드럽다. 밭을 벗어나 도로에 발을 디딘 그는 뒤를 돌아봤다.

방금까지 피투성이 여자가 있던 자리는 어둠이 꿈틀댈 뿐이었다. 귀신을 보다니. 이런 일은 없었는데.

뒤로 꺾은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자 논밭 저편에서 산발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는 기겁하며 뒷걸음질했다. 물이 고인 밭고랑에 발이 빠질 뻔한 여자는 팔을 휘청이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고랑 탓에 시야가 흔들린 사이 산발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둠 속에서 뭐가 또 튀어나올지 모른다. 몸을 두르고 있던 한기가 이제 목덜미를 죄여오는 듯했다.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어.

그 생각을 누가 엿들은 것도 아닌데 때마침 길 너머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나란히 달리는 두 개의 불빛. 자동차의 라이트가 분명했다.

“여기요! 잠시만요!”

여자가 묘하게 조명이 어두운 가로등 아래서 펄쩍 뛰며 손을 휘저었다.

여자를 발견한 운전자는 가로등 옆에 차를 세웠다. 세차한 지 좀 돼보이는 국산 SUV다. 운전자가 차 안 등을 켜고 창문을 내렸다.

말끔히 면도한 깨끗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큼직한 덩치로 보아 운동을 즐겨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죄, 죄송한데 가까운 마을까지만 태워다주실 수 있나요?”

여자의 말을 듣고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남자의 승낙에 여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여자는 조수석에 타려 했으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공구함이 보인다.

“아, 미안합니다. 그쪽 차 문은 고장 나서 열리질 않거든요. 고쳐야 하는데, 하하. 뒤에 타시겠어요?”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여자는 남자의 말대로 차 뒷문을 열었다. 차에 타기 전 무심코 본 밭 너머로 산발의 여자가 서 있다.

손을 흔들며.

마치 배웅하는 양 흔드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바다에 빠진 것도 아닌데 몸이 차다. 추워.

서둘러 차에 타고선 숨을 돌렸다. 호흡마저 찬 것이 영 불쾌하다. 진짜로 바다에 빠졌다가 기억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싶은 멍청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가슴이 진정되어 앞을 보니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만 돌려 위아래를 훑는 눈. 여자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출발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잠시 눈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대강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체가 전진한다. SUV의 묵직한 바퀴가 물웅덩이를 밟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차 안에선 과일향 방향제 냄새가 은은히 났다. 푹신한 가죽 소파가 편안하지만 공기는 어색함을 머금고 있었다. 라디오 소리가 공간의 빈틈을 메운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여자는 입술을 떼려다 침묵을 지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어쩌다 이런 논밭밖에 없는 곳에 온 걸까?

“그……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네요. 왜 여기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기억상실이라는 건가요. 아니면 몽유병이라도 있어요?”

“그런 건 없어요.”

“어쩌면 기억상실 때문에 몽유병 같은 게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지도요. 지금 떠오르는 건 뭐가 있는데요?”

“그게…….”

여자는 대화를 잠시 끊고 생각에 잠겼다. 침묵이 조금 길다 느껴질 즈음 여자의 입술이 열렸다.

“저기, 죄송한데 라디오 소리 좀 키워주시겠어요?”

“라디오요? 예. 그러죠.”

뜬금없는 부탁이었지만 남자는 순순히 라디오 소리를 키웠다.

“요즘 전라북도 여성들을 공포에 빠트리고 있는 사건이죠. 손가락 살인마의 이야기입니다.”

“손가락 살인마! 요즘 그것 때문에 제 딸도 무서워 하더라고요. 그나마 도심에 살아서 다행입니다만. 손가락 살인마가 저지른 첫 번째 사건이 2년 전이었죠?”

남녀의 목소리. 최근 벌어진 사회의 굵직한 사건을 분석하고 알려주는 프로그램인 듯했다.

“네. 2년 전 익산에서 한 여대생이 살해되었죠. 피해자는 외진 논밭에서 살해 당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여기서 이상한 건 피해자의 오른쪽 새끼 손가락이 없었단 겁니다.”

“그게 시작이었죠. 그 뒤 4개월이 지나자 이번엔 군산의 야산에서 두 번째 피해자가 나왔습니다. 교회 봉사활동에 늦지 않으려고 이른 새벽 산을 가로지르다 변을 당한 건데요. 두 번째 피해자 역시 오른쪽 새끼 손가락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연쇄 살인 사건으로 수사의 초점이 잡혔죠. 하지만 범인의 단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고요. 수사에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세 번째 피해자가 완주군에서 발견됩니다.”

“그 후로도 피해자는 계속 늘어났고 가장 최근 벌어진 사건은 7개월 전 정읍에서의 살인이었죠. 7개월이 지난 현재로서도 범인의 행방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은, 범인은 20대 여성만을 노린다는 것과 호남평야 주변의 외진 곳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 마지막으로 살해한 여성의 새끼 손가락을 잘라간다는 것이네요. 피해자 중 네 명은 성폭행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2년 동안 여덟 건의 살인을 저지른 이 극악무도한…….”

“생각났어요.”

조용히 라디오를 듣고 있던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그림자가 공간을 뒤덮어 시커먼 윤곽만 보인다.

“전 저 범인을 찾고 있었어요.”

“범인을요? 경찰이라거나 그런 분이셨어요?”

“아니요. 전…….”

여자는 바스러진 목뼈를 토해내는 것처럼 가까스로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냈다.

“제 동생이 그놈에게 죽었거든요.”

목뼈의 조각이 목에 걸린 걸까. 숨이 턱 막혔다. 두 사람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남자였다.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괜한 걸 물어봐서…….”

“아니에요. 저도 방금 떠오른걸요. 왜 기억이 안 나는진 모르겠지만.”

“병원이라도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자동차가 도로의 모퉁이를 돌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산이 가까워졌다. 남자가 백미러로만 여자를 보며 물었다.

“그럼 혼자 조사하시는 거예요?”

“그런 셈이죠. 동생이 살해 당한 곳이 여기라 무작정 찾아왔나 봐요. 뭘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뭔가 알아내신 건 있으세요?”

“솔직히 기억이 없어서 뭘 알아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아무것도 못 알아냈겠죠. 제가 어떻게 형사 노릇을 하겠어요.”

“그래도 이런 늦은 시간까지 조사하신 거 아닌가요. 대단하시네요. 조사라면 형사처럼 노트에 적고 그런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하하.”

여자는 남자의 말에 괜히 주머니를 더듬었다. 텅 비었다. 생각해 보니 동생의 죽음을 조사한답시고 나왔는데 아무것도 안 가지고 온 건 이상하다. 수사 노트 같은 건 과하더라도 핸드폰 하나조차 없다니.

“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지…….”

여자가 중얼거렸다. 소지품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기억마저 날아간 건 분명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가족이 죽었을 때 너무 혼란스러우면 그럴 수도 있죠. 저도 누나가 한 명 있는데 2년 전에 죽었거든요. 누나가 죽은 날부터 몇 달 동안 멍하니 보냈더니 그때 뭘 했는지 지금도 기억을 못 해요.”

남자가 핸들을 꽉 쥐었다.

“그래서 이해합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면 괜찮지 않더라고요. 이상하게도. 어딘가에 남아있나 봐요.”

나름의 위로인 걸까. 여자는 울상이던 표정을 살짝 풀었다.

“그래도 괜찮아질 거예요. 사람의 마음은 의외로 단단하니까. 기억도 금방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이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의 혀는 휴식을 가졌다.

차는 묵묵히 비에 젖은 도로를 걸어나갔고, 뭘 밟은 건지 종종 덜컹거렸다. 여자는 창밖을 내다 보았다. 검은 산과 밭은 이지러진 선이 되어 차의 속도에 맞춰 모습을 구부러트렸다. 귀신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좋은 사람의 차에 얻어탈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대로 시내로 나가서 병원이든 경찰이든 찾아가야지.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 걸까?

톡톡.

잡생각이 많아질 즈음, 마치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