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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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쓸쓸한 비가 내리는 가을날이다. 이렇게 구질구질한 날은 집에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빌린 비디오테이프나 보는 게 최고다, 라고 생각하는 승우지만 사람이 어찌 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단골 커피숍인 ‘자스민’에서 승우는 나오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따스한 커피가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고, 테이블과 의자에 밴 향긋한 커피향은 코를 부드럽게 간질이며, 실내에 흐르는 피아노 연주곡은 조용하지만 때로 격정적으로 마음을 두드린다.

흔들의자는 앞뒤로 살살 흔들려 유쾌한 율동감을 전하고, 맞은편에는 아무리 시시한 이야기라도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 상대가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상대가 청순한 긴 머리에 웃는 얼굴이 예쁜 여인이라면? 더구나 2주만 있으면 결혼하여 곧 다가올 새천년을, 그리고 평생을 함께 보낼 약혼녀라면? 누가 승우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승우의 맞은편에 앉은 미미는 올해 스물다섯 살이고 반 년 전에 대학을 졸업했다. 전공은 국문과. 안경잡이에 전형적인 샌님 스타일인 승우는 서른 살에 제약회사의 연구팀장을 맡아 젊은 나이에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데, 키도 작고 인물이 별 볼 일이 없는데다 여자 앞에만 서면 무슨 말이든 얽히고설키고 꼬이고 막히는 그놈의 울렁증 때문에 변변찮은 연애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사촌동생인 혜경이가 대학동기인 미미를 소개시켜 줬을 때도 미미의 미모에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으나 언감생심 내가 어딜? 하는 걱정에 지레 포기해 버렸더랬다. 하지만 뜻밖에도 미미는 남자의 외모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모양인지 점잖고 속이 깊은 승우를 마음에 들어 했고 1년 간 만남을 지속한 끝에 최종 목적지인 결혼에 골인하기 이른 것이다.

“오빠, 저 지금 너무 떨려요. 이게 몇 년 만인지 짐작도 안 가요. 가만 있어봐. 고등학교 졸업하고 못 봤으니까 하나, 둘, 셋, 넷…… 5년 만이에요, 5년!”

평소 말이 별로 없고 여성스런 미미의 모습과는 다르게 손을 쫙 펴서 호들갑스럽게 숫자를 세는 미미가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기대에 차,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 퐁당 빠지고 싶은걸.

“그렇게 좋아. 그 친구 만나는 게. 이거 질투나는데.”

짐짓 이맛살을 찌푸리는 승우. 어쭈, 제법 애교도 부릴 줄 알고.

“아이, 오늘은 오빠보다 지혜예요. 평생 만난 친구 가운데 베스트란 말이에요.”

“자기가 그러니까 정말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좋은 친구네. 친구 결혼식 보러 귀국하고 말이야. 어디라고 했지, 캐나다였던가?”

“아니. 미국, 뉴욕이에요.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알았어, 알았어. 미안. 이제부터 확실하게 기억해 둘게. 그보다 잘 찾아와야 할 텐데 여기가 워낙 고양이 손바닥만큼 좁은 곳이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똑똑한 애라 괜찮아요. 걘 틀림없거든요.”

“그런데 자기는 그 지혜 씨 이야기만 나오면 들뜨네. 도대체 어떤 친구인지 이제는 내가 궁금해서 못 참겠어.”

“그럴만하니까 들뜨죠. 걘 내 인생에 은인이라고요.”

“후아! 정말 어떤 친구기에 그런 이야기를 다 듣나. 지혜 씨 오기 전에 자세하게 이야기 좀 해봐.”

“음……. 지혜 얘기를 하려면 티렉스(T-REX)가 꼭 나와야 해요.”

“티렉스? 공룡, 육식 공룡 말이야?”

순간 미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승우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애써 지켜왔던 교양은 저 멀리 날려버린 듯 입을 떡하니 벌린 채. 전설의 티렉스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힙합(Hip Hop) 음악을 소개해 불세출의 인기를 누린 슈퍼스타. 별 중의 별, 아니 별빛 따윈 상대도 안 되는 태양 같은 존재인데.

“아니, 어떻게 티렉스를 몰라요? 오빠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 가수가 누구예요?”

“……김광석.”

“으으…….”

미미는 처음으로 이 남자를 골라잡은 걸 후회하는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두 가수는 추구하는 음악 장르는 포크와 힙합으로 완전히 달랐어도 비슷한 점이 없지는 않은데, 두 사람 모두 듣는 이의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리는 감동이 있는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는 것과 둘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

“아니 그 티렉스라는 가수가 자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자기 학교 다닐 때도 지금처럼 조용한 아이였다며?”

“그야 그렇죠. 짬날 때마다 책만 붙잡고 아이들이랑 어울려 다니지 않아서 책벌레라고 얼마나 놀림 받았는걸요.”
사실은 이렇다. 미미는 눈, 비 오는 궂은 날이든 햇볕이 화창한 날이든 가릴 것 없이 항상 지각을 했는데, 아무리 집에서 늦게 나와도 절대 뛰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굣길에 미미를 추종하는 인근 남자 고등학교 학생들이 늘 수십 명씩 모여 있어서, 마치 여왕처럼 고개를 한껏 쳐들고 도도한 표정과 우아한 걸음걸이를 뽐내며 걸어야만 했으니 늦을 수밖에.

지각한 벌로 운동장 한 바퀴를 돌고 자기 반인 3학년 2반 교실로 올라가니 이미 수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어지간히 탈진 상태인 게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것 같다. 미인은 역시 몸이 약한 모양이야. 자, 이제 수금을 시작해 볼까.

미미는 승우에게 말한 대로 여간해서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실은 읽는 것 말고 다른 용도가 있었다. 책등으로 앞에 앉은 아이의 뒤통수를 톡톡 건드리면 그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미미가 싱긋 웃으며 손을 펴면, 그 아이 역시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듯 표정이 갑자기 밝아진다. 그러면 미미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로 책을 든 손을 뒤로 당겨 풀스윙을 할 채비를 갖춘다. 그제야 아이는 얼른 1000원짜리 지폐를 건넨다. 고마워, 아무리 타고난 피부라도 영양을 공급하려면 부지런히 먹어야 하거든.

미미는 수금한 돈으로 매점으로 가려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평소보다 일찍 담임이 교실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여우같이 입이 뾰족해 별명도 ‘여우’인 담임은 이혼한 40대 남자였다. 소문에 따르면 저 얼굴에 바람피우다 걸렸다나 어쨌다나.

“특별히 전달할 사항이 있어서 조금 일찍 들어왔어요. 오늘 전학생 한 명이 올 겁니다. 원래 고3 때는 전학을 잘 안하는 법인데, 특별한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반으로 오게 됐어요. 다들 잘 알겠지만 고3이 된 지 한 달도 안 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예요. 괜히 전학생 왔다고 싱숭생숭하거나, 불러내서 같이 놀고 그러면 여러분만 손햅니다.”

여우 담임은 신신당부하곤 교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담임이 간과한 것은 고3이든, 중3이든 전학생에 대한 호기심만큼 학생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는 것. 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친구와 비슷한 수업만을 반복하다 보면 그 반복되는 일상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낼 수 있는 어떤 자그마한 변화라도 커다랗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아이들의 호기심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성격일까? 공부는 잘 할까? 수많은 질문들이 하나하나 공중으로 떠올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 같다. 사실 미미도 내심 흐뭇했다. 먹잇감이 하나 늘어나는 셈이니까. 먹이가 늘어나면 수금액도 늘어나는 거고, 앞으로 좀더 여유로운 삶이 가능하겠군.
모두의 호기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전학생은 아이들 진을 빼려고 작정한 것인지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후 3시 반, 영어 선생 ‘미친개’가 말도 안 되는 전라도 잉글리시를 구사하며 학생들을 혼절 직전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교실 앞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몇 초 후 문이 열리고 담임이 들어왔다.

흉포하기로 유명한 미친개와 입이 뾰족한 여우가 인사를 교환하니, 학생들은 여기가 동물농장이냐며 시시덕거렸다. 여우는 전학생이 왔다며 문 밖으로 손짓을 해 전학생을 불러들였다. 아이들은 기대에 차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들어오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수업 시간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눈빛이다.

전학생은 절도 있는 자세로 걸어와 교탁 앞에 섰고, 아이들의 입에선 탄성과 한숨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전학생의 투명한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아이들에게 감탄, 질투, 동경 그리고 자괴의 마음을 한꺼번에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여우는 분필로 전학생의 이름을 휙휙 써나가는데, 저래 봬도 상당한 달필이다. 윤지혜라는 이름의 전학생은 꾸벅 인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윤지혜입니다. 민감한 시기에 전학 와서, 학업에 조금이라도 불편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비록 1년이지만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얜 뭐지? 예쁜 얼굴을 해가지고선, 저렇게 차가운 분위기라니. 지혜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와 간결한 자기소개에 아이들은 내심 당황했다.

여우는 지혜에게 빈자리에 앉을 것을 지시했다. 빈자리는 교실 맨 뒷자리에 났고, 하필 대각선으로 미미의 뒤쪽이었다. 미미는 자리에 앉은 지혜가 노트라도 꺼내는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클래식이라도 되는 양 기분 좋게 들으며 미소 지었다.

‘완전 얼음이네. 어디 좀 뒤에도 네가 그렇게 침착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
미미는 온통 지혜의 기선을 제압할 방법에만 신경을 쏟으며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이 중요한 법이다. 애초에 기선을 잡아놔야 말을 들어먹지. 수업은 금방 끝나고 휴식시간이 되었다.

자, 이제 시작이다. 미미는 돌아앉아 팔짱을 끼고 다리를 최대한 우아하게 꼬았다.

“얘, 전학생. 너 어디서 왔니?”

이것은 평범한 질문으로 상대의 대답을 유도해 낸 다음 강력한 말 펀치로 상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미미만의 싸움법이다. 이미 대답도 다 준비되어 있다. 만약 지혜가 지방에서 전학 왔다면, “이거 촌년이네. 어쩐지 소똥 냄새가 난다 했다. 얘들아, 문 좀 열어라. 냄새 좀 빠지게. 그래 어디 경운기만 타다 생전 처음으로 버스 타니까 멀미 안 나디…….” 서울에서 쭉 나고 자랐다면, “너 나 몰라? 이년 건방지네. 너 집, 학교, 교회만 왔다리갔다리 했냐? 명화여고 미미를 모른다고. 눈깔을 확 뽑아버릴까 보다.”

하지만 지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그 큰 눈으로 미미를 빤히 마주보았다. 어라? 미미의 심장박동이 두 배나 빨리 뛰었다.

“어쭈? 눈 안 깔아? 어디다가 눈을 똑바로 들어?”

하지만 지혜는 미미의 말이 귀찮다는 듯 다시 자신이 꺼낸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진짜 눈물나게 맞아야 말을 듣겠구나. 너 안 되겠어. 이년이 내 말을 씹어. 언니가 오늘 기분이 좋아 자비롭게 넘어가주려고 했는데 굳이 울어봐야 고분고분해지겠다니 알았어. 오늘 끝나고 각오해. 네 어미아비도 못 알아보게 죽여줄 테니까.”

하지만 지혜는 아예 대꾸도 안 했다. 미미는 지혜의 태도에 당황했다. 이 바닥에선 한 번 밀리면 끝장이다. 한 명이라도 반항의 기미가 보이면,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에서 우르르 빠져나가는 사람들처럼 전원이 이탈하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지혜가 너무도 담담한 것이 약간 불안했지만, 미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비장하게 말했다.

“긴 말 필요 없고, 이따 학교 뒤편 소각장으로 와라.”
명화여고 본관 뒤편에 있는 소각장. 소각장의 더 뒤로는 청마산(靑馬山)으로 이어지는 으슥한 숲이라 학생들은 청소 시간 외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교사들의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미미의 전설은 대부분 여기서 만들어졌다.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구나.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지혜는 나타나지 않았다. 3월 초라 해가 일찍 저물었다. 차디찬 공기에 미미의 입에서는 입김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뿜어져 나오고 있어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있는 듯 보였다. 추위에 발만 동동 구르던 미미는 기다리다 못해 본관으로 달려갔다. 마침 본관 앞에는 같은 반 아이들 두 명이 남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야, 전학생 어디 있어?”

“지혜?”

둘 중 덜 소심한 학생이 되물었다.

“지혠지 지랄인지 어디 있냐고?”

“좀 전에 여기로 나가던데.”

“뭐, 언제?”

“한 10분쯤 됐나.”

“뭐? 아니 뭐 이런 게 다 있어.”

미미는 지혜를 잡기 위해 밖으로 내달렸다. 미미는 텅 빈 운동장을 잽싸게 지나면서 평소에도 이렇게 뛸 수 있다면 지각은 면할 텐데, 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치 마라톤 주자처럼 교문을 거쳐 버스 정류장이 있는 내리막 언덕길을 달렸다.

“저기 있구나!”

미미는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왈칵 소리를 질렀다. 아니지, 지금 먹어야 할 마음은 이게 아니다. ‘넌 죽었어.’ 바로 이거야! 지혜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 인적도 없었다. 미미는 지금까지 감춰왔던 야성의 소리를 지르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렸다.

“끼야야야호.”

미미가 노린 것은 달리며 붙는 가속도를 더한 펀치를 지혜의 관자놀이에 먹여 한 방에 멋지게 눕히는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그린 그림은 완벽했다. 실제로도 지혜는 예상처럼 멋지게 누워버리겠지. 그러나 다음 순간, 미미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대로 영원히 날고 있으면 좋으련만 추락의 아픔은 너무 강했다. 냉기로 꽁꽁 얼은 아스팔트 바닥에 허리부터 떨어진 것이다. 반면 지혜는 뒤로 누웠다가 스프링처럼 튕기듯 곧바로 일어서는데 우아한 몸놀림이 마치 고양이 같다.

“아아아…….”

미미는 허리가 끊어질 만큼 아파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약한 신음소리만 새어나올 뿐이었다. 지혜는 잠깐 멈칫했지만 버스가 도착하자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야, 나 못 움직이겠어.”

지혜는 무시하고 버스 발판에 다리를 올려놓으려 했으나 미미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다.

“아아, 그냥 갈 거야? 나 정말 아파…….”

몇 초간 돌이라도 된 것처럼 멈춰 서 있던 지혜는 한숨을 쉬고는 버스에서 물러났다.

“어디 봐.”

미미는 떨어질 때 왼쪽 옆구리와 허리 쪽으로 떨어진 모양이다. 지혜는 다가가 미미의 팔을 치우고 교복 치마 안쪽의 블라우스를 홱 걷어내어 상처를 살펴봤다. 온통 빨갛게 부어 있지만 어디가 부러지거나 할 만큼 심각한 건 아니다. 지혜는 미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미미가 계속 아픔을 호소했지만 지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아파.”

“그럼, 여기 계속 누워 있을 거야?”

미미를 부축해 정류장 의자 쪽으로 가려던 지혜는 생각보다 미미가 너무 아파하자 미간을 찌푸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쩔 수 없네. 일단 우리 집에서 잠깐 쉬고 가자.”

“집이 어딘데? 버스 타려고 했잖아.”

“집은 근처야. 너 때문에 오늘 학원도 못 가고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첫날인데.”

둘은 밤이 내린 거리를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조심조심 걸었다.

“너 그런 거 어디서 배운 거야?”

“유도야. 너한테 쓴 기술은 배대뒤치기.”

“배대…… 뒤치기?”

“그래. 사실 낙법도 못하는 애한테 쓰면 안 되는 건데, 네가 너무 갑작스레 들어와서 힘 조절을 못했어. 그 점은 사과할게.”

“유도 오래 했어?”

“글쎄. 9년이면 긴 건가, 짧은 건가.”

“뭐어? 9년! 대단하구나. 완전 유도 소녀네.”

10분 정도 걸려 도착해 보니 지혜가 사는 집은 32평형 아파트의 1층이었다. 지혜의 뒤를 따라 들어온 미미는 우선 집이 너무 깨끗하다는 것에 놀랐다. 그야말로 먼지 하나 없어 보였다. 자기 몸치장만 중시하고 방은 폭격 맞은 듯 지저분한 미미와는 완전 딴판이다.

“지금 들어가면 너네 꼰대가 싫어하지 않을까?”

“아버지한테 꼰대가 뭐냐? 어쨌든 오늘 아빠는 못 들어오신다고 했어.”

“엄마는?”

“엄마는 안 계셔.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어.”

미미는 담담한 지혜의 말에 당황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엄살을 피우며 거실에 놓은 3인용 소파에 앉았다. 연방 앓는 소리를 내며 “아야, 아야. 앉으니까 살 거 같네. 이렇게 몇 달 가는 건 아니겠지?”라고 꾀병을 부렸다.

지혜는 부엌 냉장고에서 마실 걸 꺼내느라 듣지도 못한 눈치다. 추운 데서 떨다 이제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미미는 슬슬 노곤해지며 잠이 왔다. 남의 집에서 잠까지 잘 수야 없지. 미미는 고개를 흔들어 잠을 털어버리고 뭐 집중할 게 없나 찾았다. 정면의 텔레비전 옆에 작은 액자가 몇 개 놓여 있어 슬슬 다가가 구경을 했다. 하나는 10년도 더 되어 보이는 낡은 사진으로 30대 초반인 듯한 여성이 곱게 한복을 차려 입었다. 아마도 지혜의 엄마일 텐데,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엄마 닮았네.”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옆의 액자로 바꿔들고 보았다. 이건 비교적 최근에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데, 아빠로 보이는 아저씨와 나란히 선 지혜의 모습이 담겨 있다. 미미가 사진을 보고 있는 동안 지혜가 쟁반에 오렌지 주스와 쿠키를 담아왔다.

“이리 와서 이거 먹어라.”

그러나 미미는 얼음이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는 것 같다. 지혜가 일어나 미미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아니, 여기 너네 아빠야?”

“응. 왜?”

“분명히 내가 아는 얼굴인데. 틀림없이 만났어. 근데 생각이 안 나.”

“우리 아버지를 네가 만났을 리가 없는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미미를 놔두고 지혜는 안방으로 들어가선, 제법 커다란 사이즈의 액자를 들고 돌아왔다.

“자, 큰 사진이야.”

“어디 봐봐.”

미미가 액자를 받아들고 살펴보니 경찰모를 쓰고 제복을 입고 있는 지혜의 아버지가 어깨까지 꽉 들어차 있는 정면 사진이다. 미미는 그를 어디서 봤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미미는 놀라서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앗! 알았다. 이, 이건…….”

“왜 그래?”

의아해하는 지혜에게 미미가 달려들며 외쳤다.

“너야말로 내가 진정 복수하고 싶던 원수의 딸이로구나. 잘 만났다.”

미미는 지혜에게 주먹 대신 간지럼을 태웠다. 의외로 지혜는 간지럼에는 약한 듯 이리저리 몸을 빼며 야단을 피웠다.

“야, 야. 왜 이러는 거야?”

“이 아저씨, 남부 경찰서장 맞지, 너네 아빠?”

“응? 맞아. 야, 이거 놔.”

“넌 오늘 죽었어. 이 원수! 내가 지나가는 애들한테 차비 좀 빌리려는데, 네 아빠 때문에 경찰서로 끌려갔더랬지!”

“당연한 거 아냐. 이제 보니 너 아프다는 거 순 꾀병이었구나.”

미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지혜는 이리저리 거실을 피해 다녔다. 하지만 미미가 어떻게든 지혜를 간질이려고 달려들자 참다못한 지혜가 눈을 부릅뜨며 “그만 하랬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미 지혜의 매서운 손맛을 본 미미가 놀라 딱 멈추고 둘 사이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문 밖에 혹시 사람이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궁금하게 만드는 그렇게 크고 맑은 웃음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티렉스에 빠져서 성적이 막 곤두박질쳤다는 거야?”

“네. 콘서트다 공개방송이다 티렉스만 나오면 쫓아다녔으니까요.”

승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미미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이야, 의외네. 우리 미미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이, 우리 또래 중에서 티렉스 안 좋아하던 사람이 어디 있었나요?”

미미가 곱게 눈을 흘기며 대꾸한다.
사실은 이렇다. 미미의 성적은 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었다. 오전 수업만 듣는 수영부 2명을 제외하고 꼴찌였으니까. 사실 야간 자율학습도 간식 먹는 재미에 남아 있는 것에 불과했다. 지금도 미미와 지혜는 야간 자율학습 3교시(시간상으로는 밤 10시다)가 끝나자마자 학교 후문을 나와 자그만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만두로 소박한 성찬을 차려놓고 행복한 입맛을 다시고 있는 중이다.

“야, 오늘은 네가 돈 내.”

“응?”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미를 쳐다보는 지혜.

“너 때문에 내가 돈줄이 말랐으니까 네가 내야지.”

지혜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한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네가 애들한테 수금 못하게 했잖아. 한 번만 더 그러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너 땜에 내가 얼마나 타격이 큰 줄 알아?”

입술을 삐쭉 내밀고 얼굴 가득 불만을 드러내는 미미에게 지혜가 예의 그 얼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하지 말아야지. 그게 무슨 짓이니. 네가 깡패야? 다시 그런 일이 한번만 더 내 눈에 띄어봐. 팔다리 하나씩은 부러질 각오를 해야 할 거야.”

“어이쿠, 무서워라. 아주 한 대 치겠네. 더러워서 안 한다. 안 해.”

미미의 확답에 지혜도 곧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도대체 넌 뭣 때문에 돈이 그리 필요한 거야?”

“왜, 네가 주게?”

주먹을 들어 보이는 지혜.

“내가 어디 나한테 돈 쓰려고 그러는 것 같니. 다 티렉스 오빠 잘 되라고 그러는 거지.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팬질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콘서트 가는 거나 팬클럽 연회비는 기본이고 생일이나 기념일마다 꽃이다, 선물이다 허리가 휜다니까. 요즘에는 오빠 인형이랑 액세서리 같은 것들도 나오거든. 이런 상품들이 다 한정으로 나오는 거라 무조건 빨리 사둬야 된다고.”

미미의 말에 지혜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참, 상술도 가지가지구나. 애들 코 묻은 돈을 뜯겠다고 머리 잘 굴린다.”

“그뿐인 줄 아니. 이번 3집 앨범도 벌써 14장이나 샀단 말이야.”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지혜도 이번만큼은 제법 놀랐다.

“뭐, 열네 장!”

“그래. 14장. 이번 앨범 속에 복권 같은 게 10장 들어 있거든. 운만 좀 좋아서 그게 걸리면 오빠랑 같이 밥도 먹을 수 있대. 이런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니.”

득의양양한 얼굴로 주워섬기는 미미가 진심으로 한심한 지혜.

“앨범이 총 몇 장이나 나갔는데?”

미미,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신이 났다.

“아, 글쎄. 차트 보니까 나온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80만 장이나 팔렸더라고.”

“너는 도대체 확률 개념이라고는 전혀 없구나. 그냥 단순하게 따져 봐도 80만 분의 10이야. 모르긴 몰라도 네가 수학 시험을 전부 다 찍어서 100점 맞는 거랑 비슷할걸.”

그 말에 미미는 풀이 죽어 대꾸했다.

“그래도 그게 내가 될 수도 있잖아.”

“물론 가능이야 하지. 하지만 정확한 확률은 자그마치 0.00001……”

“아우, 됐어. 그 놈의 확률 얘기 좀 그만해. 나는 믿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오빠와 나는 이미 마음으로 통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도 뚫고 결국 만나게 될 거야.”

“말을 말아야지. 너랑 무슨 얘기를 하겠니. 고3이 아직도 연예인에 미쳐가지고서는…….”

“참나. 오빠 좋아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잠깐, 그러는 넌 누구 좋아하는데?”

“응?”

“좋아하는 뮤지션 말이야.”

“음……, 차이코프스키…….”

방금 전 지혜와 똑같은 눈빛으로 한심하다는 듯 지혜를 쳐다보는 미미였다.

“입술에 떡볶이 국물을 범벅을 해갖고는 무슨 스키야. 고상한 척하기는.”

“정말? 얼굴에 묻었어?”

급히 휴지를 찾는 지혜에게 미미가 놀리듯 말했다.

“뻥이야. 다 먹었으면 이제 일어나자. 여우한테 물릴라.”

지혜가 정말로 주인아주머니에게 계산을 치르자 미미는 내심 기뻐했다. 문득 분식점의 누군가가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앗, 티렉스 오빠다!”

미미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에 놀란 지혜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벽 선반에 올려져 있는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 짧은 머리의 티렉스는 소파에 반쯤 눕다시피하며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쉬는 시간 끝났어. 나가자.”

“지혜야. 우리 이거 다 보고 가자. 내 소원이야, 정말로.”

지혜의 팔을 붙잡고 애걸하는 미미. 간절한 미미의 눈빛에 지혜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자리에 앉았다. 티렉스를 보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미미는 텔레비전이 보이는 지혜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결국 방송을 보느라 두 소녀는 야간 자율학습 4교시에 30분을 지각했고, 당연히 여우에게 들키고 말았다. 지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다섯 대나 맞았다.
지혜가 미미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 건 바로 다음 날의 일인데, 아침 자율학습 시간에 지혜 옆에 나란히 앉은(미미는 지혜의 짝과 자리를 강제로 바꿨다.) 미미는 지혜에게 뭔가를 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자기가 가져온 노트를 건넸다.

“이게 뭐야?”

“한번 읽어봐 줘.”

“뭔데 그래?”

“아, 그냥 읽어보라니까.”

지혜가 보니, 노트에 몇 줄 길이의 글이 적혀 있다. 소리 내어 읽으려 하자 미미가 기겁을 했다.

“저기 솜사탕같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보여,
브레이크 없는 전진 나는 이미 크레이지,
눈부신 너의 윙크가 내 마음 깊은 곳을 노크하고,
애써 준비한 나의 조크에 너는 핑크빛 부드러운 미소를 짓네.
새콤달콤한 너의 입술을 훔친 난 풍선이 되어 하늘을 날고,
훔쳐보던 해바라기도 부끄러워 고개 숙여요…….
이게 뭐야?”

“어때, 읽을 만해?”

미미가 빨개진 얼굴로 묻는다.

“이게 뭐냐니까?”

“아, 이번에 이벤트를 하거든. 티렉스 오빠 다음 앨범에 팬들이 만든 가사를 갖고 노래를 만든대. 잘 되면 내 것이 될 수도 있잖겠어. 어제 새벽 3시까지 썼는데, 제목은 「첫 키스」야. 라임(rhyme)에도 신경 많이 썼다고. 윙크, 노크, 조크, 핑크. 어때 리듬감 있지”

“유치해.”

지혜가 일축하자 미미가 발끈했다.

“뭐가 유치해. 랩은 원래 이렇게 쓰는 거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나 책은 많이 읽거든. 특히 할리퀸 많이 읽었단 말이야. 넌 누구 거 읽는데?”

“도스토예프스키…….”

“아우, 정말 그놈의 스키들은! 에이, 너같이 고지식한 애랑은 이제 얘기 안 해.”

미미는 벌떡 일어나 뒷목을 잡곤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지만 지혜는 붙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뚫어지게 「첫 키스」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 두 소녀는 하루 종일 냉전 상태였지만, 7시부터 시작되는 야간 자율학습 때 마침내 지혜가 침묵을 깼다.

“미미야, 나랑 얘기 좀 할래.”

“응?”

내심 침묵이 불편했던 미미가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뭘?”

“사실은 네가 쓴 「첫 키스」 상당히 괜찮았어.”

“정말?”

미미가 반색하며 묻자 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심이야.”

“진짜? 아, 다행이다. 어떻게 잘 되겠니?”

“가능성 있어 보여. 너 상당히 글 솜씨가 좋더라.”

“야, 내가 이래봬도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도 나갔던 사람이야.”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너 내가 보니까 티렉스 노래 전곡 다 외우는 거 같던데.”

“당연하지. 그동안 오빠가 부른 서른일곱 곡 다 외우고 있다니까.”

“암기력도 좋네. 랩이라는 게 되게 길던데.”

“뭐 하도 듣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외워지더라고.”

“글재주도 있고, 머리도 좋은데 왜 공부는 안 하는 거야? 이제 우리도 고3인데 말이야.”

미미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으으. 왜 그런 걸 물어보냐. 공부 못해도 이 얼굴이면 어디 가든 대접받는데 뭐 하러 공부를 해.”

“네가 좋아하는 티렉스는 어제 들어보니까 대학도 잘 갔던데. 창피하지 않니?”

“뭐가 창피해!”

“자기가 공부 잘한 사람이라, 팬이라고 쫓아다니는 애가 반에서 꼴찌하고 그러면 겉으로야 반겨도 속으로는 비웃을 것 같은데. ‘쟤 좀 봐, 얼굴은 예쁜데 머리는 깡통이잖아. 텅텅텅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이러면서 말이야.”

“너 말 다했어! 친구한테 너무 하는 거 아냐?”

“아니,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티렉스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만약에 그 사람이 진짜 그런 생각을 안 해도 솔직히 좀 꿀리는 건 사실 아냐? 네가 티렉스랑 잘 된다 치자. 사람들이 티렉스 서울대다 그러면 ‘와’ 하다가, 너는 고졸이다 그러면 ‘에이’ 할 거 아냐.”

“좋아하는데 학교가 무슨 상관이야.”

부어터진 미미를 지혜는 차분히 달랜다.

“네가 사람들 얘기 신경 안 쓴다면 그건 괜찮은데, 아무래도 내년에 대학 가서 떳떳하게 티렉스 앞에 서면 사귈 가능성이 더 높아질 거 아니니. 안 그래?”

“…….”

“네가 아주 틀려먹었다면 이런 얘기 하지도 않았을 거야. 근데 내가 봤을 때 너 분명히 가능성이 있어.”

“반에서 꼴찌한테 무슨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그제야 지혜는 활짝 웃으며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 내 목표는 널 반드시 대학에 보내는 거야. 아무래도 적성을 살려 국문과가 좋겠지.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하면 분명히 갈 수 있어. 솔직히 아주 상위권 대학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대학생이 되는 거야. 신나지 않니? 너같이 예쁜 애가 캠퍼스를 걸으면 남자들이 줄줄 따라올걸.”

지혜의 말에 미미는 잠시 구름 위를 나는 듯한 황홀감을 느꼈지만, 이내 손사래를 쳤다.

“에이, 내가 어떻게. 1년밖에 안 남았는데 무슨 수로.”

“‘1년밖에’가 아니라 ‘1년이나’지. 게다가 넌 지금 워낙 머릿속이 백지라 습득도 훨씬 빠를걸. 구체적인 방법은 내가 알려줄게. 일단 수학이나 과학은 기초가 없으면 어려우니까 그냥 제쳐둬! 그 시간에 역사나 윤리 같은 암기과목을 공부하는 거야. 남들 수학 문제 푸는데 몇 시간씩 걸릴 때 넌 암기과목들 그냥 외우기만 하면 되니까 유리하잖아. 국어는 원래 네가 재능이 있으니까 내가 조금만 봐주면 금방 감을 잡을 것 같아. 또 영어는…….”

오늘 내내 생각한 내용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 티렉스의 랩보다 빠르게 말하는 지혜다.

“미련 없이 버릴 건 버리고 얻을 건 얻자. 수학, 과학을 포기해도 다른 과목에서 만회가 되니까 아마 반에서 20등 안에는 들 수 있을 거 같아. 나를 믿고 따라와, 어때?”

미미는 지혜의 열의에 감동했고, 분명히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 사실 그동안 고3이 됐는데 매일 놀고만 있다는 게 내심 불안하기도 했던 것이다.

“음, 정말 될까……? 어디 한번 해볼까.”

지혜의 얼굴은 순수한 기쁨으로 환히 빛난다.

“자, 바로 시작하자. 내 1교시는 국어야. 일단 네가 쓴 「첫 키스」를 시로 보자. 시에는 다양한 표현 기법이 있어. 마지막 행에 ‘훔쳐보던 해바라기도 부끄러워 고개 숙여요.’ 하고 썼잖아. 해바라기가 사람도 아닌데, 훔쳐보고 부끄럽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이렇게 사람이 아닌 걸 사람처럼 표현한 걸 ‘의인법’이라고 하는 거야. 너 안 적고 뭐 하니?”

미미의 고초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한 달 내내, 매일같이 계속됐다.

예컨대 미미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려 하면 바깥에 있던 지혜가 몸으로 문을 막고는 다짜고짜 문제를 던졌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을 순서대로 불러봐. 답 못 하면 못 나올 줄 알아.”

“야!”

부여로 1박 2일의 짧은 수학여행을 갔을 때는 낙화암 앞에서.

“낙화암은 서기 660년 백제가 함락됐을 때 궁녀 3000명이 치욕을 당할 수 없다 해서 투신해 모두 죽었다는 전설이 있어. 자 여기서 문제, 신라와 연합해서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중국 왕조는?”

“야!”
짝짝짝, 호들갑스런 박수소리가 자스민의 정적을 깼다.

“이야, 정말 멋진 사람이네, 지혜 씨. 나 완전히 감동했는걸. 친구를 위해 자기 공부할 시간도 줄여가면서 희생하다니.”

이렇게 말하는 승우는 눈시울까지 살짝 붉어져 있을 정도였다.

“나 이제야 알았어. 자기에게 지혜 씨가 왜 그리 특별했는지. 자기가 티렉스 때문에 성적 떨어졌을 때 지혜 씨가 공부 도와줘서 그랬구나. 나 정말 지혜 씨에게 크게 한턱내야겠는걸. 자기가 대학 못 갔으면 혜경이도 못 만났을 거고, 그러면 오늘 이렇게 함께 하고 있지 못할 테니까.”

“맞아요. 지혜 덕분에 오늘 이렇게 행복한 날을 맞이하게 된 거죠. 이러니 어떻게 내가 지혜를 보고 싶지 않을 수 있겠어요.”

미미는 밝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를 끝마쳤다.

“정말 지혜 씨 빨리 보고 싶네. 어디쯤 왔으려나.”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너무도 고마운 지혜와 어서 만났으면 하는 승우였다.

과연 미미는 지혜의 도움으로 대학에도 진학했고, 졸업해서 승우도 만났다. 하지만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모든 것이 끝났던 걸까. 미미가 승우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티렉스와 관련된 비밀스런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혜의 작전은 실행 한 달 반 만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입증되었다. 4월 중순에 치른 중간고사에서 미미가 무려 12등이나 오른 37등을 하게 된 것이다. 여우를 비롯해 반 아이들 모두 놀랐고, 성적표를 받아든 미미 역시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혜는 아직 만족하기 이르다는 듯 담담한 어투로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당연히 오를 줄 알았어. 그렇지만 아직 멀었다고. 방심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해야 할 거야. 다음 기말고사 때는 20등 대로 진입하는 게 목표니까.”

미미는 흡족함을 애써 감추고는 토라진 체를 한다.

“야, 넌 어쩜 얘가 그러니. 학생을 좀 기분 좋게 해줄 줄도 알아야지.”

솔직히 지혜도 무척 기뻤기 때문에 표정 관리가 힘들었지만, 자기가 먼저 풀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미미를 독려했다.

“자, 그럼 오늘은 틀린 문제를 살펴보고 복습하는 시간을 갖자고.”

“으아, 오늘은 쉬자 쫌. 한 달 넘게 매일 12시까지 공부했단 말이야. 오늘은 못해, 난 못해.”

재빨리 말을 마친 미미는 가방을 낼름 집어 들고는 바람처럼 문을 열고 튀어나갔다. 지혜는 표정을 구겼지만, ‘오늘 하루쯤은 쉬는 것도 괜찮겠지, 너무 몰아치면 공부에 아예 흥미를 잃을 수도 있으니까.’ 하는 생각도 들어 미미를 뒤쫓지는 않았다. 복습은 내일 하기로 하자.
하지만 다음 날은 미미와 복습도, 예습도 할 수 없었다. 그간 단 한 차례도 결석을 한 적이 없던 미미가 학교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 다니면서 탈 수 있는 유일한 상이 개근상이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죽어도 사수하겠다.”고 한 미미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지혜에게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고, 어제는 집에도 같이 가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종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혜는 미미네 집에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모처럼 아버지와 외식하기로 약속했다. 내일은 나오겠지. 내일도 안 나오면 반드시 찾아가 보리라 마음을 먹고 우울한 기분으로 지혜는 교문을 나섰다.
언제나처럼 아침 6시에 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선 지혜는 크게 놀라고 말았는데,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미미를 보았기 때문이다. 매일 지각하는 미미가 나보다 먼저 와 있다니, 지혜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놀란 마음은 잠시고 안도감이 더 컸다.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었구나.

“미미야!”

지혜는 팔을 뻗어 미미를 흔들어 깨웠다.

“얘, 너 어제는 왜…….”

지혜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미미는 자고 있던 게 아니라 울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든 미미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보는 사람조차 이유도 모르고 따라 슬퍼질 정도였다.

“왜……?”

항상 지나치게 밝은 미미의 모습만 보던 지혜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미미의 얼굴에 말문이 막혀 제대로 물을 수도 없었다.

“지혜야. 나 어떡해.”

미미의 울음 섞인 목소리.

“왜 그러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것 좀 읽어봐.”

지혜는 미미에게 반으로 접힌 신문을 건네고는 어느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지혜는 얼른 미미가 가리킨 작은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데, 표제가 먼저 시선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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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일단 끝까지 읽어봐.”

미미의 짜증에 지혜는 표제 아래 기사를 재빨리 읽는다.

또는