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몽

  • 장르: 호러, 추리/스릴러 | 태그: #자각몽 #꿈속세상 #드림컨트롤 #현실
  • 평점×20 | 분량: 75매
  • 소개: 나는 꿈속에서 자각몽이라는 걸 인식한다. 현실에서는 못 할 여러가지 일을 해볼 기회다. 꿈속을 돌아다니는 와중에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건 아주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 더보기

자각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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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밤 열한 시다. 뚫어지라 쳐다보던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손에 쥔 축축한 마우스를 내던지듯 놓았다. 키보드의 Alt와 F4를 눌러 게임을 끈 후 눈을 비비며 책상 위를 봤다. 졸리다. 아직 못다 한 노트 정리가 남았는데도 FPS 게임을 정신없이 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방문을 슬며시 열어 밖을 살폈다. 문틈으로 어둠이 보인다. 거실과 부모님 방은 이미 불이 꺼졌다. 이제 노트 정리만 하고 자야지. 그나마 다행인 건 내일부터 등교 시간이 늦춰졌다는 거였다.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이 정도에서 게임을 멈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직 잠을 잘 시간은 충분하다.

 

FPS 게임을 처음 시작한 게 작년 이맘때쯤이었으니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래서 나름 보통 실력보다는 잘한다고 생각했다. 애들 사이에서도 일명 잘하는 놈으로 통했다. 흔들리지 않는 조준과 빠른 판단 후 사격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별로 잘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몇 판을 내리 지니 이성을 잃어버렸다. 나보다 못한다고 생각되는 상대에게 당하니 더 열 받는 거다. 하다 하다 나중에는 뒤에서 RPG-7 대전차 로켓포까지 맞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겨드랑이에 땀이 찼다. 이를 악물고 도전해 결국 몇 번 이기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게임에 들인 시간이 모두 헛수고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착잡했다. 저렇게 캠핑이나 하는 상대 하나 제대로 이기지 못하다니.

 

나름으로 열심히 한 게 참 많았다. 게임뿐만이 아니었다. 공부나 스포츠, 그림 같은 것도 열심히 했다. 분명히 노력했고 일정 시간 이상을 투자했지만 실력은 중간보다 조금 높은 정도뿐이었다. 아무리 해도 남들이 우러러보는 뛰어난 단계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재능의 한계일까.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특별한 사람만이 그 높은 곳에 우뚝 선다. 대부분 사람은 그 정도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나도 그렇고.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았다. 이제는 자야 한다. 노트만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어야지. 책상 옆에는 미니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간다. 미지근한 바람이 얼굴에 닿자 온몸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했다. 교과서를 펴고 노트 중간 부분에 끊어진 글을 새로 이어 썼다. 눈앞의 책상 모서리 부분이 자꾸 흔들린다. 손에 쥔 볼펜이 두 개로 보였다가 점점 흐릿해진다. 방안이 점점 멀어진다. 졸리다. 졸려도 너무 졸리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갑자기 잠이 깬 걸까? 언제 불을 껐는지 방안이 깜깜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더듬거리며 형광등 스위치를 찾았다. 버튼을 누르자 깜빡거리며 불이 켜진다. 훤히 드러난 방을 살펴봤다. 어딘가 낯설었다. 컴퓨터 본체와 의자를 비롯해 방 안의 모든 사물이 흐릿했다. 각각의 모습이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안갯속에 들어온 느낌이라고 할까. 주변의 색이 선명하지 않고 탁하다. 내 몸을 내려다봤다. 손과 발이 마치 일렁이듯 가물거린다. 무엇보다도 친숙한 내 방이 자꾸 다른 사람의 방인 것만 같다. 처음 와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안을 천천히 걸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 전체가 마치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달 위를 걷는 느낌이다. 이상한 일이다. 방문을 열려고 문 손잡이에 손을 뻗자 눈 깜빡할 사이에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여닫는 중간 과정이 사라졌다. 거실도 방안과 마찬가지다. 흐릿하면서도 중간중간 있어야 할 화분이나 액자 속 사진 같이 평소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물건들이 없다. 오히려 어떤 것들은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TV와 짙은 갈색의 소파가 그랬다. TV 화면에서는 무언가를 방영하는 것까지 보였지만, 그게 어떤 프로그램인지 무슨 내용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몸이 두둥실 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부모님 방과 화장실을 돌아다녔다. 집 안 구석구석 모두 불이 켜져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 이 집안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 기분은 뭘까. 마음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오른다. 평소 느낄 수 없는 애틋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이다. 마치 아주 어렸을 때 무엇에든 쉽게 재미를 느끼고 감동했던 그런 상태라고 할까.

 

아무도 없는 거실로 되돌아오다 문득 하나의 사실을 깨닫고 멈춰 섰다. 그렇구나, 지금 이건 꿈이다. 꿈일 수밖에 없다. 깨달음은 곧 다른 의문으로 변했다. 그런데 어떻게 꿈이란 걸 자각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곧 이런 현상에 대해 친구한테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게 바로 자각몽이구나. 익숙한 듯 낯선 주변 풍경과 세상에 나 혼자만 뚝 떨어진 것 같은 이질감이 그 반증이다. 딱 듣던 그대로였다.

 

그럼 이 안에서는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이야기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손등을 꼬집어 봤다. 자각몽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 바로 손등을 꼬집거나 입을 막고 숨을 쉬어보는 방법이었다. 현실이라면 바로 몸에 반응이 올 터. 손등은 아무리 꼬집어도 아프지 않다. 입을 막아도 마찬가지였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니 숨을 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신기했다. 꿈속인데도 이 모든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니. 몇 가지 더 시험해보기로 했다. 촉각은 조금이나마 느껴지는데 청각은 어떨까? 식탁으로 가서 위에 있던 접시를 들었다. 아무렇게나 휙 하고 던지니 거실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꿈속에서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 현실이었다면 쨍그랑 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겠지. 그리고 엄마가 방에서 나와 등짝 스매싱을 할 테고. 괜히 웃음이 나와 낄낄거리며 깨진 접시 모양을 살펴봤다. 마치 하얀 종이를 조각조각 오려낸 것 같아 현실성이 없었다. 역시 꿈은 꿈인가 보다. 집 밖 먼 곳에서 내가 아는 그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좀 뒤늦긴 했지만 청각도 존재하긴 하나 보다.

 

어쨌든 확실했다. 이건 꿈이고 난 지금 자각몽 상태다. 소풍 가기 전날처럼 마음이 들떴다. 이제부터 뭘 해볼까? 요즘은 슈퍼 히어로 영화가 유행이다. 초능력 하면 제일 처음으로 연상되는 것. 그건 바로 하늘을 나는 거다. 히어로의 능력 중 기본 중의 기본. 자 해보자. 나는 거다. 근데 하늘을 날아본 적이 있어야 어떻게 나는지 알지. 그냥 상상만 하면 되려나? 몸을 움츠린 후 높이 뛸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구부린 다리를 펴면서 하늘을 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무언가 방해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거실 바닥을 찬 발이 두둥실 떠오르다가 이내 밑으로 떨어졌다. 잠깐 공중에 머물던 몸이 기우뚱거리며 바닥에 닿았다. 꿈이라고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걸까. 실망하며 수차례 위를 향해 뛰었다. 그럴 때마다 자꾸 무언가가 신경을 긁었다. 방해를 받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걸리는 게 있다. 남들은 자각몽에서 잘도 하늘을 날아다닌다던데 난 왜 안 되는 걸까.

 

다시 한 번 온 힘을 다해 힘껏 뛰어오르다 머리 위가 서늘해지며 거대한 것에 눌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위로 고개를 드니 가물거리는 천장이 보인다. 그렇다.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날면 천장에 부딪힌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몸이 떠오르다 만 거고.

 

어디가 좋을까.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 현관문을 열고 긴 아파트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지겹다. 꿈속에서까지 현실과 똑같이 행동하고 싶지는 않다. 좀 더 빠른 길이 있다. 밤하늘이 보이는 베란다를 향해 걸어갔다. 추락 방지용 보호 난간을 딛고 올라서 건너편을 바라봤다. 같은 아파트 단지 내의 다른 집들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일렁거린다. 평소보다도 밝고 과장된 크기다. 어찌나 선명하게 깜빡거리는지 불꽃놀이를 보는 것처럼 황홀할 정도다. 환하고 아름답다. 마치 먼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처럼 탐스럽다. 직접 가보지 못할 곳이라서 더 끌리는 걸지도 모른다. 가지지 못할 거라서 더 탐나는 것처럼. 여긴 꿈속이다. 안 될 것도 없지. 모든 걸 할 수 있는 나만의 세상이니까. 일단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건 하늘을 나는 거다. 밑을 내려다봤다. 현실과 똑같이 13층의 높이는 아찔했다. 실제로 높은 곳에 올라온 듯 텅 빈 공간이 느껴졌다. 주차된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조그맣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날 방해할 것은 없다. 아까는 낮은 천장 때문에 날지 못했다. 이제는 다르다. 난간 위에 서 두 팔을 벌리며 심호흡을 했다. 굳이 이렇게 긴장할 필요도 없다. 뻥 뚫린 하늘이 날 부른다. 아무 생각 없이 밑으로 뛰어내렸다. 밑으로 추락한다기보다 밑에 있던 것들이 성큼성큼 나를 향해 올라왔다. 이제 하늘로 오를 때다. 온몸에 힘을 꽉 주며 위를 올려다보자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몸이 가벼워졌다. 공중에 멈춘 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아파트들이 다 사라지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하늘에 떠 있는 상태인데도 땅에 발을 딛고 선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럼 이건 어떨까? 몸을 위로 끌어올리며 속도를 냈다. 처음에는 몸이 천천히 떠오르다가 그 감각에 익숙해지자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지그재그로 방향을 틀었다. 내가 하늘을 난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현실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곳곳을 누비고 다니다가 금방 밑으로 내려왔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 날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것뿐이다. 머리카락이 휘날리지도 않고 얼굴과 몸으로 밀어닥치는 공기의 저항도 없었다. 그저 내가 하늘에서 움직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낮이다. 여기는 어딜까? 어디선가 본 듯한 낯선 도시가 사방을 둘러쌌다. 건물 외관에 쓰인 글자와 도로의 중앙선 같이 디테일한 것까지 보인다. 버스 정류장 옆에 쓰레기통이 있고, 그 밑에는 돌멩이가 굴러다닌다. 집안의 뿌옇던 모습과는 달리 거리의 모든 게 선명하다. 꿈속에 좀 더 깊이 빠져든 상태일까. 내친김에 좀 더 먼 곳의 풍경을 보려 하자 눈앞이 흐려지면서 사방이 흔들렸다. 딱 거기까지인 것 같았다. 무리했다가는 꿈 연결이 불안해져 결국 꿈에서 깰지도 몰랐다. 시선을 거뒀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하늘을 나는 건 해봤으니 이제 다른 걸 해볼 차례다. 바로 여자다.

 

18살이나 됐는데도 아직 성 경험을 못해봤다. 애들이 흔히 놀려대는 아다인 것이다. 여자랑 하면 무슨 느낌일까? 야동에서 보는 것처럼 진짜 그렇게 좋아서 죽을 지경일까? 궁금하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별거 아닐 것 같으면서도 뭔가 엄청날 것 같다. 그곳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미지의 세상이다.

 

일단 여자를 찾아야 한다. 아무 여자나 상관없다. 그저 여자면 된다. 혹시 이대로 꿈에서 깰까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살폈다. 이 거대한 도시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자동차들도 싹 사라졌고, 거리는 지나다니는 이 하나 없이 텅 비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꼭 뭐만 하려고 하면 없다. 현실에도 마찬가지였다. 날 좋아하는 여자도 없었고, 또 내가 먼저 다가갈 용기도 없었다. 그러니까 아직 아다인 거다. 그래서 더 포기할 수 없다. 친구 놈들이 말하는 그 개 좋다는 게 어떤 건지 느껴보고 싶다.

 

눈앞의 빌딩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사무실로 보이는 풍경이었다. 누가 있긴 한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 모습이 흐릿하다. 가까이 가 살펴보니 남자다. 눈 코 입이 뭉개진 듯 불분명했지만 남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에이, 이게 뭐야. 사무실에서 나와 어느새 새로 생긴 전원주택으로 들어갔다. 깔끔히 손질된 넓은 정원으로 지나는데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강당에서 남자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너희한테는 볼 일 없다고. 그들을 지나서 강당 뒤편의 문을 열었다. 방 하나가 나왔다. 침대 위에 망원경이 보이고 창문에 처진 커튼이 바람에 휘날린다. 아무도 없다. 그 방에서 나오자 눈앞으로 긴 복도가 펼쳐졌다. 복도에는 수십 개의 문이 마주 보며 서 있다. 하나하나 열어봤다. 어떤 방은 아무도 없었고 또 어떤 방은 누가 있더라도 남자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문을 다 열어봤는데도 찾아 헤매던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다 꿈에서 깨면 낭패다. 또 언제 이런 꿈을 꿀지 알 수 없다. 여자를 찾을 수 없다면 불러오면 그만이다. 여기에서는 내가 주인이자 지배자다.

 

어떤 여자가 좋을까? 요새 한창 인기인 걸그룹의 멤버 중 하나가 떠올랐다. 청순한 얼굴과 육감적인 몸매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광고도 많이 찍고, 얼마 전에는 영화에도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런 여자면 더 바랄 게 없다. 얼른 내 앞으로 불러와야지.

 

어느새 TV 가요 프로그램에서 보던 것처럼 짧은 치마의 무대 의상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성공이다. 눈앞에 선 여자를 살폈다. 꿈속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의 생김새가 불분명했다. 눈코입이 있는 건 확실한데 왜인지 전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멤버가 맞는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냥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실제로는 어떤 얼굴이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드디어 경험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매끈한 다리로 손을 뻗었다. 꿈인 걸 아는데도 떨렸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서 그렇다. 죄의식도 들었다. 어쨌든 동의하에 하는 게 아니다. 불안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된다. 되고말고. 누구도 엿볼 수 없는 곳이다. 원하는 건 맘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의 세상.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치마를 벗겼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드디어 야동에서 보는 걸 할 수 있다. 치마 다음에는 상의다. 어떻게 벗겨야 하는 걸까. 단추나 지퍼 같은 게 없다. 여자의 상체를 더듬으며 방법을 찾았다. 긴장돼서 그런지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조바심이 났다. 손에서는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다. 몸이 이상하다. 온몸이 찌릿하더니 현실에서의 팔다리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눈앞의 도시가 아까의 집안처럼 뿌옇게 변하며 멀어진다. 내내 느끼던 아련한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깬다. 점점 꿈에서 깨는 게 틀림없다. 밝은 빛이 눈을 찌른다. 불을 키고 잔 게 틀림없다. 하필 이때! 지금은 안 된다. 어떻게 꾼 꿈인데! 너무 무리해서 그렇다. 과하게 흥분했다. 인식하지 말자. 일단 저 여자를 치우자. 여자는 없다. 이곳에 여자는 없고, 난 지금 아무 생각도 없는 편안한 상태다. 반대로 내가 지금 꿈속에 있다는 걸 인식시켜야 한다. 뭐가 좋을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을 만졌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계속 만지자 까칠까칠한 흙 알갱이가 손에 잡혔다.

 

이거다. 이렇게 꿈속에 있다는 걸 나 자신에게 확인시켜야 한다. 아예 손으로 딱딱한 땅을 긁어대다가 팔다리를 주물렀다. 물을 휘젓는 느낌이었다가 점점 손에 부드러운 살집이 잡혔다.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보이던 눈앞이 선명해지며 짙은 풀이 자라난 언덕이 솟아난다. 몽롱한 감각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기분이 묘하다. 다시 꿈속으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이렇게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며 약간의 판단력을 가지도록 노력하자. 부드러운 풀이 발을 간지럽힌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다 주위를 살폈다. 겹겹이 둘러싼 둥근 언덕 너머로 우리 아파트가 보인다. 바로 옆에 붙은 학교가 유독 선명하다.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